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빈 슈뢰딩거

물리학자, 양자역학, 노벨상 수상자,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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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물리학자. 양자역학의 기초를 다진 슈뢰딩거 방정식을 개발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으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짐. 물리학을 넘어 철학 생물학 등 다방면에 걸쳐 깊은 탐구와 저술 활동을 펼침. 나치즘에 반대하여 독일을 떠나는 등 시대적 양심을 보여주었으나 사생활에서의 논란도 존재.

주요사건만
최신순

1887

[탄생 및 유년기]

오스트리아 빈에서 아버지 루돌프 슈뢰딩거와 어머니 게오르긴 에밀리아 브렌다 슈뢰딩거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반은 오스트리아인, 반은 영국인이었고, 덕분에 학교 밖에서도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납포 제작자이자 식물학자였고, 어머니는 빈 공과대학교 화학교수의 딸이었다. 슈뢰딩거는 루터교 가정에서 신자로 자랐으나 자신은 무신론자였다. 그러나 이후 동양 종교와 범신론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과학적 작업이 지적 의미에서 신성(神聖)에 대한 접근이라고 믿었다.

1906

[빈 대학교 입학 및 수학]

빈 대학교에서 물리학자 프란츠 S. 엑스너와 프리드리히 하젠외를 밑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1910

[박사 학위 취득]

프리드리히 하젠외를 밑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습한 공기에서 절연체 표면의 전기 전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1911

[조교 임명]

프란츠 S.엑스너의 조교가 되어 학문 연구를 이어갔다.

1912

[초기 연구 및 논문 발표]

《전기와 자기의 핸드북》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디일렉트리즘'이라는 소논문을 작성했고, 대기 방사능에 대한 이론적 추정치를 발표했다.

그는 관측된 대기의 방사능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방사성 물질의 높이 분포에 대한 이론적 추정치를 내놓았고, 1913년 8월 지하메(Zeehame)에서 여러 실험을 수행하여 그의 이론적 추정치와 빅토르 프란츠 헤스의 추정치를 확인했다. 이 작업으로 1920년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의 하이팅거상(Haitinger-Preis)을 수상했다.

1914

[교수 자격 취득 및 군 복무]

교수 자격(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고, 오스트리아 요새 포병의 임관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1918년까지 전쟁 업무를 수행했다.

1920

[결혼]

안네마리 (아니) 베르텔과 결혼하여 평생의 반려자로 삼았다.

[대학 강단 진출]

예나에서 막스 빈의 조교를 거쳐 슈투트가르트에서 부교수 자리에 올랐다.

1921

[정교수 임명 및 이직]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정교수가 되었고, 같은 해 취리히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1926

[미성년자 성적 학대 논란 발생]

39세의 나이에 14세의 '이티' 융거를 가르치며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기록이 그의 일기 '에페메리다'에 남겨졌다.

그는 10대 소녀들을 선호한다고 언급했으며, 이티를 유혹하여 17세에 임신시킨 후 불임이 되는 낙태를 초래함.

그의 일기에는 '십대 소녀들의 순수함이 그의 타고난 천재성과 이상적으로 어울린다는 이유로 10대 소녀들을 선호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존 그리빈의 2012년 슈뢰딩거 전기에는 '수학뿐만 아니라 수업에는 '적당한 양의 애무와 껴안기'가 포함되었고 슈뢰딩거는 곧 자신이 이티와 사랑에 빠졌다고 스스로 확신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는 융거에게 그녀가 임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으나 그녀는 임신하여 불임이 되는 낙태를 했다. 이후 슈뢰딩거는 다른 '목표물'로 이동했다.

[슈뢰딩거 방정식 발표]

물리학 역사상 세계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슈뢰딩거 방정식'을 《물리학 연보》에 발표하며 양자역학의 혁명을 일으켰다.

이 방정식은 시스템의 파동 함수를 계산하고 시간에 따라 어떻게 동적으로 변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시간-독립 시스템에 대한 파동 방정식의 '유도'를 제공하고 그것이 수소-유사 원자에 대한 올바른 에너지 고유값을 제공함을 보였다. 또한 양자 조화 진동자, 강체 축차, 이원자 분자 문제를 해결하고 슈뢰딩거 방정식의 새로운 유도를 제시했다. 그의 접근 방식이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과 동등함을 증명했으며, 산란 문제와 같이 시스템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파동 방정식에 복소수 해를 도입했다.

1927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교수 부임]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막스 플랑크의 뒤를 이어 교수로 부임했다.

1933

[노벨 물리학상 수상 및 독일 망명]

나치즘에 반대하여 독일을 떠나 옥스퍼드 대학교 모들린 칼리지의 펠로우가 되었고, 양자역학 연구 공로로 폴 디랙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34

[프린스턴 대학교 제안 거절]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연하고 영구적인 직위를 제안받았으나, 아내와 정부(힐데 마치)와 함께 집을 마련하려는 독특한 가사 방식이 문제가 되어 제안을 거절했다.

힐데 마치는 오스트리아 동료의 아내였고 슈뢰딩거는 그녀와 1934년에 딸을 낳았다.

1935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 제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의 광범위한 서신 교환 후,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을 제안하여 양자역학의 확률 해석에 대한 불만을 대중적으로 표현했다.

1936

[그라츠 대학교 부임]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비자 문제로 지연되어, 결국 오스트리아 그라츠 대학교에서 자리를 잡았다.

1938

[나치에 의한 해고 및 도피]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나치에 대한 알려진 반대 때문에 그라츠에서 문제를 겪었다.

그는 나중에 후회할 성명을 발표했지만, 결국 그라츠 대학은 그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고했다.

그는 괴롭힘을 당했고 나라를 떠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그는 옥스퍼드와 헨트 대학교의 방문 교수 직책을 얻었다.

1939

[아일랜드 이주 및 더블린 정착]

아일랜드의 총리 에이먼 데 벌레라의 개인 초청을 받아 아일랜드에 거주하게 되었고, 더블린 고등연구소의 설립을 도왔다.

아내, 그리고 정부인 힐데 마치와 함께 삼인혼(ménage à trois) 형태로 더블린에 정착했다.

그는 힐데 마치를 위한 비자를 얻기 위해 에이먼 데 벌레라 총리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슈뢰딩거는 1940년 10월 아일랜드 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지명이 켈트족에서 유래되었다는 등, 오스트리아인과 켈트족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1940년에 이론물리학 학교의 학과장이 되어 17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944

[《생명이란 무엇인가》 출판]

생물체의 유전 암호와 복잡한 분자의 개념, 그리고 네겐트로피에 대한 논의를 담은 역작,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를 저술했다.

이 책은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깊은 영감을 주어, 그들이 1953년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8

[아일랜드 시민권 취득]

아일랜드 시민으로 귀화했지만 오스트리아 시민권도 유지하며 양국과의 관계를 이어갔다.

1955

[더블린 은퇴 및 빈 복귀]

더블린 고등연구소에서 은퇴하고 고향인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왔다.

최근 더블린의 킹스 병원 기숙학교에서 그가 빈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어 더블린을 떠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학교의 1955년판 블루코트에 쓰여졌던 그 시기의 원고 '갈릴레오의 미공개 대화의 단편'이 재조명받았다.

1956

[원자력 회의론과 파동 아이디어 주장]

세계 에너지 회의에서 원자력에 대한 회의론으로 인해 철학적 강의를 진행하며, 파동-입자 이중성에 대한 주류 양자역학의 정의로부터 돌아선 '파동 아이디어 단독'을 주장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1961

[사망]

73세의 나이로 빈에서 오랜 지병인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알프바흐에 있는 가톨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에는 그가 만든 슈뢰딩거 방정식이 새겨져 있다.

그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묘지를 책임지고 있는 사제는 슈뢰딩거가 교황청 과학원 회원이라는 것을 알고 매장을 허락했다.

2021

2021.12.11 사후 60년

[성적 학대 논란의 재점화]

《아이리시 타임스》 기사에서 슈뢰딩거의 연쇄 성적 학대 패턴이 논문에서 '소아성애자의 프로필에 맞는 행동'으로 식별되며 대중적인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이 기사는 슈뢰딩거가 자신의 일기(에페메리다)에 성적으로 학대한 아이들을 포함한 성적 접촉 기록을 남겼으며, '십대 소녀들의 순수함이 그의 타고난 천재성과 이상적으로 어울린다는 이유로 10대 소녀들을 선호한다'고 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케이트 놀란(가명) 또한 동의가 없다는 주장 속에서 슈뢰딩거에 의해 임신되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버나드 빅가르의 연구를 통해 12세였던 그의 사촌 바바라 맥엔티를 '그루밍'했다는 보고서도 발견되었다. 맥엔티의 삼촌인 신부는 슈뢰딩거에게 더 이상 그녀를 쫓지 말라고 충고했으나, 슈뢰딩거는 나중에 자신의 일지에 그녀가 자신의 '짝사랑' 중 하나였다고 기록했다.

2022

2022.01 사후 61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조치 권고]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물리학과가 슈뢰딩거의 '여성과 아동을 성적으로 학대한 역사'를 고려하여 그의 이름을 딴 강의실의 이름을 변경하고 사진을 삭제하며, 동명의 강의 시리즈 개명을 검토할 것을 권고했다.

2022.02.08 사후 61년

[강의실 이름 변경]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의 '슈뢰딩거 강의실'이 결국 '물리 강의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는 슈뢰딩거의 과학적 기여는 인정하되, 그의 사생활 관련 논란을 인지하는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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