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이론물리학자, 양자역학 선구자, 노벨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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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3: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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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역학의 초석을 다진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며 과학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그의 업적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책임자를 맡아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 전후 독일 과학계 재건에 크게 기여하며 국제 과학 협력을 주도했다.

주요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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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

[독일 물리학계의 거장,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탄생]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고전 언어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는 훗날 양자역학의 주요 선구자이자 20세기 과학의 흐름을 바꾼 거장으로 성장합니다.

1919

[혼란 속에서 시작된 청년기의 특별한 경험: 자유군단 활동]

10대 후반,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에 맞서 싸우는 자유군단의 일원으로 뮌헨에 합류합니다.

'경찰, 강도놀이' 같았던 이 시기는 그의 젊은 시절에 독특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그의 임무는 '빨간색' 행정 건물에서 자전거나 타자기를 압수하고 '빨간색' 죄수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제한되었습니다.

1920

[물리학 탐구의 시작: 뮌헨 대학교 입학]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아르놀트 조머펠트와 빌헬름 빈에게 물리학을, 괴팅겐 대학교에서 막스 보른에게 수학을 배우며 그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1922

[운명적인 만남: 닐스 보어와의 첫 대면]

지도교수 조머펠트의 추천으로 '보어 축제'에 참가, 양자 원자 물리학의 거장 닐스 보어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은 그의 과학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1923

[난류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뮌헨 대학교에서 아르놀트 조머펠트의 지도 아래 '액체 흐름의 안정성 및 난류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으며 학문적 기반을 다집니다.

1924

[양자역학 혁명의 서곡: 코펜하겐에서의 닐스 보어와 공동 연구]

록펠러 재단 연구원 자격으로 코펜하겐 대학교의 닐스 보어 이론물리학 연구소에서 공동 연구를 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훗날 양자역학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연구는 1925년 5월 1일까지 이어졌습니다.

1925

[세계 최초, 양자역학의 행렬 역학을 제시한 획기적인 논문 발표]

『운동학과 역학 관계의 양자 이론적인 재해석』이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하여, 관찰할 수 없는 양을 거부하며 행렬의 비가환 곱셈을 도입, 양자역학 행렬 역학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업적입니다.

이 논문은 막스 보른과 파스쿠알 요르단과 함께 쓴 후속 논문들로 더욱 정교해졌으며, 물리학자와 역사가들에게 수수께끼로 여겨질 만큼 혁신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1926

[닐스 보어의 조교이자 대학 강사로 임명]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의 조교이자 대학 강사로 임명되며, 그의 학문적 활동 영역을 넓혀나갑니다.

1927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교 이론물리학 교수로 임명]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일반 교수이자 물리학부 학부장으로 임명되며, 1928년 2월 1일 취임 강의를 합니다.

이 시기 그는 강자성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파울리 배타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펠릭스 블로흐, 에드워드 텔러,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 등 훗날 저명한 과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불확정성 원리' 발표]

코펜하겐에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연구하던 중,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를 발견하고 볼프강 파울리에게 편지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세계 최초로 제시되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원리를 설명할 때 '불확정성(uncertainty)'이 아닌 '부정확성(Ungenauigkei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1932

[양자역학 창안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양자역학의 창안, 특히 수소의 동소체 형태 발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발표됩니다.

그는 물리학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 수상은 이듬해인 1933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928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하이젠베르크를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지명하기도 했습니다.

[제임스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 후 핵 구조 연구 시작]

제임스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 직후, 원자핵의 중성자-양성자 모형에 대한 세 개의 논문 중 첫 번째 논문을 제출하며 핵물리학 분야의 연구를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1933

[나치 집권 후 '도이체 물리학'의 표적이 되다]

아돌프 히틀러 집권 후, '도이체 물리학' 운동의 지지자들에게 '백인 유대인'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공격에 시달립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능력이 정치적 요인으로 평가절하되는 시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폭력적인 공격을 받고 투옥되던 시기였기에 이러한 공격은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문제를 해결하고 명예를 되찾기 위해 히믈러에게 편지를 쓰며 반격했습니다.

[폴 디랙의 양전자 이론을 발전시키다]

우주선 안개 상자 사진을 통해 양전자의 존재가 확인된 후, 폴 디랙의 양전자 이론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킨 논문을 발표하며 양자장론에 기여합니다.

1937

[엘리자베스 슈마허와 결혼]

개인 음악 발표회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슈마허와 결혼하며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7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1938

[어머니의 도움으로 SS 조사에서 벗어나다]

어머니가 힘러의 어머니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한 결과, 힘러가 친위대 집단지도자에게 편지를 보내 하이젠베르크 사건을 진정시킵니다.

이는 그의 학문적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힘러는 하이젠베르크가 한 세대의 과학자들을 가르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독일이 그를 잃거나 침묵시킬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1939

[미국 이주 제안 거절: 독일에서의 연구를 선택하다]

미국으로 여행하여 미시간 대학교를 방문하고 이주 제안을 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독일에서의 연구를 이어갑니다.

6년 후 그는 알소스 작전에서 미국 과학 고문으로 다시 그를 만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 '우란베라인' 총책임자로 임명]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시작된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 '우란베라인'의 총책임자가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전후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처음에는 육군 병기청(HWA)의 후원 아래 공식적인 독일 원자력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카이저-빌헬름 물리학 연구소(KWIP)가 군사 통제 하에 놓였습니다. 그는 핵분열을 통한 에너지 획득의 이론적 토대에 대해 강의하며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1942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핵폭탄 개발 불가능성 보고]

독일의 군수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소환되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필요하므로 1945년 이전에는 핵폭탄을 만들 수 없다고 보고합니다.

이 보고는 독일 핵무기 프로그램의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하이젠베르크는 훗날 '우리는 1942년 봄에 정부에게 원자폭탄을 건설하기 위해서 120,000명을 고용해야 한다고 권고할 도덕적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하며 독일의 핵무기 프로그램이 원자폭탄 제작에 실패한 것을 설명했습니다.

1944

[암살 위협 속 스위스 강연: 미국 스파이의 비밀 임무]

중립국 스위스에서 강연을 진행합니다.

이때 미국 전략사무국은 모 버그 요원을 보내, 독일이 원자폭탄 완성에 가까워졌다는 내용이 나오면 하이젠베르크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행히 암살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1945

[전쟁 종전 직전, 연합군의 알소스 임무에 의해 체포되다]

독일군 장악 지역에서 산악 작전을 벌이던 중 연합군의 알소스 임무단에 의해 체포되어 하이델베르크로 이송됩니다.

이후 그는 영국 팜 홀에 억류됩니다.

알소스 임무는 독일의 원자폭탄 프로그램 여부를 확인하고, 관련 시설, 연구, 물자, 과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연합군의 노력이었습니다.

[팜 홀에서 접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소식]

영국 팜 홀에 억류되어 있던 중,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지만, 독일 과학자들은 충격과 함께 폭탄 개발의 실패를 논했습니다.

팜 홀 녹취록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는 오토 한 등 동료들과 함께 연합군의 승리를 기뻐했으며, 폭탄 개발 실패에 대해 '12만 명을 고용하라고 권고할 도덕적 용기가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1946

[독일 과학 재건의 선봉에 서다: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 소장]

영국에 억류된 후 독일 괴팅겐으로 이송된 그는 즉시 독일 과학 연구 촉진에 나서,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됩니다.

막스 폰 라우에 등 동료들과 함께 연구소 재건에 힘썼습니다.

그는 소련으로부터의 연구 초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독일에 남아 과학 발전에 헌신했습니다.

1953

[유럽 핵물리학 연구의 초석, CERN 설립 협약 서명]

유럽의 핵물리학 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한 유네스코 회의에서 독일 연방 공화국 과학대표로 참여하여 CERN 설립 협약에 서명합니다.

창립 과학 책임자 제안은 거절했으나, 과학 정책 위원회 의장으로서 CERN의 과학 프로그램 결정에 기여했습니다.

1957

[핵무장 반대 선언: 괴팅겐 선언문 서명]

핵무기로 무장한 독일 연방 공화국에 반대하는 '괴팅겐 선언문'에 서명하며, 핵 과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합니다.

이는 정치인들의 인식을 바꾸고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58

[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체물리학 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가 뮌헨으로 이전 및 확장되어 '막스 플랑크 물리학 및 천체물리학 연구소(MPIFA)'로 개명되며, 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 이 연구소의 단독 책임자를 역임합니다.

1969

[삶과 철학을 담은 자서전 『부분과 전체』 출판]

자신의 생애와 철학적 사유를 담은 자서전 『부분과 전체』를 독일에서 출판합니다.

이 책은 그의 회고록으로, 물리학과 철학, 그리고 과학자의 역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을 '원자 물리학에 대한 대화'라는 제목으로 제안하기도 했으며, 콘라트 로렌츠와 아돌프 포르트만의 영향을 받아 대중적인 글쓰기로 학문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1976

[20세기 물리학의 거성,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영면]

신장암으로 자택에서 74세의 나이로 영면합니다.

그의 사망 다음 날, 동료와 친구들은 물리학 연구소에서 그의 집까지 촛불을 들고 추모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트 하이젠베르크는 1980년 그의 삶과 철학을 담은 회고록 『정치인의 정치 생활』을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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