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

역사 시대, 전쟁사, 한국사, 통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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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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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하는 혼란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신라의 비장 견훤이 후백제를 죽주의 세력가 양길 휘하에서 성장한 궁예가 후고구려(이후 태봉)를 건국하며 한반도에 새로운 삼국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혼란은 궁예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통합하며 고려의 통일 왕조 시대를 열며 막을 내립니다. 후삼국 시대는 고대 국가가 붕괴하고 새로운 귀족 국가로 재편되는 역사의 전환점이자 중국의 간섭 없이 내부적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 자주적 발전의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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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

[원종·애노의 난 발발]

신라 정부가 재정 위기를 타개하고자 지방에 조세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이중 부담에 시달리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사벌주에서는 원종과 애노가 주도한 봉기가 발생하여 사회 전반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이는 곧 전국 각지 호족들의 세력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농민 반란이 격화되자 진성여왕은 나마 영기에게 진압을 명했으나 실패했고, 촌주 우련만이 힘껏 싸우다 죽었습니다. 진성여왕은 영기를 참수하고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 직을 잇게 하며 간신히 반란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을 여실히 보여주며, 지방 호족들이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891

[양길의 봉기와 궁예의 등장]

신라 말 북원(원주)에서 강력한 도적 우두머리 양길이 봉기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때 죽주의 기훤에게 멸시받았던 궁예가 양길의 수하로 들어가며 그의 잠재력을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양길은 궁예에게 기병을 주어 10여 군현을 습격하게 했고, 이는 궁예 세력의 첫 발판이 되었습니다.

892

[견훤의 반란과 후백제 기틀 마련]

신라의 비장 출신 견훤이 서남부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한남군 개국공'을 칭하며 본격적인 반란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백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 선언하며 옛 백제 지역 백성들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한 달여 만에 5천 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아 후백제 건국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견훤은 무진주(광주)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서라벌 서남쪽 주현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이라는 긴 이름으로 칭하며, 백제 부흥의 염원을 자극하여 민심을 얻었습니다. 이로써 신라의 통제력을 벗어난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후삼국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습니다.

894

[최치원의 신라 개혁 시도]

혼란에 빠진 신라를 구원하고자 당나라에서 귀국한 학자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 개혁안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그의 개혁 시도는 좌절되었고, 결국 관직을 버리고 유랑하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는 천년 왕국 신라의 국운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궁예, 강원도 대부분 장악]

북원 양길의 수하로 있던 궁예가 10월 명주(강릉)를 점령하며 강원도 대부분의 지역을 빠르게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의 세력이 급성장하자 패서 지역(예성강 이북)의 호족들이 스스로 투항하기 시작하며, 궁예는 양길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으로 발돋움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896

[궁예, 왕건 부자와 결속]

궁예가 임진강을 따라 북상하여 송악(개성)의 강력한 호족 왕륭의 투항을 받았습니다.

이는 궁예 세력 확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왕륭의 아들 왕건을 철원군 태수로 임명하며 그의 능력을 일찍이 알아보고 중용했습니다.

왕건 부자의 도움으로 궁예는 경기 북부와 서해안 일대를 손쉽게 장악하며 세력을 더욱 키울 수 있었습니다.

898

[궁예, 송악을 사실상 수도로 삼다]

궁예는 송악(개성)을 자신의 세력의 사실상 수도로 삼고, 그의 핵심 장수 왕건에게 양주와 청주 등 30여 성을 정벌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로써 궁예 세력은 경기 북부와 서해안을 넘어 중부 지방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며, 후에 태봉의 기틀을 공고히 다져나갔습니다.

899

[궁예, 한강 유역 장악]

궁예 세력이 청주 지방을 점령하며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 유역 전역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왕건에게 신라의 최고 관직인 아찬 벼슬을 수여하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습니다.

이는 궁예가 명실상부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왕건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궁예, 양길 세력 완전 흡수]

급성장하는 궁예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양길이 국원 등 10여 성주들과 연합하여 비뇌성에서 궁예군과 격돌했습니다.

그러나 양길의 군대는 처참하게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궁예는 양길이 가지고 있던 모든 세력을 흡수하며 명실상부한 중부 지역의 맹주로 떠올랐습니다.

이로써 궁예의 독립적인 기반이 확고해졌습니다.

900

[견훤, 후백제 공식 건국]

견훤이 완산주(전주)에 이르러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옛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씻겠다는 뜻을 밝히고 백제왕을 칭했습니다.

이때 연호를 '정개'로 정하고 국가 제도와 관직을 정비했으며, 중국 오월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공식적으로 후백제를 건국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 신라, 후백제, 그리고 곧 등장할 후고구려의 삼국 정립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습니다.

[호족들의 궁예 항복 줄이어]

국원, 청주, 괴양 등 주요 지역의 도적 우두머리인 청길과 신훤 등이 성을 바쳐 궁예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는 궁예의 세력이 남부 지방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그가 단순한 도적 무리를 넘어 국가를 세울 만한 강력한 통치자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901

[궁예, 후고구려(태봉) 건국]

후백제가 건국되자, 궁예 역시 신라 효공왕 때 '후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왕조를 세웠습니다.

초기에는 고구려계 호족들의 영향으로 국호를 '고려'라고 정했으나, 이후 '마진',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하며 고구려와의 연결성을 점차 약화시켰습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신라, 후백제, 그리고 궁예의 후고구려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졌습니다.

[견훤, 대야성 공격 실패]

후백제 왕 견훤이 견고한 대야성(합천)을 공격했으나 결국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에 견훤은 군사를 금성(진주) 남쪽으로 돌려 주변 마을을 약탈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전투는 견훤이 신라 영토 확장을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후백제와 신라의 국경 분쟁이 격화되었음을 시사합니다.

903

[왕건, 나주 일대 장악]

궁예의 수군 장수 왕건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금성(현재 나주) 일대의 10여 군현을 후백제로부터 빼앗았습니다.

나주 지역은 후백제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기에, 이 상실은 후백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왕건은 이를 발판으로 바다를 통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며 해상권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904

[궁예, 국호 '마진'으로 변경]

궁예가 도읍 이전을 위해 철원과 부양 일대를 둘러본 후, 국호를 '후고구려'에서 '마진(摩震)'으로 변경하고 연호를 '무태' 원년으로 정했습니다.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약화시키고 강력한 독자 왕권을 확립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동시에 여러 관직을 설치하며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궁예는 국호 변경과 함께 신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관직 체계를 정비하고, 패강도(예성강 이북)의 10여 주현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며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수도 건설과 함께 궁예의 왕권 강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905

[궁예, 철원으로 천도]

궁예가 마침내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이는 송악(개성)에 기반을 둔 패서 호족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미륵 신앙에 기반한 강력한 왕권을 구현하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였습니다.

철원 천도를 통해 궁예는 자신의 이상적인 국가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궁예, 신라 영토 압박]

궁예가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변방 고을을 침략하고 약탈하며 죽령 동북쪽까지 진출했습니다.

신라 조정은 날마다 줄어드는 영토에 크게 걱정했으나, 이미 군사력이 약화되어 직접 막을 수 없었고, 각 성주들에게 성벽을 굳건히 지키라는 명령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신라의 국력이 극도로 쇠퇴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906

[견훤, 왕건에게 첫 패배]

후백제 견훤이 상주 사화진 일대에서 궁예의 장수 왕건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습니다.

이는 왕건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다시 한번 보여준 사건이며, 후백제와 궁예 세력 간의 본격적인 대립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907

[견훤, 나주성 탈환 실패]

906년 왕건에게 패배한 견훤이 전력을 재정비하여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을 빼앗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서해 해상권 회복을 위해 몸소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주성을 열흘간 포위했으나, 궁예의 수군이 나주성을 기습 공격하자 결국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후백제가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911

[궁예, 국호 '태봉'으로 재변경]

궁예는 다시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변경하고 연호를 '수덕만세'로 고쳤습니다.

이는 강력한 미륵 신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왕권을 확립하려는 궁예의 의지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잦은 국호 변경이 호족들의 반발과 내분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917

[박언창, 후사벌 건국]

신라 경명왕의 5남 박언창이 후사벌을 건국했습니다.

이는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서 지방 세력들이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후삼국 시대의 혼란상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918

[왕건, 고려 건국]

궁예의 폭정과 미륵관심법으로 인한 공포정치가 극에 달하자, 왕건을 따르던 장군들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고 태봉을 멸망시켰습니다.

왕건은 새로운 왕조 '고려'를 건국하고 송악(개성)으로 천도하며 연호를 '천수'로 정했습니다.

이로써 후삼국 시대의 판도가 크게 바뀌며, 고려가 통일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궁예는 미륵 신앙을 내세워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으나, 패서 호족 견제와 잦은 국호 변경, 심지어 강비와 자식들까지 죽이는 잔인한 통치로 신하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결국 왕건마저 의심받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핵심 장수들이 왕건을 추대하며 궁예를 몰아냈습니다. 궁예는 도망치다 성난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왕건은 즉위 후 궁예 지지 세력의 반란 시도를 잘 무마하고 후백제와의 삼한일통 경쟁에 돌입했습니다.

926

[발해 태자 대광현, 고려로 귀순]

거란의 침략으로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의 태자 대광현이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순했습니다.

고려는 이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고히 하고 북방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가 단순한 후삼국 통일을 넘어 북방의 발해 유민까지 포용하는 명실상부한 민족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28

[견훤, 신라 경주 함락 및 경애왕 시해]

후백제 견훤이 직접 신라의 수도 경주를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신라 경애왕을 살해했습니다.

이는 천년 고도 신라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자 후백제의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견훤은 신라에 새 왕을 세우고 약탈을 자행하며 신라의 마지막 숨통을 끊으려 했습니다.

929

[견훤, 후사벌 멸망시키다]

후백제 견훤이 신라 경명왕의 5남 박언창이 건국했던 후사벌을 공격하여 멸망시켰습니다.

이는 견훤이 후삼국 통일의 야심을 갖고 신라 내부의 독립 세력까지 정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930

[고려-후백제, 고창 전투에서 격돌]

고려와 후백제가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고창(현 안동)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신라 경애왕 시해 사건으로 격분한 고려 태조 왕건이 전쟁을 일으켰고, 이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이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며 전세가 고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934

[홍성 전투, 후백제에 치명타]

홍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후백제는 8천 명의 군사를 잃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 전투는 후백제의 국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며, 기울어져 가던 후백제의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935

[견훤, 금강을 후계자로 지명]

후백제 견훤이 막내아들 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장남 신검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결국 후백제 내부의 왕위 계승 분쟁이 극심해지는 원인이 되어 견훤 자신이 폐위되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신라 경순왕, 고려에 항복]

오랜 혼란 속에서 명맥만 유지하던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습니다.

이는 천년 신라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자, 고려가 후삼국 통일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건은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며 신라 지배층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936

[견훤, 고려에 귀순]

아들 신검에게 폐위되어 금산사에 유폐된 후백제의 창업자 견훤이 극심한 분노 속에 자신을 내친 아들에 맞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고려는 견훤을 극진히 대우하며 '상보(上父)'로 예우했고, 이는 후삼국 통일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고려, 후백제 멸망시키고 후삼국 통일 완성]

고려 태조 왕건은 귀순한 견훤을 앞세워 10만 대군을 이끌고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 황산 전투에 나섰습니다.

일리천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황산까지 진격하여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후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40여 년간 이어진 후삼국의 혼란이 종식되고,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는 역사적인 대업을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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