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주크 제국

제국, 술탄국, 중세 국가, 튀르크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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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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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술탄국, 중세 국가, 튀르크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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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년부터 1157년까지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했던 튀르크계 술탄국. 튀르크 인구의 중동 대규모 이주로 현대 튀르키예의 기틀을 마련. 이슬람교의 체계화(마드라사) 신비주의(수피즘) 확산 페르시아 문학·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음. 투그릴 베그에 의해 건국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 1세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 내전과 외부 세력의 침공으로 쇠퇴 1157년 아흐마드 산자르의 죽음과 함께 대제국 막을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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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

[셀주크 부족의 이슬람화와 세력 성장]

셀주크 유목민들이 하자르 제국 붕괴 후 카자흐스탄 잔드로 이동하여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사만 왕조의 용병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이는 훗날 거대한 셀주크 제국의 초석이 됩니다.

10세기 말, 하자르 제국이 붕괴하자 그 휘하에 있던 셀주크 부족은 지금의 카자흐스탄 잔드로 이주합니다. 이 지역에서 이슬람을 처음 접한 셀주크 부족은 당시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사만 왕조의 용병으로 활동하며 점차 힘을 키웠습니다. 사만 왕조 멸망 후에는 카라한 왕조와 가즈나 왕조 사이에서 독립 세력화를 위해 투쟁하기 시작합니다.

1040

[단다나칸 전투 승리, 제국의 기틀 마련]

셀주크 군대가 후라산 지역을 탈환하려는 가즈나 왕국 최후의 원정군을 단다나칸 전투에서 궤멸시킵니다.

이 승리로 셀주크 가문은 비옥한 후라산 전체를 장악하며 제국 건국의 기반을 확고히 합니다.

셀주크의 기동성을 가진 궁기병 군단은 당대 유례없는 규모였습니다.

카라한 왕조에 의해 추방당한 셀주크 가문의 지도자 투그릴과 차그리 형제는 남쪽으로 도피하여 후라산으로 진입합니다. 당시 가즈나 왕국의 핵심 영토이자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지역이었던 후라산에서 이들은 뛰어난 기동성을 활용해 가즈나 군대를 연이어 패퇴시켰습니다. 1040년, 후라산을 되찾으려는 가즈나 왕국의 대규모 원정군이 단다나칸에서 차그리가 이끄는 셀주크 군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고, 후라산 지역 전체가 셀주크 가문의 손에 떨어지며 셀주크 제국의 기틀이 마련됩니다. 셀주크 군대의 궁기병 군단 규모는 당대 이슬람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1055

[투그릴 베그, 바그다드 입성 및 술탄 책봉]

셀주크 제국의 창건자 투그릴 베그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압바스 칼리프로부터 전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책봉됩니다.

이로써 셀주크 제국은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중심에 서게 되며, 투그릴 베그는 '술탄'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단다나칸 전투 이후 투그릴 베그는 정복 활동을 지속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지위인 술탄이 되었습니다. 1055년, 투그릴 베그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압바스조 칼리프에게서 전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정식 책봉되며 셀주크 제국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이는 순니파 셀주크가 시아파 부이조를 대체하며 압바스 칼리프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음을 의미합니다.

1063

[투그릴 베그 사망 및 알프 아르슬란 즉위]

셀주크 제국의 창건자 투그릴 베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 알프 아르슬란이 동부와 서부 영토를 통합하여 술탄으로 즉위합니다.

그의 치세는 셀주크 제국의 전성기로 기록됩니다.

투그릴 베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제국의 동부와 서부는 차그리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알프 아르슬란의 통치 기간은 셀주크 제국의 전성기로 여겨지며, 그는 제국의 영토를 중앙아시아, 시리아, 소아시아로 확장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1067

[니잠 알물크, 바그다드에 마드라사 건립]

재상 니잠 알물크가 바그다드에 최초로 마드라사를 건립합니다.

마드라사는 순니파 교리 전도와 교육에 크게 기여하며 이슬람 성직자(울라마)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1067년, 셀주크 제국의 재상 니잠 알물크는 바그다드에 최초로 마드라사를 건립했습니다. 이 마드라사는 순니파 교리 전도와 교육의 중심이 되었으며, 정통 종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을 통해 시아파 교리에 맞서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11세기 이래 마드라사의 확산은 이슬람 성직자(울라마)의 수를 크게 늘리고 그들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071

[만지케르트 전투 대승, 비잔틴 황제 사로잡다]

알프 아르슬란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를 사로잡는 대승을 거둡니다.

이 전투는 소아시아를 튀르크인들에게 개방하여 현대 튀르키예의 토대가 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제국의 힘을 과시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알프 아르슬란은 대부분의 시간을 원정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를 사로잡는 전무후무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셀주크 제국의 영토를 중앙아시아, 시리아, 소아시아를 포함하게 만들었으며, 튀르크인들의 소아시아 진출을 가속화하여 훗날 튀르키예의 형성 기반을 다졌습니다.

1072

[말리크 샤 1세 즉위, 셀주크 제국 전성기]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 말리크 샤 1세가 술탄으로 즉위합니다.

그의 치세는 니잠 알물크 재상의 강력한 행정력과 함께 셀주크 제국의 최전성기로 불립니다.

제국은 팔레스타인까지 정복하며 영토를 최대로 확장합니다.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 말리크 샤 1세는 1072년에 술탄으로 즉위하여 1092년까지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그의 치세는 니잠 알물크 재상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셀주크 제국의 최전성기로 평가됩니다. 말리크 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왕국을 속국으로 삼으며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습니다. 이 시기 셀주크 제국은 이스파한을 수도로 삼아 정주화된 행정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1092

[말리크 샤 1세 사망 및 제국 내전 발발]

말리크 샤 1세의 사망과 함께 셀주크 제국은 심각한 후계자 내전에 휩싸입니다.

관료와 귀족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말리크 샤의 아들들을 이용해 내분을 조장하며 제국의 힘이 급격히 약해지는 계기가 됩니다.

말리크 샤 1세의 치세 후반부부터 니잠 알물크 재상의 강력한 권력이 술탄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1092년 말리크 샤 1세가 사망하자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관료와 귀족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말리크 샤의 어린 아들들을 앞세워 1092년부터 1104년까지 내전을 벌였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십자군이 셀주크 제국을 공격했지만, 제국은 내부 문제에 집중하느라 십자군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1105

[무함마드 타파르, 술탄으로 즉위]

장기간의 내전 끝에 무함마드 타파르가 셀주크 제국의 통치자로 부상합니다.

그는 서부 지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으나, 십자군 대신 이란의 시아파 이스마일파와의 전쟁에 집중했습니다.

말리크 샤 사후의 혼란스러운 내전 끝에 무함마드 타파르가 1105년에 셀주크 제국의 통치자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군과의 전쟁보다는 이란 내 시아파 니자리 이스마일파(암살단으로 알려진) 세력과의 갈등에 더 집중했습니다. 이들은 내전을 틈타 이란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무함마드는 이들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 시아 이슬람 일파는 셀주크 제국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1118

[아흐마드 산자르, 대술탄으로 즉위]

무함마드 타파르 사망 후, 그의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가 '대술탄'의 지위를 계승합니다.

그는 후라산 메르브에 수도를 두고 문예와 학문의 중심지로 조성하며 셀주크 제국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무함마드 타파르가 사망하자, 대술탄의 지위는 그의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이어졌습니다. 산자르의 영지는 후라산에 있었으며, 그는 메르브를 수도로 삼아 문예와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산자르의 재위 기간은 셀주크 제국의 두 번째 전성기로 여겨집니다.

1141

[카트완 전투 대패, 제국 쇠퇴의 결정타]

중앙아시아에서 서진해 온 카라 키타이와의 카트완 전투에서 산자르가 이끄는 셀주크 군대가 참패합니다.

이 패배는 제국 내부의 균열을 가속화시키고, 화레즘과 튀르크멘 부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130년대 들어 제국 내외에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주에서 서진하던 카라 키타이가 셀주크의 속국인 카라한조를 공격했고, 산자르가 이를 지원했으나 1141년 카트완 전투에서 참패했습니다. 카라 키타이가 중앙아시아에 정착하자, 산자르의 제국 내부에서는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화레즘의 통치자 아트시즈가 카라 키타이와 협력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튀르크멘인들 또한 과중한 세금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1151

[튀르크멘 부족 반란으로 메르브 함락]

산자르의 권위에 불만을 품은 튀르크멘 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산자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메르브를 점령합니다.

이 사건으로 셀주크 제국의 동부 핵심 영토가 사실상 파괴됩니다.

1141년 카트완 전투에서 패배한 후, 튀르크멘인들은 카라 키타이에 의해 쫓겨난 처지였고, 산자르의 관료들이 무거운 세금까지 매기자 크게 불만을 품었습니다. 1151년, 이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산자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 메르브를 점령함으로써 산자르의 제국을 사실상 파괴했습니다.

1157

[아흐마드 산자르 사망, 셀주크 제국 멸망]

튀르크멘 부족에게 포로로 잡혔던 아흐마드 산자르가 풀려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합니다.

그의 죽음으로 동부의 대셀주크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며, 서부의 방계 혈족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튀르크멘 부족에게 3년간 포로로 사로잡혔던 아흐마드 산자르는 1157년에 풀려났지만, 얼마 못 가 사망했습니다. 이후 몇몇 셀주크 왕족들이 후라산을 차지하려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며 대셀주크 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후라산 지역은 권력 공백 지대로 남았다가 훗날 화레즘 제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반면 이란 서부와 이라크의 셀주크 방계 혈족(이라크 셀주크)은 약 반세기 동안 더 유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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