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
조선 말기 사회운동, 사상운동, 유교 학파, 정치 세력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03
조선 말기 흔들리는 나라를 지키려 했던 유생들의 필사의 외침! 정학인 성리학을 수호하고 외래 사상을 배척하며 시작된 이 운동은 개항에 반대하다가 결국 항일 의병 운동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보수적이었지만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던 이들의 뜨거운 열정을 만나보세요.
1785
[서학의 옥 발생]
서학(천주교)이 조선 사회에 스며들자, 유생 유하원 등이 서학 서적의 금단을 주장하며 천주교에 대한 첫 번째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이후 위정척사 운동의 전조가 됩니다.
서학, 즉 서양 학문이자 종교인 천주교가 조선에 전파되면서 전통 유교 질서와 충돌하게 됩니다. 유하원을 비롯한 유생들은 천주교 서적을 불허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보수 유생들의 반발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788
[천주교 서적 소각 명령]
유생 이경명이 서학의 폐해를 지적하며 강력히 상소했고, 그 결과 조정은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천주교 확산에 대한 조정의 공식적인 첫 번째 단속이었습니다.
이경명은 천주교가 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며 배척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정부는 서학 관련 서적들을 수거하여 불태우는 강경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천주교 박해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1791
[천주교 박해, 본격적인 시작]
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 정부는 고위 관료들의 끊임없는 상소에 힘입어 천주교 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이는 위정척사 사상이 국가 정책으로 반영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1791년부터 정부 주도로 천주교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대부분 유교적 신념을 가진 고관들의 적극적인 주장과 상소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위정척사 운동이 단순한 유생들의 주장을 넘어 국가적인 탄압으로 발전했음을 의미합니다.
1839
[피의 숙청, 기해사옥과 척사윤음]
유생 이지연의 천주교 토치 주장을 시작으로 '기해사옥'이라는 대규모 천주교 박해가 발생하여 수많은 신자가 처형되었습니다.
정부는 오가작통법을 시행하고 '척사윤음'을 반포하며 천주교 척결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가장 잔혹한 박해 중 하나입니다.
이지연은 천주교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여파로 발생한 기해사옥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정부는 연좌제를 강화하는 오가작통법을 도입하여 천주교 세력을 통제하려 했으며, 11월에 반포된 '척사윤음'을 통해 천주교 배척이 국가의 확고한 방침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는 위정척사 운동의 잔혹한 면모를 보여주는 주요 사건입니다.
1866
[외세 배척의 목소리, 척화소]
위정척사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인 기정진과 이항로 등이 서양 세력과의 통상을 반대하며 '척화소'를 올렸습니다.
이는 서구 열강의 침략적 접근에 대한 유생들의 강력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서양과의 통상 및 교류를 반대하는 '척화소'는 당시 위정척사파의 주장을 대변하는 상소였습니다. 특히 기정진과 이항로는 위정척사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인물들로, 이들의 상소는 외세 배척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는 병인양요 등 서구 세력과의 충돌이 잦아지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1876
[강화도조약 반대, 영남 만인소의 함성]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유생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유생 만여 명이 개화 정책과 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영남 만인소'를 올렸습니다.
이는 대중적인 규모의 반대 여론을 형성하며 위정척사 운동이 더욱 확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서구식 근대 국가와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에 이만손 등 영남 유생들은 만 명이 넘는 인원이 서명한 '만인소'를 올려 개항과 개화 정책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이후 김평묵, 최익현 등 다른 위정척사파 인사들도 꾸준히 개화 반대 상소를 이어가며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894
[위정척사의 마지막 투쟁, 항일 의병 운동]
갑오개혁 이후, 위정척사파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국권 수호를 위해 항일 의병 운동으로 그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매국 역도 처단과 무장 투쟁을 통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이들의 활약은 위정척사 운동의 마지막이자 가장 치열한 모습이었습니다.
갑오개혁은 조선의 자주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일본의 간섭이 심화되면서 많은 유생들은 이를 외세에 의한 개혁으로 인식하고 반발했습니다. 이후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위정척사파 유생들은 더 이상 상소나 이론적 주장만이 아닌, 직접 무기를 들고 나라를 지키는 항일 의병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들은 매국 세력을 처단하고 일본에 맞서 싸우며, 독립 정신의 불씨를 지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