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
조선 시대, 정치 사건, 숙청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6:00
1498
[무오사화]
연산군 즉위 후, 훈구 세력이 사림의 김일손이 쓴 사초(史草)를 문제 삼아 김종직 문인을 대거 숙청한 사건입니다.
사림의 비판적 언론 활동에 대한 왕의 노여움과 훈구 세력의 불만이 결합되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영남 사림 세력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서로 협력하던 훈구파와 사림파의 관계는 달라졌습니다. 연산군은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신하들의 충돌이 있었음을 알고 훈구 대신과 사림 모두를 눌러 왕권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있던 훈구 대신의 잔류 세력인 유자광 등은 김일손이 지은 사초를 문제 삼아 왕을 충동했습니다. 그 결과 김종직, 김일손, 표연말, 정여창, 최부 등 수십 명의 사림이 사형, 유배, 혹은 파직되는 혹독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 사림이 대부분 몰락했습니다.
1504
[갑자사화]
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연산군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훈구 대신들마저 제거하려 했던 사건입니다.
연산군을 감싸던 척신들이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에 훈신들이 관여했음을 폭로하여, 관련된 훈신과 잔존 사림까지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사림을 정계에서 몰아낸 후, 연산군은 훈구 대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연산군을 싸고도는 척신(외척)들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비사사(廢妃賜死) 사건에 윤필상 등 훈신이 관여했음을 폭로했습니다. 이 폭로로 인해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된 훈신들과 아직 남아 있던 사림까지 숙청되었으며, 특히 가족과 제자들까지 처벌받는 등 잔혹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1519
[기묘사화]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이 다시 등용한 조광조 일파의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훈구 대신들이 반발하여 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입니다.
특히 공신들의 위훈 삭제 주장이 훈구 세력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훈구 대신들은 중종반정(1506년)을 일으켜 연산군을 추방하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백성과 사림의 여망 속에 왕이 된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고 유교정치를 일으키려 했습니다. 특히 1515년 젊고 깨끗한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그를 추종하는 젊고 기개 있는 사림(기호사림)이 현량과라는 추천 제도를 통해 대거 등용되었습니다. 조광조 일파는 삼사(三司)의 언관직에 포진하여 경연 강화, 언론 활동 활성화, 소격서 폐지, 향약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정책은 지방 중소지주층의 이익을 크게 반영하고 농민의 부담을 완화하는 것이었으나, 중종반정 공신들에게는 불리했습니다. 특히 조광조 일파는 공신에 책봉된 100명 가운데 4분의 3은 부당하다며 그들의 공신 칭호와 토지,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들의 원한을 샀습니다. 중종 또한 처음에는 사림을 신임했으나, 나중에는 지나치게 군주를 압박하는 데 실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1519년(중종 14년) 남곤, 심정 등 훈구 대신들은 조광조 일파에게 반역죄 누명을 씌워 무참하게 죽이거나 유배 보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림의 개혁정치는 4년 만에 끝나고, 그들이 추진했던 정책도 대부분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화를 입은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기준 등은 ‘기묘명현’으로 높은 추앙을 받아 16세기 후반에 사림 시대를 여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1545
[을사사화]
다른 사화들과 달리 외척 간의 권력 다툼(대윤 윤임 vs 소윤 윤원형)으로 발생한 사화입니다.
인종 즉위 후 대윤이 세력을 떨쳤으나, 인종 승하 후 명종 즉위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소윤이 실권을 잡자 전 왕의 외척인 대윤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림 또한 다시 한번 피해를 입었습니다.
기묘사화가 있은 지 10년 뒤, 중종은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했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위 을사사화에 또다시 밀려나는 네 번째 화를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외척(外戚)간의 권력싸움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다릅니다. 중종이 돌아가자, 첫째 계비 소생인 인종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대윤)이 세력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타계하고 둘째 계비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소윤) 일파가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소윤 세력은 집권하자마자 전 왕의 외척인 윤임 일파를 몰아냈습니다. 명종 대에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숭신하여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삼고 선교 양종을 다시 부활하여 오랜만에 불교가 중흥했으나 사림의 비난을 샀습니다. 또한 북방이 어수선하고, 임꺽정 일당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는 등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