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중국 왕조, 통일 제국, 고대 국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39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동아시아 최초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제국. 법가 사상 기반의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만리장성 등 대규모 토목 공사 진행. 화폐 도량형 서체 등을 통일하여 단일 문화권 기반 마련. 단 15년 존속했으나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진나라 건국
- 제후국으로 승격
- 진 목공, 서융의 패자 등극
- 진 혜문왕 칭왕
- 파촉 점령으로 국력 강화
- 장평 전투 대승, 조나라 예기 꺾음
- 1차 조나라 침공 및 휴전
- 2,3차 조나라 침공, 이목에 대패
- 한나라 남양 태수의 투항
- 한나라 멸망
- 5차 조나라 침공, 왕전과 이목 대치
- 이목 참살 및 조나라 멸망
- 형가의 진왕 암살 시도
- 연나라 수도 계성 점령
- 한왕안 사사 및 위나라 멸망
- 왕전 60만 대군, 초나라 재차 공격
- 초나라 멸망
- 대왕 조나라 잔여세력 및 연나라 멸망
- 전국 통일 및 황제 칭호 사용
- 전국적 화폐, 서체, 도량형 통일
- 전국적 군현제 실시
- 만리장성, 아방궁 등 대규모 토목 공사
- 남방 대규모 정벌 및 한족화 사업
- 법가 사상 통치 이념 및 분서갱유
- 진 시황제 사망
- 진승·오광의 난 발발
- 2세 황제 살해 및 조고 암살, 진왕 자영 즉위
- 진나라 멸망
BC 9C
[진나라 건국]
주 효왕을 시중들던 비자가 공적을 세워 영지를 받아 진나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는 훗날 강력한 통일 제국으로 성장하는 진나라의 시작점이 되었다.
기원전 900년경 주 효왕(孝王)을 시중들던 비자(非子)가 말 생산으로 공적을 올려 영(嬴)이라는 성을 받고 대부가 되어 진(秦) 땅에 영지를 받으면서 진나라가 건국되었다.
BC 8C
[제후국으로 승격]
주나라가 견융에 쫓겨 동천할 때 진 양공이 평왕을 호위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며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이로써 진나라는 중원의 정식 제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기원전 770년 주나라가 견융(犬戎)에 쫓겨 도성을 동쪽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진 양공(襄公)이 주 평왕(周平王)을 호위한 공으로 주의 구지인 기(岐)에 봉해지면서 진은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BC 7C
[수도 옹성 이전]
9대 진후 목공 시대에 수도를 옹성(雍城)으로 옮겨 나라의 중심을 잡았다. 이 수도 이전은 진나라의 내부 정비와 영토 확장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조치였다.
기원전 677년 수도를 옹성(雍城, 현재의 산시성 바오지시 펑샹 현)에 두었다.
[진 목공, 서융의 패자 등극]
진 목공은 백리해 등 타국 인재를 등용하여 서융을 토벌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이웃 진(晋)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이는 진나라가 중원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9대 진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 등 타국 출신자를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서융을 크게 토벌하고 서융의 패자가 되었으며, 주변 소국을 합병하고 영토를 넓혀 이웃 진(晋)에 필적하게 되었다. 진(晋)이 여희의 난을 겪을 때 혜공을 옹립했지만 혜공이 배신하자 한원에서 격파하고, 혜공 사후에는 중이(重耳)를 진공(晋公)으로 즉위시켰다. 중이가 진(晋)의 명군 문공이 된 후 진(晋)이 강국이 되었으나, 문공 사후 진(秦)은 다시 진(晋)을 격파하고 영토를 강탈했다. 이러한 실적으로 목공은 춘추 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BC 4C
[수도 함양으로 이전]
효공은 상앙의 변법 운동 이후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수도를 함양으로 옮겨 천하 경영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함양은 이후 진나라 통일 제국의 심장부가 된다.
진 효공은 기원전 350년 도성을 함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천하 경영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진 혜문왕 칭왕]
상앙의 변법으로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효공의 아들 혜문왕이 왕을 칭하였다. 이는 진나라가 제후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왕국으로 도약했음을 천명하는 사건이었다.
효공의 아들이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기원전 324년에 왕을 칭하니, 이가 진 혜문왕(惠文王)이다.
[파촉 점령으로 국력 강화]
혜문왕은 파촉(巴蜀)을 점령하고 개발하여 생산력을 높였으며, 장강 상류를 차지하여 초(楚)나라를 압박할 수 있는 유리한 입장을 확보했다. 이는 진나라의 영토 확장과 경제력 강화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기원전 316년 혜문왕은 파촉(巴蜀)을 점령하고 이 땅의 개발을 실시하여 한층 더 생산력을 올려 장강(長江)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장강을 따라 진격할 수 있게 되어 초를 압박할 수 있었으며, 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BC 3C
[진-제 동서제 칭호]
동쪽의 제나라와 함께 서쪽의 진나라가 동제와 서제라고 칭하며 양국이 천하의 2강국 시대를 만들었다. 비록 후에 제호가 취소되었으나, 당시 진나라의 강력한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원전 288년 당시 제(齊)를 동제, 진(秦)을 서제라고 칭했다. 제나라가 곧바로 제호를 취소했으므로, 진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시기는 서쪽의 진나라, 동쪽의 제나라 2강국 시대를 만들고 있었다.
[장평 전투 대승, 조나라 예기 꺾음]
백기 장군이 조나라 장평 전투에서 조군을 격파하고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완전히 꺾었다. 이 전투는 전국시대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낳았으며, 조나라의 국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기원전 260년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 조의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린다.
[주나라 멸망 및 영지 접수]
진나라가 주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접수함으로써 진나라의 위세가 더욱 높아졌다. 이는 고대 중국의 상징적 권위였던 주나라의 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렸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기원전 255년 주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진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1차 조나라 침공 및 휴전]
이사의 계략으로 조-연 전쟁을 유도한 후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공하여 9개 성읍을 점령했으나, 여불위 사건과 초나라 공격 여론으로 인해 휴전했다. 이는 진나라의 육국 통일 전략의 초기 단계였다.
기원전 236년, 진나라는 조나라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전에 이사의 계략을 써, 간첩으로 하여금 조나라와 연나라의 관계를 이간질하여 양국이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이 계책이 먹혀들어 조나라는 연나라와 전쟁을 일으켰고 진나라가 침공할 당시 조나라의 주력군은 연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조나라가 연나라와 전쟁을 일으키자 연나라를 돕는다는 구실로 진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남과 북 양로의 길을 빌려 조나라로 진격시켰다. 진나라의 군대는 주력군이 빠진 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며 9개의 성읍을 점령하고 조나라의 영내를 파죽지세로 장악해 가며 남로군과 북로군으로 하여금 남북에서 한단을 협공해 일거에 조나라를 멸망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불위 문제와 위나라와 협력하여 초나라를 공격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져 결국 진나라는 공격목표를 조나라에서 초나라로 전환하고 1년간의 휴전기간을 갖게 되었다.
[2,3차 조나라 침공, 이목에 대패]
번오기가 이끄는 진군이 조나라 남부를 공격하여 10만 조군을 대파하고 호첩을 참살했으나, 이목 장군에게 비하 전투에서 전멸하여 번오기는 연나라로 도주했다. 이는 이목의 뛰어난 전략이 빛났던 사건이다.
진왕 정 13년, 기원전 234년 (조왕 천(遷) 2년) 진나라는 번오기를 대장으로 하여 10만의 진군을 동원하여 조나라 남부로부터의 공격을 개시했다. 번오기가 이끄는 진나라군은 조나라군의 방어망을 피해 장하(漳河)의 하류를 우회하여 한단의 남동쪽 평양(平阳), 무성(武城)을 공격한다. 조나라에서는 대장 호첩이 대군을 이끌고 두 성을 구원하러 간다. 6월 번오기가 이끄는 진군은 대장 호첩이 이끄는 조나라군과 회전을 벌여 조나라군을 대파해 10만 조나라군의 목을 베고 호첩을 참살한다. 평양과 무성은 진나라군에 점령당한다. 진왕 정 14년, 기원전 233년 (조왕 천(遷) 3년) 번오기는 상당에서 출발하여 태행산을 넘어 조나라 중부로부터의 진군을 개시했다. 번오기는 조군의 주력을 격파하고 적려(赤麗)와 의안(宜安)을 공격하여 점령한 다음 한단의 배후로 진격한다. 이목은 조왕의 명령을 받아 북방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영격하도록 명했다. 이목은 의안에 도착하여 보루를 높게 쌓고 진군을 막아내며 싸움에 응해주지 않는다. 번오기는 비하(肥下) 땅을 맹공하며 조나라군의 구원군을 유도하고 조나라군의 영채를 급습하려고 했지만, 이목은 위위구조(圍魏救趙) 전략을 써 조나라군을 3로로 나누어 진나라의 진지를 기습공격하여 점령했다. 비하를 공략 중이던 번오기는 본채가 함락당하고 보급이 끊겼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되돌렸으나, 이목이 매복하여 되돌아오는 진나라군을 정면에서 막고 양쪽에서 공격하여 진나라군을 대패시키고 10만 명을 섬멸했다. 번오기는 연나라로 도주했다.
[4차 조나라 침공, 이목의 방어 성공]
진나라가 대군을 양대(南北)로 나누어 조나라를 협공했으나, 이목 장군이 남수북공(南守北攻) 전략으로 북로군과 남로군을 모두 격퇴하여 진나라의 침공을 막아냈다. 이로 인해 진나라는 대규모 손실을 입고 물러섰다.
진왕 정 15년, 기원전 232년 (조왕 천(遷) 4년) 진나라는 다시 대군을 일으켜 군사를 양대로 나누어 남북에서 한단을 협공하고자 했다. 태원에서 출발한 북로군은 낭맹(狼孟)을 점령한 다음 번오(番吾)를 공격했다. 조왕 천(遷)은 이목을 대장으로 삼아 북로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번오에서 격퇴하고 남하하여 남로군과 조우, 퇴각하게 하여 진나라의 4차 조나라 침공전이 끝나게 된다.
[한나라 남양 태수의 투항]
한나라 남양의 가수(假守)였던 등(騰)이 남양 땅을 통째로 진나라에 투항하여, 진나라는 한나라 멸망을 위한 전진 기지를 확보했다. 이는 육국 내부 붕괴 전략의 성공적인 첫걸음이었다.
진왕 정 16년, 기원전 231년 한나라 남양태수 등이 남양땅을 통째로 들어다 진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한다. 진나라는 남양을 접수한 뒤 등을 태수로 명하고 실제로는 이곳을 전진 기지로 삼아 언제든 한나라를 공격해 멸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한나라 멸망]
내사(内史)로 임명된 등(騰)이 10만 진군을 이끌고 한나라 수도 신정을 기습 공격하여 한왕 안(韓王安)이 항복, 한나라가 멸망했다. 진나라는 혈투 없이 한나라를 병합하며 통일 전쟁의 첫 승리를 거두었다.
진왕 정 17년, 기원전 230년 내사(内史)로 임명된 등이 진시황의 명을 받아 10만의 진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는 척하다 기습적으로 남하해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신정을 공격했다. 한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한왕 안(韓王安)은 진나라에 항복하여 한나라는 멸망했다.
[5차 조나라 침공, 왕전과 이목 대치]
진나라가 30만 대군으로 조나라를 3로로 침공, 왕전의 주력군과 이목의 조군이 장기간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이목은 뛰어난 방어 전략으로 진나라의 공세를 막아냈으나, 이는 양국 모두에게 막대한 소모를 강요했다.
진왕 정 18년, 기원전 229년 (조왕 천(遷) 7년) 진시황의 명령하에 진나라는 30만에 이르는 대군을 소집해 3로 방향으로 한단을 향해 진군시킨다. 왕전이 이끄는 주력군이 조나라 중부를 공격해 들어가고, 양단화와 강외가 이끄는 군이 한단을 포위한다. 이목이 10만이 넘는 조나라 주력군을 이끌고 왕전의 20만 진나라군과 대치하여 양군은 교착상태로 들어갔다.
[이목 참살 및 조나라 멸망]
진나라의 반간계에 넘어간 조왕 천이 이목을 참살하고 사마상마저 파면하자, 왕전의 진군이 조나라군을 대파하고 한단성을 함락, 조나라가 멸망했다. 이는 진나라의 지략과 이간책이 빛을 발한 승리였다.
진나라의 반간계에 의해 재상 곽개와 태후의 모함으로 이목이 파면되고 결국 비밀리에 참살되었다. 장군 사마상마저 파면당하며 조나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진왕 정 19년, 기원전 228년 (조왕 천(遷) 8년) 봄, 왕전의 지휘하에 진나라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조나라군을 대파한다. 조나라군은 대파당해 대장 조총은 참살되었고 장군 안취는 패잔병을 이끌고 한단성으로 달아나 서둘러 방어에 나섰지만 진나라 군대는 빠르게 조나라 영토를 점령하고 진군하여 한단성에 도착했다. 조왕 천은 항복을 결정하고 조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형가의 진왕 암살 시도]
연나라 태자 단의 지시로 형가(荊軻)가 진왕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진왕 정에게 큰 분노를 안겼고, 연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공격을 촉발시켰다.
진왕 정(政) 20년(연왕희(燕喜) 28년), 기원전 227년 연왕희와 군신들이 진나라의 위용에 놀라 전전긍긍하자, 태자단(太子丹)은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의 모략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연나라 수도 계성 점령]
형가 암살미수 사건에 분노한 진왕 정이 왕전과 신승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수도 계성(薊城)을 점령했다. 연왕희와 태자단은 동쪽으로 도주하며 연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가 되었다.
진왕 정(政) 21년(연왕희(燕喜) 29년), 기원전 226년 형가에 의한 진왕 암살미수 사건 이후, 분노한 진왕 정은 즉시 대군을 일으켜 왕전(王翦)과 신승(辛勝)에게 연나라를 공격케한다. 연나라는 대왕 가가 이끄는 조나라의 잔여 세력과 연합하여 진나라군에 저항하지만 진나라군은 역수(易水)의 서쪽에서 이를 물리친다. 진왕 정(政) 21년(연왕희(燕喜) 29년), 기원전 226년 진왕 정은 왕전의 군에 수많은 병사를 증원하였고, 이에 왕전은 연나라군을 대파하여 수도인 계성(薊城)을 점령한다. 연왕희와 태자단은 동군의 주도인 양평(襄平)으로 도주한다.
[한왕안 사사 및 위나라 멸망]
신정 반란 진압 후 한왕 안이 사사되었고, 왕분이 이끄는 진군이 위나라 수도 대량(大梁)을 황하 물을 이용한 수공(水攻)으로 함락시켜 위나라가 멸망했다. 이는 진나라가 강력한 국력과 전략으로 난공불락의 성도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진왕 정 21년, 기원전 226년 진왕 정은 신정에서 일어난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영진(郢陳)에 있던 한왕안을 사사한다. 진왕 정 22년, 기원전 225년 왕분이 이끄는 10만 진나라군은 북상하여 위나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에 다다른 다음 성을 포위한다. 왕분은 정공법으로 함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량을 수몰시키기로 한다. 대량의 지세를 파악한 왕분은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그 하류를 막는 제방을 쌓도록했다. 충분한 물이 쌓이자, 둑은 파괴되고 대량성은 물에 잠긴다. 대량성이 물에 잠긴 지 3달이 되어 성벽이 무너지자 왕분은 총공세를 명한다. 위왕가(魏王假)는 더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 판단해 성문을 열고 진나라에 항복한다. 그리하여 위나라는 멸망했다.
[왕전 60만 대군, 초나라 재차 공격]
이신이 초나라 정벌에 실패하자 진왕 정은 왕전에게 60만 대군을 맡겨 초나라를 재차 공격하게 했고, 왕전은 평여에서 초군과 대치하며 장기전을 유도했다. 이는 진나라가 초나라 멸망에 국력을 총동원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진왕 정 22년, 기원전 225년 이신과 몽무가 20만 대군으로 초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했으나, 창평군의 반란과 항연의 기습 추격으로 이신군이 대패했다. 진왕 정은 초나라가 쉽게 멸망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친히 왕전의 집이 있는 빈양으로 가 왕전에게 60만 대군을 지휘해줄 것을 간청했다. 진왕 정 23년, 기원전 224년 왕전과 몽무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재차 공격하여 평여로 진출한다. 초나라의 대장 항연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평여에서 진군과 대치한다. 왕전은 견고한 요새를 쌓고 전투를 하지 않으며 장기전을 유도했다.
[초나라 멸망]
1년 넘게 이어진 진-초 대치 끝에 항연이 동쪽으로 철군하자 왕전이 이를 추격하여 항연을 죽이고 초왕 부추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창평군마저 사망하며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로써 중원의 강력한 대국 초나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치가 1년을 넘기고 항연은 초나라군에 동쪽으로 철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조용히 기회를 봐왔던 왕전은 즉시 출병해 암암리에 초나라군을 추격하여 용맹한 용사들을 선봉으로 앞세워서 초나라군을 강타했다. 초나라군은 예기치 못한 공격에 다급히 응전했지만 예봉이 꺾인 초나라군은 사기충천한 진나라군을 당해낼 수 없어 결국 대패하고 만다. 초나라군은 기(蕲)의 남쪽에서 대파되었고, 왕전은 이를 추격하여 연달아 초군을 격파해 결국 대장 항연마저 죽인다. 왕전은 수춘을 공격하여 초왕 부추를 포로로 잡는다. 초왕이 사로잡힌 이후 창평군은 강남으로 패퇴하여 회남에서 초왕으로 옹립되어 진나라에 저항했으나, 진왕 정 24년, 기원전 223년 왕전은 회남을 공격해 격파하여 창평군을 죽이고 끝내 초나라를 멸망시킨다.
[대왕 조나라 잔여세력 및 연나라 멸망]
왕분의 진군에 의해 대군으로 도피했던 조나라 잔여 세력이 멸망하였고, 연왕희가 포로로 잡히며 연나라도 완전히 멸망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전국칠웅 중 남아있던 조(잔여 세력)와 연나라를 모두 병합하게 되었다.
진왕 정 25년, 기원전 222년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온 왕분의 진군에 의해 공자 가(趙嘉)가 왕으로 옹립되었던 조나라 잔여 세력이 멸망한다. 멸초, 멸위 후에 진왕 정은 왕분(王賁)에게 명하여 군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게 한다. 연왕희는 포로로 잡히고 연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전국 통일 및 황제 칭호 사용]
진왕 정이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전국 시대를 통일한 후, 스스로 황제 칭호를 사용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를 열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 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진왕 정(政) 26년, 기원전 221년(제왕 건 44년) 진왕 정은 제나라가 진나라의 사신을 거부한 유유로 대군을 동원하고 몽염을 사령관으로 하여 제나라를 공격한다. 제나라의 주력군이 서부에 묶인 사이, 왕분과 부장 이신은 연나라의 남부에서 출정하여 제나라의 북부를 무인지경으로 진군하며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까지 진군한다. 임치가 포위되자 제왕 건은 항복을 결정하고 제나라는 멸망한다. 이로써 진왕 정은 전국을 통일하고 황제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전국적 화폐, 서체, 도량형 통일]
중국 통일 후 시황제는 각기 달랐던 화폐, 서체, 도량형을 하나로 통일하여 교류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통일 제국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치였다.
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서체가 달라 서로 간에 교류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중국 전역의 화폐와 서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통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넓은 중국 전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특히 서체의 통일은 단순 교류의 목적이 아니라 문서기반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핵심이었다. 모든 보고를 오직 문서로만 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이 관료제의 피라미드를 따라 전국에 전달되도록 하는데 공문서의 서체 통일은 필수적이었다.
[전국적 군현제 실시]
시황제는 주 왕조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어 중앙 정부 소속 관리들이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했다. 이는 강력한 중앙 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시황제는 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주 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러한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군현제의 실시는 주나라가 봉건 제도로 나라를 다스리던 중에 지나치게 성장한 제후국에 의해 멸망당한 것을 선례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 군현제는 전한의 한 고제 시기에 군국제로 반쯤 부활하고. 전한 무제 시기에 마침내 다시 정식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세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는지 주-군-현 3단체계로 개편되고 원나라 대 전인 남송 시기까지 약 1300년 가까이 중국의 행정제도가 된다.
[몽염, 흉노 정복 및 오르도스 개척]
진 시황제는 몽염 장군을 보내 북방의 흉노를 정복하고 오르도스 지방에 농업을 전파하려 시도했다. 이는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고 한족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중요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진 시황제는 자국민들이 흉노와 무역을 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였고, 흉노는 무역길이 막히자 약탈을 하여 물자를 공급받으려 하였다. 흉노족이 북부 지방을 약탈하자 시황제는 몽염(蒙恬) 장군을 보내어 기원전 215년 경에는 흉노를 정복하였고 오르도스(어얼둬쓰시) 지방에 농업을 전파하였다. 다만 이 지역의 농업화와 한족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흉노는 끊임없이 이 지역을 침략해 들어오게 되었다.
[만리장성, 아방궁 등 대규모 토목 공사]
진 시황제는 황제의 권위 강화를 위해 아방궁 (BC 212)과 진시황릉을 건설하고, 북방 민족 방어를 위한 만리장성(BC 215)을 비롯해 운하 건설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이는 백성들에게 막대한 부담을 주었으나,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진 시황제는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과 진시황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북방 민족들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기존 7국의 성벽들을 보수해서 길다란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 멸망 이후에도 여러 나라들이 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남방 대규모 정벌 및 한족화 사업]
진 시황제는 50만 대군을 보내 남방 지역을 정벌하여 광저우 인근 해안가부터 베트남 하노이 인근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규모 한족 이주를 통해 동화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써 중국의 영역은 남쪽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기원전 214년 경, 진 시황제는 50만에 달하는 군대를 보내어 남쪽 쓰촨성 일대 대부분을 공격하였다. 이 남부 정벌 사업 때, 남쪽의 정글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진나라 군대는 원주민들의 게릴라 공격에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황제는 운하를 파고 막대한 양의 물자를 보내어 더 큰 규모의 2차 정벌을 준비하였고, 결국 승리하였다. 진나라는 이 정벌로 인하여 광저우 인근의 해안가까지 모두 장악하였고, 푸저우와 구이린 지방까지 새롭게 중국의 영토로 포함시켰다. 진나라 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의 하노이 인근까지 진군하였으며 남부 국경을 안정시켰다. 정벌 사업이 끝나자 시황제는 10만 여명에 달하는 한족인들을 이 지방으로 강제로 보냈으며, 정착하고 인근을 한족화시키도록 하였다. 이같이 철저한 동화사업으로 인하여 시황제는 남부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법가 사상 통치 이념 및 분서갱유]
진 시황제는 법가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며 사상 개혁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유학자 탄압과 서적 소각 명령인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했다. 이는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시황제는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 역사책과 법령집 외에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서들을 없앨 것을 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다. 더욱이 법가의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이 중국 전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엄격한 데다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은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진 시황제 사망]
동부 순행 중 시황제가 사망했으나,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그의 죽음을 숨기고 태자 부소 대신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이는 진나라 멸망의 도화선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시황제는 총 3번에 달하는 암살 미수를 겪었고, 이같은 경험은 시황제를 거의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불로불사에 대한 집착에 몰아넣었다. 시황제는 죽는 날까지 불사의 영약을 찾아 나섰으나, 결국 동부로 순행을 하던 중 사망하고 만다. 황제가 사망하자 총애받던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는 그의 죽음을 숨겼고, 올곧은 성격의 태자 부소(扶蘇) 대신 그들이 조종하기 쉽고 어리석은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하려 들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들은 황제의 유서를 조작하였고, 황제가 태자 부소에게 자결을 명한 것처럼 꾸몄다. 결국 태자 부소와 그를 보필하던 명장 몽염은 목숨을 잃었고, 진나라는 점차 혼란 속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진승·오광의 난 발발]
2세 황제 호해의 폭정과 조고의 전횡이 심화되던 시황제 사후 다음 해,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발발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진나라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시황제 사후 다음 해에는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반란이 발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전국은 소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2세 황제 살해 및 조고 암살, 진왕 자영 즉위]
환관 조고가 무능한 2세 황제 호해를 살해하고 황족 자영을 옹립했으나, 자영은 즉위 직후 조고를 암살하고 스스로 황제에서 왕으로 격을 낮추어 진나라를 재건하려 했다. 이는 무너져가는 진나라의 마지막 재건 시도였다.
조고는 2세 황제 호해의 도가 지나친 무능함 때문에 그를 죽여버렸으며, 그의 자리에 사람들의 신망을 받던 황족 진왕 자영(子嬰)을 세워 민의의 안정을 도모하려 들었다. 허나 자영은 황제가 된 직후 조고를 암살하였고, 무너지는 진나라를 다잡으려 시도하였다. 진나라 곳곳에서 유력자들이 왕을 참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자영은 왕좌를 보전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황제에서 격을 낮추어 왕으로 불렀으며,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였다.
[진나라 멸망]
유방이 진나라 수도 함양에 입성한 후, 항우가 함양을 약탈하고 진왕 자영을 살해하며 진나라는 건국 15년 만에 완전히 멸망했다. 이는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의 짧고도 강렬했던 역사의 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결국 기원전 206년 유방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였고, 진왕 자영의 목숨을 지켜줄 것을 약속하였다. 허나 유방의 뒤를 이어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이만한 아량이 없었고, 함양을 약탈하고 불태운 다음 진왕 자영을 죽여버렸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는 15년 만에 완전히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