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타 제국

제국, 연맹, 옛 국가,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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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인도 아대륙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강력한 힌두 국가. - 1674년 시바지 보살레에 의해 건국되어 무굴 제국의 통치 종식에 큰 영향. - 페슈와 중심의 효율적인 행정 및 군사 체제로 최전성기에는 인도 아대륙의 절반을 장악. -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영토 확장을 지속했으나 1818년 영국 동인도 회사에 의해 멸망.

연관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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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3

[시바지의 푸나 지역 점령]

마라타의 지도자 시바지 보살레가 푸나 지역 근처를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664

[시바지의 수라트 점령]

시바지 보살레가 무굴 제국의 중요한 항구 도시 수라트를 차지하며 마라타의 힘을 키웠습니다.

1674

[마라타 제국 건국 및 시바지 1세 즉위]

탁월한 지도자 시바지 보살레가 라이가드를 수도로 삼아 마라타 제국을 공식적으로 건국하고, '차트라파티'(황제)로 즉위했습니다.

마라타인들은 '힌다비 스와라지야'(인도에서 외세를 몰아내자)를 주장하며 세력을 불렸습니다.

당시 마라타 제국은 인도 대륙의 4.1%를 차지했으나 빠르게 확장하여 시바지 사망 즈음에는 300여 개의 요새와 9만 명에 달하는 기병 및 보병을 거느린 상당한 크기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1680

[시바지 1세 사망]

마라타 제국의 창건자 시바지 보살레가 사망했습니다.

1681

[삼바지 1세 즉위 및 무굴 제국과의 전쟁 시작]

시바지 사망 후, 그의 이복형제 삼바지 보살레 1세가 제위에 올라 확장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우랑제브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황제의 아들 악바르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에 아우랑제브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남진하여 삼바지와 8년간 맞섰습니다.

1689

[라자람 1세 즉위]

삼바지 보살레 사망 후 그의 이복형제 라자람 보살레가 왕위를 승계했습니다.

즉위 직후 무굴 제국이 수도 라이가드를 맹공하자 결국 피난했습니다.

[삼바지 1세 생포]

삼바지 보살레가 군사 회의 중 무굴 제국 군대의 급습을 받아 몇 명의 호위군만 데리고 있다가 생포되었습니다.

[삼바지 1세 처형]

생포된 삼바지 보살레가 반역죄로 무굴 제국에 의해 처형당했습니다.

1700

[라자람 1세 사망 및 타라바이 섭정 시작]

라자람 보살레가 신하가드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 타라바이가 아들 시바지 2세의 이름을 빌어 대신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1707

[무굴 제국 아우랑제브 황제 사망 및 샤후 1세 석방]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 황제가 서거했습니다.

이로 인해 삼바지 보살레의 아들 샤후 보살레 1세가 무굴의 새 황제 바하두르 샤 1세로부터 풀려났고, 고국으로 귀환하여 황위를 요구하며 타라바이와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샤후 보살레는 발라즈 비슈와나트와 다나즈 자드하브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발라즈 비슈와나트와 그의 후손들을 페슈와(대재상)로 임명하여 대대손손 이어가도록 했습니다. 이후 발라즈와 그의 후손들은 마라타 제국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1713

[발라지 비슈와나트 페슈와 임명]

샤후 보살레 1세가 즉위에 공로가 컸던 발라지 비슈와나트에게 페슈와(대재상)직을 내렸습니다.

이 시기부터 페슈와는 황제 다음가는 최고위직이 되었습니다.

발라지 비슈와나트는 1714년 서부 해안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던 해적 칸호지 앙그리아와 로나발라 협약을 맺어 해안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칸호지 앙그리아는 샤후 1세를 황제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1719

[마라타 제국의 델리 진군 및 무굴 제국의 봉신국화]

발라지 비슈와나트가 이끄는 마라타 제국이 무굴 제국의 수도인 델리로 진군하여 황제를 쫓아내고 꼭두각시를 세워 자신들의 마음대로 했습니다.

이 시점부터 무굴 제국은 과거의 영광을 잃고 마라타 제국의 봉신국으로 전락했습니다.

1720

[바지라오 1세 페슈와 취임 및 영토 확장]

발라지 비슈와나트 사망 후, 샤후 1세는 바지라오 1세를 새로운 페슈와로 임명했습니다.

바지라오 1세는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현대 인도의 3%에서 30%로 확장하며, 41번이 넘는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군사 업적을 세웠습니다.

1728

[팔케드 전투 승리]

바지라오 1세가 이끈 마라타 제국이 팔케드 전투에서 아사프 자흐 1세를 꺾고 하이데바라드의 니잠을 무릎 꿇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1737

[델리 인근 약탈 및 말와 지역 할양]

바지라오 1세가 델리 전투를 벌여 무굴의 수도 델리 인근을 약탈했습니다.

무굴 제국의 봉신들이 구원을 위해 출정했으나 보팔 전투에서 패배했고, 마라타 제국은 무굴 제국에게 막대한 조공과 함께 말와 지역을 할양받았습니다.

1740

[바지라오 1세 사망 및 발라지 바지라오 페슈와 취임]

바지라오 1세가 사망했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 발라지 바지라오가 황제의 승인을 얻어 페슈와가 되었고, 수많은 군사 원정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켰습니다.

1741

[티루치라팔리 전투 승리]

본슬레 가문의 라구지 본슬레가 지휘하는 마라타군이 티루치라팔리 전투에서 카르나타카 나와브를 제압하며 남부와 동부로 세력 확장을 계속했습니다.

[벵골 지역 침공 및 잔혹 통치]

라구지 본슬레가 이끄는 마라타군이 벵골 나와브의 영토를 여러 차례 침공하여 오디샤를 점령·합병하고 벵골을 봉신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라타는 풍요로웠던 벵골 지역에서 포악한 공포 정치를 펼쳤습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강요하고 내지 못하거나 미납한 자는 죽이는 등 잔혹한 통치가 이어졌습니다. 네덜란드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최소 40만 명의 벵골인들이 마라타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1752

[무굴 제국 보호 조약 체결]

마라타 제국과 무굴 제국의 권력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면서, 마라타는 두라니 왕조의 위협을 받는 무굴 제국과 수도 델리를 보호한다는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757

[두라니의 북인도 침공 및 마라타의 델리 재점령]

두라니 제국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북인도를 침공하여 무굴의 수도 델리를 점령했습니다.

이에 마라타는 웃드의 나바브를 공격해 물리치고 마침내 델리 및 근교를 점령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1750년대 후반 마라타는 인도 북서부 펀자브와 카슈미르를 공격해 점령하며 인도 아대륙의 절반가량을 지배하는 최전성기를 맞았습니다.

1758

[페샤와르 점령]

마라타 제국군이 아톡 전투에서 승리한 후, 페샤와르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페샤와르를 손에 넣었습니다.

1759

[델리 붉은 요새 약탈]

제3차 파니파트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 마라타 제국군이 무굴 제국의 수도 델리에 있는 붉은 요새를 약탈했습니다.

1760

[마라타의 델리 재탈환]

사다시브라우 바우 지휘 하의 마라타 제국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여 두라니로부터 델리를 다시 되찾았습니다.

델리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보급품 부족으로 마라타 군대에 의해 또다시 약탈되었습니다.

1761

[제3차 파니파트 전투 대패]

전열을 가다듬은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왕조와의 제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 제국이 대패했습니다.

이 패배로 마라타는 수틀레지 강 이북 펀자브 지역의 종주권을 두라니에 넘기고 북인도 확장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마라타가 같은 힌두교 국가들에게까지 혹독하게 대우하여 이 전투에서 지원을 받지 못했던 반면, 이슬람 세력은 두라니 왕조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던 것이 패배의 큰 원인이었습니다.

1772

[마다브라오 1세 사망 및 마라타 쇠퇴 시작]

중흥기를 이끌었던 4번째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마라타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다브라오 1세는 분열된 마라타를 다시 묶고, 남부와 북부 국경을 안정시키는 등 개혁 정책을 펼쳐 마라타 제국의 권위를 다시 확고히 했습니다.

1773

[나라얀라오 암살 및 라구나트라오의 페슈와직 강탈]

페슈와 마다브라오 1세 사망 후 페슈와가 된 나라얀라오가 라구나트라오에 의해 암살당했고, 라구나트라오가 페슈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1774

[마다브라오 2세 옹립 및 마라타 연맹 전환]

부정한 방법으로 페슈와가 된 라구나트라오에 대한 반발로 그는 1년 만에 쫓겨났고, 나라얀라오의 젖먹이 아들 마다브라오 2세가 명목상의 페슈와로 옹립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마라타 제국은 지방분권적인 연맹체로 변모했습니다.

권력에서 밀려난 라구나트라오 일파가 봄베이에 있던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775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 승리]

권력 투쟁에 개입하려던 영국 동인도 회사와 마라타 연맹 사이에 제1차 영국-마라타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마라타는 출중한 장군 마하다지 신데의 지휘 아래 영국에 맞서 승리했고, 살바이 평화조약을 통해 영토를 반환받았습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개입하고 영국은 제2차 영국-마이소르 전쟁과 맞물려 힘겨운 상황이었으며, 결국 영국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는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1777

[사운시 전투 패배]

마이소르 술탄국의 하이데르 알리가 마라타가 점령한 지역으로 공격해 들어와 발생한 사운시 전투에서 마라타는 지휘관을 잃는 등 패배했습니다.

1785

[마라타-마이소르 전쟁 시작]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마이소르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맺고 경계를 강화하자, 마이소르의 티푸 술탄이 마라타를 침공하며 본격적인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787

[랄소트 전투 패배 및 마하다지 신데 실각]

마하다지 신데가 라지푸트족의 암베르-마르와르 연합군에 랄소트 전투에서 패배하며 무굴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했습니다.

[가젠드라가드 조약 체결]

2년간 지속된 마라타-마이소르 전쟁이 티푸 술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가젠드라가드 조약 체결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마이소르는 마라타에 약간의 공물을 바치고 선대 하이데르 알리가 빼앗은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이었습니다.

1788

[마하다지 신데의 델리 재탈환 및 샤 알람 2세 복위]

무굴 제국의 독립파 장군 이스마일 벡과 로힐라족의 굴람 카디르가 델리를 점령하고 무굴 황제를 폐위시킨 사건에 마하다지 신데가 개입하여 이스마일 벡과 로힐라족을 분쇄하고 델리를 재점령, 샤 알람 2세를 복위시켰습니다.

1790

[마하다지 신데의 무굴 궁정 영향력 회복]

마하다지 신데는 샤 알람 2세에게 페슈와 마다브라오 2세를 무굴 황제의 대리인으로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다시 무굴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했습니다.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 동맹 및 영토 획득]

마라타가 제3차 영국-마이소르 전쟁에서 영국 동인도회사, 하이데라바드 니잠 정권과 동맹하여 마이소르를 협공해 일부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마이소르는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동인도회사의 세력만 강성해져 결과적으로 마라타에 실책이 되었습니다.

1795

[카르다 전투 승리 및 하이데라바드 영토 획득]

마라타가 하이데라바드와 전쟁하여 카르다 전투에서 대규모 회전을 승리하고 하이데라바드의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하이데라바드가 친영 정책을 고수했기에 이 사건으로 영국과 마라타의 관계가 다시 멀어졌습니다.

1796

[바지라오 2세 페슈와 취임]

바지라오 2세가 페슈와로 취임했습니다.

1802

[홀카르의 페슈와-신데 연합군 격파]

디왈리 축제 기간 중 홀카르가 페슈와 및 신데 연합군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습니다.

이로 인해 페슈와 바지라오 2세는 당황하여 영국군과 군사 조약을 체결하고 그들의 보호 아래에 들어가게 됩니다.

1803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발발]

페슈와 바지라오 2세가 영국의 보호를 받자, 신데와 본슬레가 영국과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을 벌였습니다.

초기에 아사예 전투와 라스와리 전투 등에서 신데-본슬레 연합군이 영국에 패배하고 결국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했습니다.

전쟁 도중 신데 가문의 세력권이던 델리가 영국에 점령당했고, 무굴 제국은 1803년부터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1804

[홀카르의 영국과의 전쟁 시작]

홀카르 세력의 지도자 야슈완트라오 홀카르가 영국과의 협상 실패 후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그는 7월 무쿤드와라 고개 전투에서 영국군에 승리하고 9월까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

[홀카르군의 델리 포위 실패]

홀카르군이 영국 지배하의 무굴 황제를 보위하기 위해 델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영국군의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패배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전황은 홀카르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805

[바랏푸르 포위전 실패]

영국군이 홀카르를 추격하여 바랏푸르 왕국의 수도 바랏푸르를 포위했으나, 홀카르-바랏푸르 연합군의 뛰어난 수비로 영국군이 패배했습니다.

부담을 느낀 바랏푸르 왕국은 같은 해 4월 영국과 강화 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했습니다.

[시크 왕국의 배반]

홀카르가 시크 왕국으로 가서 란지트 싱을 끌어들이려 했으나, 란지트 싱은 배반하고 영국 측으로 돌아섰습니다.

[라지가트 조약 체결]

홀카르의 선전으로 장기화된 전쟁이 영국에 엄청난 전비 부담을 안기자, 영국이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야슈완트라오 홀카르가 응하여 펀자브의 라지가트에서 라지가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무승부 형태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홀카르는 군사적, 외교적 명예를 얻었으나, 마라타 전체적으로는 패배였고 라자스탄 일대의 라지푸트족에 대한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했습니다. 1806년 초 조약이 개정되어 홀카르 피점령지가 반환되었습니다.

1818

[코레가온 전투 패배]

페슈와 바지라오 2세와 장군 바푸 고칼레가 영국과의 코레가온 전투 등에서 패배했습니다.

[페슈와 바지라오 2세 항복 및 마라타 동맹 소멸]

바푸 고칼레 사망 후 4개월가량 추격전을 벌이던 페슈와 바지라오 2세가 결국 영국에 항복했습니다.

그가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공식적으로 소멸되었고, 대부분의 옛 영토는 영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바지라오 2세는 페슈와 직할령을 몰수당하고 비투르에서 연금 수급자로 생활하게 되었으며, 명목상의 왕이었던 차트라파티 프라타프 싱 세력은 영국 보호 하에 사타라 번왕국이 수립되었습니다.

[바푸 고칼레 사망]

페슈와 바지라오 2세를 지키던 장군 바푸 고칼레가 전투 중 사망했습니다.

1827

[나나 사힙, 바지라오 2세의 양자 됨]

바지라오 2세의 처조카인 나나 사힙이 비투르에 살던 바지라오 2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1851

[바지라오 2세 사망 및 나나 사힙의 상속권 불인정]

바지라오 2세 사망 후, 영국이 입양에 의한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아 나나 사힙은 바지라오 2세의 작위와 연금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1853년 상속 문제 탄원을 위해 잉글랜드로 사절을 보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1857

[나나 사힙의 세포이 항쟁 참여 및 페슈와 선언]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여긴 나나 사힙이 마라타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세포이 항쟁 시기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세포이 반란군과 합세해 칸푸르를 점령하고 자신을 정당한 페슈와로 선언했습니다.

나나 사힙의 선언은 오래가지 못했고, 같은 해 말 영국군이 칸푸르를 재점령한 후 그는 도피했습니다.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만 무성할 뿐입니다. 1858년 6월, 다른 많은 항쟁 지도자들도 나나 사힙을 페슈와로 인정했습니다. 이후 마라타 동맹은 인도 힌두교도의 자부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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