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개혁
개혁, 근대화, 정치 개혁, 경제 개혁, 군사 개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06
광무개혁은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이 주도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입니다. 옛 것을 근본 삼아 새 것을 참작한다(구본신참)는 원칙 아래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 강화와 부국강병을 목표로 했죠. 대한국국제 반포 원수부 설치 양전사업 근대 은행·학교 확충 등 다방면에서 자주적인 근대국가 건설을 모색했습니다. 비록 재정 한계와 외부 간섭으로 완전한 성공은 어려웠으나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 의지를 보여준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1897
[대한제국, 자주적인 광무개혁의 닻을 올리다]
대한제국 고종이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하며 '옛 것을 근본 삼아 새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새로운 국가 개혁, 광무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황제 중심의 강력한 전제군주제 확립을 목표로 한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시도였습니다.
[황제의 개혁 의지, 특별 입법 기구 교전소 출범]
법률과 칙령 개정안을 마련하기 위해 황제 직속의 특별 입법 기구인 교전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는 황제가 국정의 주요 권한을 장악하고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핵심 조치였습니다.
[근대 금융의 새 지평을 열다, 한성은행 설립]
광무개혁 시기 상업 진흥 정책의 일환으로 한성은행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은행은 당시 대한제국에 설립된 주요 근대식 은행 중 하나로, 조선의 경제 근대화와 상공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1898
[전국 토지를 파악하라! 양전 사업과 지계 발급 개시]
국가 재정 확충과 근대적인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고자 양전 사업(전국 토지 측량)이 시작되고, 토지 소유 증서인 지계(地契)가 발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불명확했던 토지 소유 관계를 명확히 하고 세수 기반을 다지려는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이 사업은 토지 소유주를 시주(時主)라 부르고 이를 칙령으로 규정하며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마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소유권 문제와 국유지/민유지 분쟁으로 이어지며 민심 이반을 초래하는 등의 한계도 있었습니다.
1899
[대한제국의 헌법, 대한국국제 반포로 황권 확립]
대한제국의 헌법과도 같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반포되어 황제의 절대적 권한을 명시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이 황제 중심의 자주적인 근대 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황제 중심의 국정 운영 강화, 행정 13도 재개편]
대한국국제 반포와 함께 태황제는 국정의 주요 권한을 황제에게 집중시켜 전제군주제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또한 기존 23부 체제였던 행정 구역을 다시 13도로 재개편하여 중앙 집권력을 높이려 했습니다.
[황제의 군사 통치 강화, 원수부 설치 및 군대 증강]
황제가 직접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 최고 기구인 원수부를 설치하고, 서울의 중앙군과 지방군을 대폭 증강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나섰습니다.
아울러 근대적 군사 인력 양성을 위해 육군무관학교도 설립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은행의 시작, 대한천일은행 탄생]
오늘날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되었습니다.
이는 광무개혁 시기에 추진된 상공업 진흥책의 핵심 성과 중 하나로, 근대적 자본 확충과 기업 활동 지원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습니다.
1900
[근대화의 상징, 단발령 재공포]
고종 황제는 이미 1895년에 시행되었던 단발령을 다시 공식적으로 공포했습니다.
해외를 다녀온 고위 관리들과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단발에 동참하면서, 근대화의 상징인 단발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부 성리학자들은 '목은 잘릴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강하게 저항했고, 특히 신식 학교에 가려면 머리를 깎아야 했기에 신교육 보급에 대한 국민적 저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생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움직임 속에서 단발은 점차 자연스럽게 보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