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전쟁, 조선 시대, 동아시아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01
1636년 겨울 강대국 청나라가 약소국 조선을 침공하여 발발한 비극적인 전쟁.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기근과 강화도 함락으로 결국 치욕적인 항복을 맞이함. 수십만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며 조선 사회에 유례없이 막대한 상처를 남김. 조선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을 굴욕적인 사건이자 이후 북벌론과 북학 운동의 배경이 됨.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상징하는 중대한 전환점 역할을 수행함.
- 청나라, 조선 침공 시작
- 쌍령 전투 대패
- 홍타이지의 항복 요구 서한 도착
-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
- 인조, 남한산성 농성 시작
- 가짜 왕자 인질 작전 실패
- 강원도 근왕군 패퇴
- 광교산 전투, 조선군 승리
- 남한산성 식량 고갈 위기
- 강화 사신 파견 및 뇌물 공세
- 극한의 추위, 병사들 아사 시작
- 근왕군 전멸 소식 접수
- 청의 최후 통첩 및 강화 협상 결렬 위기
- 척화파의 격렬한 항복 반대
- 청군의 홍이포 공격 및 내부 비난
- 청의 강경한 신하 인계 요구
- 청의 최종 요구 및 국서 반환
- 강화도 함락, 왕족 인질 확보
- 홍이포의 치명적 공격
- 남한산성 성벽 붕괴 및 최종 통보
- 인조의 항복 결정, 강화도 함락 소식
- 굴욕적인 항복 준비와 척화파의 좌절
- 삼학사의 마지막 인사
-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 종결
1636
[청나라 서신 발송 제안]
전쟁 직전, 조선 비변사가 청나라에 서신을 보내는 것을 인조가 허락하며 긴장된 상황을 보여주었다.
[청나라, 조선 침공 시작]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이끄는 약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하며 병자호란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은 박로를 사신으로 파견하며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인조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던 청군은 백마산성 등 산성들을 우회하며 한성을 향해 신속히 남하했다. 조선의 긴급 통신체계가 작동하지 않아 청군의 침공을 뒤늦게 인지했다.
[척화파의 사신 귀환 주장]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 박로를 귀환시키라는 척화파의 강경한 주장이 며칠간 이어졌다.
이는 조선 내부의 주전론과 주화론 대립을 보여주었다.
1637
[쌍령 전투 대패]
경상도 근왕군 8,000여 명이 광주 쌍령에서 청군에게 대패하고 지휘관들이 전사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수십 배 우세한 병력이었음에도 훈련도 부족과 지휘관의 무능으로 힘없이 무너져 남한산성의 고립을 심화시켰다.
경상도 근왕군은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이 이끄는 약 4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었으나, 선봉 8천여 명이 광주 쌍령 근처에서 청군 기병 300기 및 살수 1천 명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부대에 맞섰다. 조선군 대부분이 조총으로 무장했으나 훈련도가 낮았고, 화약과 화살을 낭비한 끝에 청군의 재돌격에 궤멸당했다. 좌군은 허완과 함께 전멸하고, 우군 역시 민영이 사망하며 무너졌다. 본진을 이끌던 심연은 선봉대의 패배 소식에 조령 이남으로 철수하며 팔도의 근왕군 중 가장 큰 규모의 부대가 무력화되었다.
[홍타이지의 항복 요구 서한 도착]
청 태종 홍타이지가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교유하노라"라는 내용의 강력한 항복 요구 서한을 보냈다.
이는 조선 조정에 큰 압박으로 작용하며 항복 논의가 더욱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다.
[완풍부원군 이서 사망]
남한산성 수비를 담당하던 완풍부원군 이서가 성 안에서 사망했다.
물자 부족과 추위, 그리고 청군의 압박 속에서 성 안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신]
청군이 한양 코앞인 개성까지 진격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길이 막혀 급히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왕실의 주요 인사들과 신주를 강화도로 보내며 긴박한 상황에 대응했다.
청군의 신속한 남하로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상황이었다. 인조는 1월 10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인조, 남한산성 농성 시작]
강화도 피신이 좌절된 인조와 조정이 결국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농성을 시작했다.
동시에 청나라 진영에 사신으로 갔던 최명길이 돌아와 상황을 보고하며 긴박감이 고조되었다.
[가짜 왕자 인질 작전 실패]
청나라의 인질 요구에 가짜 왕자를 보냈다가 발각되어, 조선 사신 박난영이 현장에서 살해되는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청의 요구가 얼마나 강경했으며 조선의 위기가 심각했는지 보여준다.
강원감사 조정호가 이끄는 근왕군은 12월 24일 검단산까지 진출했으나 청군에게 격파당해 사기가 떨어져 1월 21일 최종 후퇴했다.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사 유림이 이끄는 5천여 명의 군대가 남한산성 구원을 위해 평양을 출발했으나, 철원, 연천 등지에서 청군 별동대에 막혀 진격하지 못했다.
[남한산성 방어 성공]
청군이 남한산성 남쪽을 공격했으나, 조선군이 화포를 이용해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산성의 방어력을 과시했다.
[청군 장수와 조선 대신 회동]
청나라 장수 마푸타가 남한산성 아래에서 조선 대신들과 회동하며 긴장감 속에서 협상의 여지를 탐색했다.
[주화파 처형 주장 제기]
척화파의 핵심 인물인 윤집 등이 주화파 대신들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는 산성 내 극심한 내부 갈등을 보여준다.
[기상 악화와 간절한 기도]
끝없이 내리는 진눈깨비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인조와 신하들이 천지신명에게 간절히 제사를 지내며 국난 극복을 염원했다.
이는 절망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충청도 근왕군 출병]
충청도 근왕군이 남한산성으로 출발하며, 조정에서는 예조가 백제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내 국운 회복을 기원했다.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도 근왕군은 12월 27일 남한산성 남쪽의 험천에 당도했으나, 청군 별동대에 요격당해 10여 차례 방어에 성공했음에도 지휘관 다수가 전사하며 성과 없이 퇴각했다.
[강원도 근왕군 패퇴]
남한산성 구원을 위해 진격했던 강원도 근왕군이 산성 근처에서 청군에게 패배하고 후퇴하면서, 고립된 인조의 희망이 점차 사라졌다.
원주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선봉대 1천여 명이 검단산까지 진출했으나 청군에게 격파당했고, 사기가 떨어진 근왕군은 무너졌다.
[함경도 근왕군 출병 및 청의 압박]
함경도 근왕군이 남한산성을 향해 출발했으나, 동시에 청나라 측은 조선이 보낸 술과 고기를 거부하며 항복을 종용하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함경감사 민성휘가 이끄는 7천여 명의 근왕군은 양평의 도원수 김자점과 합류를 꾀했지만, 김자점이 움직이지 않아 전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최명길, 강화 논의 제안]
주화파 최명길의 건의로 조선 조정이 청나라와의 강화 협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며, 항전 의지가 점차 꺾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전라도 근왕군 출병 및 남한산성 수비군 패퇴]
전라도 근왕군이 구원병으로 출병했지만, 남한산성에서는 김류가 이끄는 조선군이 북문 전투에서 청군에게 패배하며 다수의 장교가 전사했다.
전라감사 이시방과 전라병사 김준용이 6천여 명을 모아 전주에서 북상했고, 화엄사 승병 2천여 명이 합류했다. 선봉장 김준용은 1월 4일 광교산에서 청군과 만나 승리했으나 탄약 부족으로 퇴각했다.
[척화파의 항복 반대 격화]
척화파 김상헌과 대간들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며 항복 논의에 제동을 걸려 했으나, 전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홍타이지 서한 소각 주장]
홍타이지가 보낸 항복 요구 서한에 대해 일부 신하들은 격분하여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척화의 의지를 보였다.
[척화파 vs. 주화파 대립 격화]
남한산성 내에서 척화와 강화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척화파는 주화파 최명길의 처벌까지 주장하며 내부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광교산 전투, 조선군 승리]
전라도 근왕군이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을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두며 남한산성 조선군에게 한 줄기 희망을 주었다.
김준용 장군의 활약으로 청군 수천 명을 전사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김준용 장군이 이끄는 3,700명의 의병과 관군은 광교산에서 청군과 맞섰다. 포수들의 일제 사격으로 청군 수천 명을 전사시키고 청 태종의 사위와 청 장수 2명까지 죽이며 승리를 거두었다.
[함경도 근왕군 강원도 도달 소식]
함경도 근왕군이 강원도에 도달했다는 보고가 남한산성에 도착하며, 아직 외부에서 구원병이 움직이고 있음을 알렸다.
[남한산성 식량 고갈 위기]
남한산성 내부에 식량이 거의 바닥나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올라오며, 조선군의 항전 의지가 더욱 약화되었다.
인조조차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기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강화 국서 발송 허락]
인조가 김류,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청나라 진영에 국서를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이에 척화파는 강하게 반발했다.
[인조의 국서 확인 및 척화파 반대 지속]
인조가 청나라에 보낼 국서를 최종 확인하는 와중에도, 척화파는 사신 파견 자체를 계속 반대하며 마지막까지 항전을 주장했다.
[강화 사신 파견 및 뇌물 공세]
최명길 등이 청나라 진영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이와 함께 청나라 주요 인물들에게 막대한 뇌물이 전달되며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 했다.
정명수에게 은 1천 냥, 마푸타와 잉굴다이에게 각각 3천 냥의 뇌물이 전달되었다. 또한, 헌릉에 불이 나 3일 밤낮으로 불탔다는 비극적인 소식도 전해졌다.
[극한의 추위, 병사들 아사 시작]
남한산성 내부의 극한 추위로 인해 병사들이 얼어 죽기 시작하며, 기근과 더불어 인명 피해가 가속화되었다.
[근왕군 전멸 소식 접수]
전국 각지에서 모였던 근왕군이 대부분 청군에게 패배하고 궤멸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도착하며, 남한산성 고립이 사실상 확정되었다.
[청의 최후 통첩 및 강화 협상 결렬 위기]
청군은 거대한 깃발에 '항복하라'는 글씨를 내보이며 조선을 더욱 압박했다.
최명길이 다시 청 진영을 찾았으나, 잉굴다이는 더 이상 새로운 제안이 없으면 만나지 않겠다며 문전박대하여 강화 협상이 결렬 위기에 처했다.
[척화파의 격렬한 항복 반대]
척화파 김상헌이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으며 울부짖었고, 대간들도 항복은 불가하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에 최명길이 폭발하며 그들을 꾸짖을 정도로 조정 내부의 갈등은 극한에 달했다.
[청군의 홍이포 공격 및 내부 비난]
청군이 홍이포를 발사하여 남한산성 안으로 포탄이 떨어져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조참판 정온은 최명길이 나라를 팔았다며 맹렬히 비난하는 등 내부의 분열이 극심해졌다.
청군은 망월봉에 홍이포를 설치하고 성 내부를 직접 조준 사격했다. 215cm 포신과 10cm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남한산성 벽을 타격하며 조선군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청의 강경한 신하 인계 요구]
청나라가 항복 답서를 보내며, 항복을 반대하는 조선 신하들을 묶어 보내라는 굴욕적인 요구를 했다.
[청의 최종 요구 및 국서 반환]
최명길이 청의 요구인 '국왕이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전달했다.
이후 잉굴다이는 조선의 국서가 황제의 뜻에 거스른다며 돌려주고 가버려 항복 압박이 최고조에 달했다.
[강화도 함락, 왕족 인질 확보]
청군이 명 수군 출신 장수들을 앞세워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세자빈과 봉림대군 등 왕족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는 남한산성 인조에게 결정적인 충격을 안겼다.
강화도수비총대장 김경징과 강화유수 장신이 지휘권을 놓고 다투며 분열된 틈을 타, 청군이 1월 21일부터 상륙을 시도하여 1월 22일 강화산성을 함락했다. 충청 수사 강진흔이 홀로 고군분투했으나, 무능한 김경징은 청군의 침공을 믿지 않고 뒤늦게 수비에 나서 결국 도주했다. 강화산성이 단숨에 함락되면서 많은 백성이 살해당하고 사대부들이 자결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포로로 잡히며 인조의 항전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척화파 김상헌의 죽음 요청 및 항복 준비]
청군이 남한산성 서문과 동문을 공격했지만 이시백이 막아냈다.
한편, 김상헌은 항복에 반대하며 죽음을 청할 정도로 절박했고, 최명길은 척화신들을 청에 보낸다는 내용의 굴욕적인 국서를 작성하며 항복 절차가 진행되었다.
[홍이포의 치명적 공격]
청군이 망월봉에 설치한 홍이포가 인조의 행궁에 떨어져 박살나는 등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다.
청군은 남문으로도 공격해왔으나 조선군이 이를 격퇴했다.
[남한산성 성벽 붕괴 및 최종 통보]
청군의 맹렬한 포격으로 남한산성의 성벽이 허물어졌다.
청나라 사신들은 인조가 성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더 이상 협상하지 않겠다며 기존 국서들을 돌려주고 가버려 항복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인조의 항복 결정, 강화도 함락 소식]
평안도 근왕군이 김화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내에서는 식량난과 추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강화도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인조는 결국 항복을 결정하고 성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평안감사 홍명구와 평안병마사 유림이 이끈 5천여 명의 조선군은 김화 탑동 전투에서 홍명구가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유림이 백동에서 청군을 격퇴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여서 평양으로 회군했다.
[항복 후 청의 약속 확인]
인조의 항복 결정에 따라, 조선은 청 태종의 약속을 보장받기 위한 국서를 마푸타에게 전달하며 마지막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굴욕적인 항복 준비와 척화파의 좌절]
홍타이지의 칙서가 전달되고, 조선은 그동안 청을 오랑캐라 지칭했던 문서들을 불태우며 굴욕적인 항복 절차를 밟았다.
척화파 김상헌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절망했지만 실패하고 최명길에게 조롱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삼학사의 마지막 인사]
척화파의 핵심 인물인 윤집, 오달제가 청에 끌려가기 전 인조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이들은 항복에 반대하다 처형될 운명이었다.
이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인과 관리, 대신의 자녀 등 총 197명이 청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다.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 종결]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치욕적으로 항복했다.
이로써 병자호란은 58일 만에 막을 내렸고,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며 조선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조선은 청에 신하의 예를 행하고, 명의 연호를 폐지하며 교류를 단절했다. 왕자와 대신 자녀를 인질로 보내고, 청의 명 정벌 시 원군 파견 및 해마다 막대한 세폐를 바치는 등 굴욕적인 항복 조건을 수용했다. 이 전쟁으로 한양은 황폐해지고 수십만 백성이 노예로 끌려가 사회적 피해가 막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