신간회
독립운동단체, 항일단체, 좌우합작, 민족운동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11
신간회는 1927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힘을 합쳐 창립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단체입니다. 민족 단일당 민족 협동 전선을 내세우며 언론 자유 쟁취 등 다양한 목표를 추구했습니다. 한때 4만 9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국내 최대 규모의 합법적 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하지만 지도부의 타협적인 노선과 내부 갈등으로 결국 1931년 해소되었습니다.
1922
[민족개조론 발표]
이광수가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노선 갈등을 심화시키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는 계기가 됩니다.
1925
[자치운동의 시작을 알린 '민족적 경륜' 발표]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발표하며 일제 지배하의 자치운동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강한 비난을 받으며, 이들의 협력과 연대 움직임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1926
[사회주의 주요 세력 연합, 정우회 조직]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 등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 4개 그룹이 연합하여 '정우회'를 서울에서 조직했습니다.
이는 향후 민족협동전선 형성의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민족주의 세력과 적극 제휴" 정우회 선언 발표]
정우회가 역사적인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은 이전의 사회운동을 비판하며 분파 투쟁 청산과 사상 단체 통일,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전환, 그리고 "민족주의 세력이 타락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해 싸워야 한다"는 민족협동전선 전개를 주장하며 신간회 결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본 지회는 부르짖는다. 신간회 해소는 투쟁을 위하여, 해소 투쟁의 전개는 우익 민족주의자의 정체 폭로의 노농주체의 강대화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우익 민족주의자의 정체는 이상의 우리 해소 이론에 의해 폭로되었으리라고 믿는다. 신간회는 영도권이 소부르주아에 있으니 소부르주아의 집단이다. 계급적 영도권에 의한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욕 성장에 현재의 신간회는 장애물이다.
1927
[민족 협동 전선, 신간회 마침내 창립!]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손을 잡고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단체 '신간회'를 공식 창립했습니다.
창립인으로는 소설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 역사학자 안재홍,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 등 34명이 이름을 올렸으며, 월남 이상재 선생이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이는 국내 독립운동의 새 지평을 연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창립총회에서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그리고 안재홍, 신석우, 문일평을 비롯한 간사 35명을 선출했습니다. 조직확대에 주력하여 1928년 말경에는 지회 수 143개, 회원 수 2만 명에 달하는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초대 회장 이상재 별세, 법률가 김병로 새 위원장으로]
신간회의 초대 중앙집행위원장이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법률가 가인 김병로가 새로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며 신간회는 새로운 리더십을 맞이하게 됩니다.
[동경 지회, 신간회 강령 수정안 제안]
신간회 동경 지회에서 기존 강령을 더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내용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 실현', '전 민족의 총 역량을 집중한 대표 기관', '일체 개량주의 운동 배척' 등을 명시하여 신간회의 목표 의식을 강화하는 시도였습니다.
수정안 내용은 "우리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 "우리는 전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하여 민족적 대표 기관이 되기를 기함", "우리는 일체 개량주의 운동을 배척하여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 입니다.
1928
[코민테른, 민족주의자와의 단절 '12월 테제' 발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휘하던 코민테른이 제6차 대회에서 민족주의자와의 단절 및 적색 노동조합운동 노선으로의 전환을 결의하는 이른바 '12월 테제'를 발표했습니다.
이는 신간회 내 사회주의계에 큰 영향을 미쳐 해소 운동의 한 원인이 됩니다.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 지회 143개 회원 2만 명 돌파!]
신간회는 조직 확대에 주력한 결과, 1928년 말경에는 지회 수 143개, 회원 수 2만 명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신간회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항일 독립운동 단체임을 입증하는 기록적인 성과입니다.
1929
[신간회, 간사제 폐지하고 집행위원회 체제 개편!]
신간회가 인근 지역 대표들을 모아 '복(複)대표대회'를 열고 기존 간사제를 폐지한 후 '집행위원회 체제'로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반수 가까운 사회주의자가 간부로 선출되었고, 허헌이 새로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며 신간회 운영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광주학생운동 진상 조사 및 민중대회 준비 중 간부 대거 검거 ('민중대회사건')]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는 즉시 진상조사위원을 파견하여 시위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이어 언론사, 종교세력, 근우회 등과 연대하여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했으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조병옥, 이관용, 허헌 등 간부 44명 포함 총 90여 명이 체포되는 대규모 검거 사태를 맞았습니다.
이를 '민중대회사건'이라 부르며, 신간회에 큰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병로를 중심으로 하는 신집행부가 구성되었습니다. 신간회는 또한 원산 총파업 등 노동 운동을 지도했습니다.
1930
[신간회 해소론 대두, 부산 지회에서 최초 결의]
광주학생운동 이후 지도부의 타협적 노선과 우경화 현상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되었습니다.
1930년에 부산 지회에서 신간회의 활동에 의문을 제기하며 최초로 해소 결의를 했고, 이는 다른 지회로도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31
[결국 해소! 신간회 창립 4년 만에 역사 속으로]
내부적인 좌우 갈등 심화와 코민테른의 좌경화 노선, 그리고 지도부의 타협적 태도 등으로 인해 해소론이 확산되던 신간회는 창립대회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전체 대회에서 찬성 43, 반대 3, 기권 30이라는 표결로 해소안을 가결했습니다.
이로써 4년여간 활발히 활동했던 신간회는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신간회 해체 이후 사회주의계는 중요한 합법적 활동 무대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후 국내에서는 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일제 경찰의 강압으로 새 단체 조직 논의도 진행되지 못하고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