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제국
제국, 고대 국가, 유럽 역사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38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뉘어 서쪽을 담당했던 서로마 제국은 불과 80여년 만에 야만족 침입과 내분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마지막 황제가 폐위된 476년은 서유럽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평가되지만 그 유산은 언어 종교 법률 등 현대 유럽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 로마 제국 최초 분할 시도 (사두정 체제 도입)
- 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 제국 재통일
-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망 후 제국 재분할
- 서고트족의 제국 국경 침입 허용
-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대패
- 로마 제국의 최종 분할 및 서로마 제국 건국
- 스틸리코 처형과 서로마 제국의 혼란 심화
- 로마 대약탈 (Sack of Rome)
- 서고트 왕국 건국 (최초의 야만왕국)
- 카르타고 함락 및 반달 왕국 건국
- 아틸라의 훈족 대침입 시작
- 카탈라우눔 전투 (아에티우스의 훈족 격퇴)
- 아틸라 사망과 훈족 세력의 급격한 약화
-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및 로마 약탈 (반달족)
- 마요리아누스 황제 즉위 (최후의 국력 회복 시도)
- 마요리아누스 암살과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 체제
- 안테미우스 황제 즉위 (동로마 공인 마지막 황제)
- 오레스테스의 반란과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즉위
- 서로마 제국의 공식적 멸망
-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과 서로마 제국의 완전 패망 선언
- 샤를마뉴 대제의 서로마 황제 칭호 계승 시도
285
[로마 제국 최초 분할 시도 (사두정 체제 도입)]
로마 제국의 방대한 통치 문제 해결을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동서로 제국을 나누고 정제와 부제를 두는 '사두정(Tetrarchy)' 체제를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이는 훗날 제국 최종 분열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86년 막시미아누스를 서로마 정제로, 자신은 동로마 통치를 맡았습니다. 293년에는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부제로 임명되어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며 3세기의 대혼란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했습니다.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퇴위하고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새로운 정제가 되며 2차 사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306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사망과 사두정 체제 혼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방의 새 정제로 즉위했으나 다른 부제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제국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브리튼 섬 주둔 군단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인정 문제로 서방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308년, 갈레리우스가 카눈툼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로마 제국 서방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나누어 가지는 합의안을 내놓았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통합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324
[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 제국 재통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리키니우스를 격파하고 동방까지 정복하며 분열되었던 로마 제국을 성공적으로 재통일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고 천도하며 제국의 분위기를 일신했습니다.
리키니우스는 테살로니아에 감금된 후 살해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천도 이후에도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통치한다는 개념 자체는 남아있어, 강력한 황제 사후 내전이 반복되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337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망 후 제국 재분할]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망 후, 로마 제국은 그의 세 아들(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과 사촌(달마티우스)에게 조각조각 나뉘어 통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할은 불안정한 제국 상황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동부를, 콘스탄티누스 2세는 브리타니아와 갈리아를,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등을 물려받았습니다. 달마티우스는 암살되어 그의 몫은 다른 형제들에게 흡수되었습니다. 이후 340년 콘스탄스가 서부 재통합에 성공했으나, 350년 찬탈자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361
[콘스탄티우스 사망과 황위 계승 불안정]
콘스탄티우스 황제 사망 후 부제 율리아누스가 황위를 물려받았으나,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투 중 전사했습니다.
이어 즉위한 요비아누스도 9개월 만에 단명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동방에 집중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번영시켰으나, 옛 수도 로마는 쇠락했습니다.
364
[발렌티니아누스 1세 즉위와 제국 재분할]
요비아누스 사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로 추대되었고, 즉위 직후 그의 형제 발렌스에게 제국의 동부를 맡기며 제국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 통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제국의 국력은 약해지고 북부 야만족들의 침입이 시작되며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376
[서고트족의 제국 국경 침입 허용]
동고트족을 피해 달아나던 서고트족이 제국 국경 내부로 침입해 들어왔고, 발렌스 황제는 이들을 막는 대신 다뉴브 강을 넘어 발칸 반도 내 거주를 허가해 주었습니다.
이는 이후 로마와 야만족의 충돌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자 서고트족은 반감을 품고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378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대패]
서고트족이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로마에 최초로 대승을 거두고 발렌스 황제마저 전사시키며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전투 후 로마는 기존의 강경책에서 벗어나 고트족에게 대거 자치를 허락하는 협상책으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이 결정은 고트족이 자신들만의 세력을 집결시키고 나중에는 제국을 좌지우지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서부에서는 친기독교 정책에 대한 반발이 거세져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전통 신앙을 약화시키고 기독교를 우위에 두어 시민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383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과 황위 찬탈]
유명 장군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이복형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동부로 쫓아내고 황위를 찬탈했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도움으로 통치권을 되찾았습니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프랑크족 장교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직후 유게니우스가 황제로 올랐으나, 이에 반발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서부로 침공하며 파괴적인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395
[로마 제국의 최종 분할 및 서로마 제국 건국]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제국을 혼자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통치를 맡겼습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이 공식적으로 분리되었으며, 호노리우스가 서로마를 물려받았습니다.
더 나이가 많은 아르카디우스는 동방을, 어린 호노리우스는 서방을 물려받았습니다.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에게 군사권을, 루피누스에게 내정을 일임했으나, 이들의 권력 다툼은 알라리크 1세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호노리우스의 불안정한 통치 시작]
호노리우스의 어린 나이와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서고트족의 알라리크 1세가 일리리쿰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아프리카 총독 길도마저 반란을 일으키며 서로마 제국은 내우외환이 겹친 최악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초기 서로마 제국의 수도는 메디올라눔(밀라노)이었으나, 알라리크 1세의 이탈리아 본토 진입 이후 라벤나로 천도했습니다. 라벤나는 습지와 견고한 성벽, 항구로 인해 방어에 유리했으나, 이탈리아 중부 방어가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408
[스틸리코 처형과 서로마 제국의 혼란 심화]
호노리우스 황제는 재상 올림피우스의 꼬임에 넘어가 유능한 군사령관 스틸리코를 반역죄로 처형했습니다.
이는 스틸리코를 따르던 수많은 군사들이 알라리크 1세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었고, 서로마 제국의 국경 방어선 붕괴와 내부 혼란을 극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스틸리코가 라인 강 유역의 군대를 이탈리아 방어로 빼내면서 국경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야만족들의 갈리아 약탈과 브리타니아에서의 반란이 속출했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에 더 이상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어 410년에 브리타니아는 사실상 제국의 손을 떠났습니다.
410
[로마 대약탈 (Sack of Rome)]
스틸리코 처형 후 저항 없이 이탈리아로 진군한 알라리크 1세가 로마를 약탈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 이후 최초로 로마 제국의 상징적 수도인 로마가 약탈당한 사건으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서로마 제국의 국력은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3일간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호노리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3세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는 등 기강이 무너져갔고, 갈리아에서는 요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418
[서고트 왕국 건국 (최초의 야만왕국)]
수많은 반란과 군단 약화 끝에, 호노리우스 황제가 남서부 갈리아 지방을 서고트인들에게 봉토로 주며 이민족 족장과 왕들이 자치를 허가받았고, 이로 인해 서고트 왕국이라는 최초의 야만왕국이 건국되었습니다.
이는 갈리아 북부 지방에 프랑크족의 영향권 편입을 가속화시켰습니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423년에 사망했습니다.
423
[호노리우스 사망 후 황제 즉위 혼란]
호노리우스 황제 사망 후 동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2세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서로마 황제로 임명하려 했으나, 잠시 머뭇거린 사이 서로마에서 요하네스가 황제를 자칭했습니다.
요하네스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견디지 못하고 425년에 잡혀 살해당했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정식 서로마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의 즉위 이후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서로마 제국의 최고 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
439
[카르타고 함락 및 반달 왕국 건국]
아프리카 총독 보니파시우스의 반란으로 반달족이 스페인에서 아프리카로 대거 건너가 약탈을 일삼았고, 북아프리카의 최대 거점인 카르타고 시가 함락되며 반달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가장 부유한 북아프리카 속주를 잃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 시는 북아프리카에서 걷히는 세금과 곡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반달 왕국은 함대를 조직하여 지중해 해상 무역을 위협했습니다. 아에티우스는 시칠리아 섬에 대대적인 함대를 편성하며 반달 왕국 멸망 계획을 세웠습니다.
444
[아틸라의 훈족 대침입 시작]
북아프리카 재수복 계획을 세우던 서로마 제국은 훈족 지도자 아틸라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계획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훈족을 동맹으로 여겼던 제국은 뒤통수를 맞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시칠리아 주둔군까지 다뉴브 강 유역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아틸라는 초기에 동로마 제국의 발칸 반도 도시들을 약탈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449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청혼하며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제안했고, 아틸라는 라인 강을 건너 서로마 제국으로 진군했습니다.
451
[카탈라우눔 전투 (아에티우스의 훈족 격퇴)]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대군이 서로마 제국으로 밀려오자, 제국의 명장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는 게르만과 로마 군사를 모아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아틸라를 헝가리 지방으로 쫓아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틸라는 이후에도 452년에 군대를 재결집하여 이탈리아 본토를 재침공했고, 로마 시로 향하는 길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황제는 교황 레오 1세 등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고, 훈족은 전염병 등 악재로 인해 철수했습니다.
453
[아틸라 사망과 훈족 세력의 급격한 약화]
훈족 지도자 아틸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그의 자식들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훈족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 더 이상 서로마 제국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은 큰 위협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발렌티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업적을 위협으로 느껴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455
[발렌티니아누스 3세 암살 및 로마 약탈 (반달족)]
발렌티아누스 3세가 명장 아에티우스를 암살했으나 자신도 얼마 되지 않아 군 장교에게 살해당하며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가 되었으나, 그가 반달족 왕과의 약혼을 파기하자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약탈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최고 신전이 피해를 입고 다시 한번 로마가 약탈당하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페트로니우스는 11주 만에 로마 시민들의 분노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교황 레오 1세가 가이세리크에게 로마 시민들을 해치지 말 것을 간청했습니다.
456
[아비투스 황제 즉위와 살해]
페트로니우스 사후, 장군 아비투스가 고트족 왕 테오도릭 2세의 지명을 받아 황제로 즉위했으나, 친위대에 야만족들을 대거 채워넣는 등 반로마적인 행동으로 로마 시민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결국 수에비 출신 군인 리키메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리키메르는 이후 유력 장군 마요리아누스를 새 황제로 인정했습니다.
457
[마요리아누스 황제 즉위 (최후의 국력 회복 시도)]
유력 장군 마요리아누스가 스스로 황제를 주장하며 동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로마군의 전력을 크게 증강시키고 야만족을 병사로 영입하는 등 군사력으로 서로마 제국의 국경을 확장하려 한 최후의 황제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에 리키메르를 남겨둔 채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로 원정하여 서고트족을 꺾고 자치권을 박탈하며 제국 통치를 확립했습니다. 459년까지 히스파니아 북서부 지방을 평정했습니다.
461
[마요리아누스 암살과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 체제]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반달족과의 협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 개혁을 시도하려 하자, 그동안 로마에 머물며 반란 세력을 모아온 리키메르에 의해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살해당했습니다.
이후 야만족 피가 섞인 리키메르는 스스로 황제에 오르지 못하고 꼭두각시 황제들을 내세우며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켰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마요리아누스가 회복한 영토들을 다시 잃었으며, 고위층의 부정부패가 날로 심각해져갔습니다. 리키메르가 처음 내세운 황제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이탈리아 밖에서 인지도가 낮아 동로마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465년에 사망했습니다.
467
[안테미우스 황제 즉위 (동로마 공인 마지막 황제)]
리비우스 세베루스 사망 후,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리키메르와의 협상 끝에 유능한 동로마 장군 안테미우스를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동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아프리카 속주 재탈환을 위해 협력하기도 했으며, 동로마 황제가 동등한 자격으로 공인한 마지막 서로마 황제였습니다.
안테미우스는 리키메르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다 약 2년간의 내분 끝에 리키메르에 의해 쫓겨나 죽임을 당했고, 472년에 올리브리우스가 새로운 황제로 세워졌습니다. 올리브리우스는 즉위 7개월 만에 사망했으며, 직후 리키메르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473
[글리세리우스 옹립과 율리우스 네포스의 등장]
올리브리우스 황제 사망 후 리키메르의 조카 군도바드가 글리세리우스를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글리세리우스를 황제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달마티아의 율리우스 네포스를 독자적으로 새로운 황제로 공인했습니다.
율리우스 네포스는 동로마 황제의 도움을 받아 474년 봄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싸움 없이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글리세리우스는 살로나 주교로 여생을 보냈습니다.
475
[오레스테스의 반란과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즉위]
율리우스 네포스 황제의 군사령관이었던 오레스테스가 반란을 일으켜 라벤나를 빼앗고 네포스를 달마티아로 달아나게 했습니다.
오레스테스는 같은 해에 자신의 어린 아들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명목상의 새 황제로 즉위시켰습니다.
동로마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정식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달마티아에 은신한 율리우스 네포스만을 공식 황제로 인정했습니다.
476
[서로마 제국의 공식적 멸망]
이탈리아의 게르만족 군사령관 오도아케르가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강제 퇴위시켰습니다.
이로써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이후 81년간 존속했던 서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멸망했습니다.
이 해는 저명한 학자 에드워드 기번이 유럽의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으로 보기도 합니다.
로물루스가 퇴위당한 이후에도 율리우스 네포스는 달마티아에서 허울뿐인 서로마 황제로 군림했습니다. 오도아케르는 자신을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주장하며 동로마 황제 제논에게 정통성을 인정받고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480
[율리우스 네포스 암살과 서로마 제국의 완전 패망 선언]
달마티아에서 허울뿐인 서로마 황제로 군림하던 율리우스 네포스가 암살당하자,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침공하여 오도아케르 왕국에 편입시켰습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논은 서로마 제국의 완전 패망을 선언하고 자신을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공식 황제라고 선포했습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게르만족 왕들은 로마법과 문화를 수용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라틴어는 로망스어로 발전하고, 가톨릭 교회와 교황은 서유럽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로마 원로원도 6세기까지 존속했습니다.
582
[동로마 제국의 서로마 영토 보존과 부활 시도]
동로마 제국의 티베리우스 2세 황제 사망 시점에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절 재점령한 옛 서부 지역 영토를 상당수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제국 서부와 동부 지방을 나누어 맡기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이후 '총독부'라는 새로운 행정 단위가 도입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대대적인 재수복 전쟁을 펼쳐 옛 로마 제국 서부 지방들을 상당 부분 되찾는 데 성공했으나, 방대한 영토 지배의 한계와 전염병 등으로 인해 결국 옛 영토로 후퇴했습니다. 그는 서고트족이 점거한 라벤나를 공격할 때 서고트족이 벨리사리우스에게 서로마 황제직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800
[샤를마뉴 대제의 서로마 황제 칭호 계승 시도]
서로마 제국 멸망 후에도 '로마의 황제'라는 영광은 서유럽 지배자들에게 나름의 로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에 의해 '모든 로마인들의 황제'로 즉위하며 서유럽 세계는 그의 프랑크 왕국을 새로운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유일한 로마 황제를 자처하던 동로마 제국의 격분을 불러왔으며, 동서유럽 관계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로마는 그를 '프랑크족의 황제'로만 인정했습니다. 888년 카롤링거 왕조가 망하고 924년 샤를마뉴의 황제위 계승자가 사망하며 일시적으로 '로마의 황제' 칭호가 끊겼습니다.
962
[신성 로마 제국의 건국]
카롤링거 왕조의 멸망으로 끊겼던 '로마의 황제' 칭호가 신성로마제국의 건국으로 부활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스스로를 '옛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와 영토를 계승한 합법한 국왕'이라고 주장했으며, 이 칭호는 1806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1054년 동서교회의 대분열이 발생하면서 동로마 제국 황제는 옛 서로마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1453
[동로마 제국 멸망과 황제위의 소멸]
로마 제국의 마지막 연속체였던 동로마 제국이 마침내 멸망하면서, '황제'라는 칭호는 서유럽 군주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제국들 대부분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하며 유럽에서의 황제위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1871년 건국된 독일 제국도 신성로마제국 황가와의 연관성을 주장했습니다. 동로마 제국을 승계했다고 주장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도 유사한 시기에 멸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