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고대 국가, 예맥족 국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54
고대 예맥족이 세운 부여는 기원전 4세기부터 약 800년간 만주 벌판을 호령한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넓은 평야를 기반으로 농경 생활을 영위하며 궁궐과 감옥 등 진보된 제도를 갖췄습니다. 마가 우가 등 동물 이름으로 관직을 삼은 독특한 사출도 체제는 왕권을 견제하며 초기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죠. 강성한 국력으로 이웃 부족을 복속시키고 중원 국가들과 교류했지만 선비족과 고구려의 압박 속에서 서서히 쇠퇴하다 494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백제 등 후대 한민족 국가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그 유산을 남겼습니다.
BC 4C
[동명왕, 부여 건국]
고리국 동명왕이 만주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예맥족 국가 부여를 건국했습니다. 이 나라는 고구려와 백제 등 여러 한민족 국가의 뿌리가 되었으며, 초기부터 진보된 농경사회와 계급 제도를 갖추었습니다.
부여는 고리국 출신의 동명왕이 엄호수를 건너와 건국한 예맥족 국가입니다.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랴오닝성 남부부터 아무르강 북부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은 일찍부터 농경생활을 하였고, 궁궐, 성책,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습니다. 신분계급은 왕과 4가(마가, 우가, 저가, 구가), 그리고 하호로 나뉘었습니다. 부여의 건국 설화는 이후 고구려 동명성왕의 건국 설화로 차용되었습니다.
BC 3C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며 한나라가 흥한 이후 부여에 신하로서 복속했습니다. 여기서 한은 전한(기원전 206년~기원후 8년)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부여가 전한 시대부터 동쪽의 읍루를 복속시킬 정도로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C 1C
[해모수, 북부여 건국 (삼국유사 기록)]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했으며, 해부루가 그의 아들이라 전해지지만, 실존 인물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삼국유사》에는 해모수가 기원전 59년에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해부루가 그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는 해모수가 등장하지 않아 실존 인물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 기록은 북부여의 시초에 대한 하나의 전승으로 이해됩니다.
동부여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유화부인을 얻어 주몽을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기원전 37년경 주몽은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으며, 이는 부여 계열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고구려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22
[대소왕 전사 및 고구려 투항]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으로 부여 대소왕이 전사하고,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습니다.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부여를 침공하여 대소왕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대소왕의 종제(사촌동생)는 부여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습니다.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에게 락씨 성을 내리고 부여왕으로 책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에 거주하게 했습니다.
[갈사왕, 갈사부여 건국]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으로 대소왕이 전사하자, 대소왕의 막내동생 갈사왕이 갈사수 가에 피난하여 갈사부여를 건국했습니다.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으로 부여의 대소왕이 전사하자,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었던 갈사왕은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갈사수 가에 피난하여 갈사부여를 건국했습니다. 이 나라는 서기 68년 고구려에 흡수됩니다.
49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원에 있는 국가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는 부여가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국력을 강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68
22년에 건국되었던 갈사부여는 68년, 갈사왕의 손자인 도두왕이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우태라는 벼슬을 받음으로써 멸망하고 고구려에 흡수 병합되었습니다.
120
120년, 부여왕의 태자인 위구태가 후한에 사신으로 찾아가 후한 안제로부터 인수(관직 임명에 쓰는 인장)와 금태(비단)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는 부여와 후한 간의 활발한 외교 관계를 보여줍니다.
121
121년, 고구려가 후한과 충돌할 때, 부여 왕자 위구태는 현도성을 침공한 고구려 군사를 공격하여 현도성을 구원했습니다. 이는 부여가 후한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고구려와는 적대적인 관계였음을 보여줍니다.
167
[부태왕의 현도군 공격과 패배]
부여의 부태왕이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후한의 현도군을 공격했으나, 현도태수 공손역에게 패배하여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167년, 부여왕 부태는 후한 본토와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현도성과의 무역 마찰이 생기자, 선비족과 고구려의 묵인 하에 2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한의 현도군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현도태수 공손역에 의해 격퇴되었고, 부태왕은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배했습니다.
175
2세기 후반, 한나라의 군벌 공손탁은 부여의 왕 위구태에게 자신의 종녀(조카딸)를 시집보내 혼인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는 부여가 주변 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285
[모용외의 부여 침공, 의려왕 자살]
선비족 모용외가 부여를 습격하여 의려왕이 자살하고 수도가 파괴되었으며, 1만 명의 백성이 끌려가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285년, 선비족 모용외는 부여를 공격했습니다. 이 침공으로 부여의 의려왕은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살했으며, 왕의 자제들은 옥저로 피신했습니다. 부여의 도성은 파괴되었고, 1만 명의 백성들이 선비족에게 끌려가는 등 부여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부여 국력 약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86
[의라왕, 서진의 도움으로 부여 회복]
의려왕의 뒤를 이은 의라왕이 서진의 도움을 받아 선비족 모용외의 군사를 격퇴하고 부여를 재탈환했습니다.
286년, 의려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부여 의라왕은 서진의 동이교위 하감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하감은 독우 가침을 파견하여 의라왕을 돕게 했고, 가침은 모용외가 보낸 손정을 죽이며 승리했습니다. 이에 선비족 군사는 물러갔고, 의라왕은 부여를 재탈환했습니다. 이때 일부 유민이 북옥저 지역에 남아 동부여를 형성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346
[모용황의 부여 침공, 현왕 포로]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모용황이 부여를 공격하여 현왕을 포로로 잡고 5만 명의 백성을 끌고 갔습니다. 이로 인해 부여는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346년, 부여의 현왕은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연의 왕 모용황은 세자 모용준과 4남 모용각을 시켜 부여를 공격하고, 현왕과 부여의 백성 5만 명을 전연으로 끌고 가 사실상 부여를 멸망시켰습니다. 모용황은 현왕을 사위로 삼고 진동장군에 임명하며 부여 유민들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410
4세기 전반, 고구려가 북부여를 장악하면서 본국과 차단된 동부여는 자립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410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공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이는 부여 계열 국가들의 쇠퇴와 고구려의 강력한 성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410년경, 부여의 유민들이 눈강(나하)을 건너가 두막루(대막루, 달말루라고도 함)를 건국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북부여의 후계를 자처하며 약 300년간 존재하다가 726년 발해 무왕에게 멸망했습니다.
494
[부여 멸망, 고구려에 최종 병합]
물길의 압박을 받던 북부여의 잔왕과 왕실이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항복하며, 부여는 완전히 고구려에 병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494년, 물길이 북부여를 압박하자 부여의 잔왕과 그 처자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 문자명왕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동명왕이 건국한 고대 국가 부여는 완전히 고구려에 병합되며 그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726
서기 410년경 건국되어 약 300년간 존재했던 두막루는 726년 발해 무왕에게 멸망했습니다. 두막루의 영토는 발해와 흑수말갈로 양분되었다가 결국 발해로 흡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