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고대 국가, 한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4:27:07
한반도 최초의 고대 국가로서 단군왕검이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고조선은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를 아우르며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8조법과 같은 독자적인 사회 시스템을 갖췄으나 한나라와의 격렬한 대립 끝에 멸망하며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장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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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왕검, 한반도 최초 국가 '고조선' 건국]
한반도 최초의 고대 국가 고조선이 단군왕검에 의해 건국되었습니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 등 여러 고문헌에서 이 시기를 요임금 때로 기록하고 있으며, 현대 국사 교과서에서는 기원전 2333년을 건국 시점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으나, 일연 스스로도 시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동국통감》과 《제왕운기》는 요임금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합니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실제 건국 연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으나, 교육부는 단군왕검의 건국을 역사적 사실로 보고 있습니다. 단군신화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이해되며, 이는 고조선 통치 세력의 정당화를 위한 시조 설화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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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연나라와 대등한 강력한 고대 국가로 발돋움]
고조선이 중국 연나라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을 정도로 강력한 고대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전국책》에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되며, 이 시기 비파형 동검 문화를 공유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통합되어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확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최소 기원전 4세기 이전부터 중원에 알려진 고조선은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와 인접하며 세력을 키웠습니다. 이 시기 고조선 군주는 '왕'을 칭하며 중국의 국가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고조선 군주, '왕' 칭호 사용 시작]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며 독립된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는 당시 중국의 혼란 속에서 고조선이 동방의 강력한 국가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던 전국시대였습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고조선 역시 자주적인 외교와 통치를 통해 국력을 신장시켰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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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진개 침입으로 요동 영토 상실]
연나라 장수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은 2,000여 리의 광대한 영토를 빼앗기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이 패배로 고조선은 핵심 지역이었던 요동 지방을 상실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게 되었습니다.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가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이 설치되고 장성도 쌓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고조선이 연나라에 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보여주며, 국가의 존립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 서북부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나라 통일 후 고조선의 표면적 복속]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은 진나라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표면적으로 복속을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진나라에 조회하는 것을 거부하며 자주성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기 고조선은 강력한 통일 제국인 진나라의 압력에 직면하면서도, 실질적인 내정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고조선이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려 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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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혼란으로 대규모 유민 고조선 이주]
진나라의 내란과 뒤이은 초한전쟁으로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수많은 중국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대거 이주해 왔습니다.
이 유민들은 고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한편, 정치적 변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특히 위만과 같은 유력한 유민 집단의 등장은 고조선의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조선은 이들을 수용하며 국력을 증진시키고자 했으나, 이는 또 다른 내분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위만, 고조선 망명 후 준왕의 신임 얻다]
중국 연나라 지역의 혼란을 틈타 위만이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했습니다.
당시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 직책을 부여하고 서쪽 1백 리 땅을 다스리게 하며 변방 수비 임무까지 맡겼습니다.
위만은 고조선 복색을 하고 상투를 틀어 고조선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준왕의 이러한 파격적인 신임은 훗날 고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위만, 쿠데타로 왕위 찬탈하여 '위만조선' 개창]
위만이 중국 군대가 침입한다는 허위 구실로 수도 왕검성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로써 고조선은 위만조선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위만은 국호와 국체를 그대로 유지하며 토착 세력과 유이민 집단을 통합하려 노력했습니다.
위만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의 국호와 국체를 유지했기에 그의 출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위만은 중국의 철기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주변 진번, 임둔 등의 세력을 복속시키며 국가를 발전시켰습니다.
[우거왕, 중계무역 독점 정책으로 한나라와 갈등 고조]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남쪽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아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며 고조선의 국력을 더욱 키웠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한나라와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결국 예군 남려 세력이 한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우거왕의 강력한 대외 정책은 고조선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했지만, 한편으로는 한나라의 동방 진출 야심과 충돌하며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고조선 멸망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한무제, 고조선에 대규모 병력 파견하여 침공]
한나라 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 등에게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이 공격은 초기에는 실패했으나, 한나라의 본격적인 동방 진출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맹공에 맞서 결사항전하며 수도 왕검성을 굳건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의 분열과 이탈이 가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고조선 멸망, 수도 왕검성 함락과 한사군 설치]
한나라와의 전쟁이 장기화되고 지배층의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결국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한반도 최초의 고대 국가 고조선은 멸망했습니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옛 영역에 낙랑군 등 한사군을 설치하며 직접적인 지배를 시도했습니다.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까지 투항했음에도 대신 성기가 끝까지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고조선 멸망 이후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한사군은 이후 수세기 동안 한반도와 중국의 중계 무역 기지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