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자, 수학자, 태양중심설 창시자, 과학혁명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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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21- 1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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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자, 수학자, 태양중심설 창시자, 과학혁명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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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자연과학의 혁명적 전환점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을 이끈 폴란드 천문학자. • 당시 통념이던 지구중심설(천동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태양중심설(지동설)을 세계 최초로 체계화. • 주요 저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새로운 우주관을 제시 후대 과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 • 인간 중심의 우주관을 객관적인 태양 중심 체계로 바꾸며 과학 혁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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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3

[출생]

폴란드 토룬에서 네 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번창한 토룬은 발트해에서 약 150km 남쪽에 위치한 한자동맹 도시였습니다.

1470년대 토룬의 인구는 약 만 명이었고, 많은 상인들과 공장주들이 이곳에서 외국과 무역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정치적 활동도 활발한 부유한 상인이었고, 어머니 또한 유명한 상인의 딸이었습니다. '니콜라우스'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며, 소년 시절엔 '니클라스'로 불리다 크라쿠프 대학에 가면서 라틴어 철자법에 따라 '니콜라우스'가 되었습니다.

1483

[아버지 사망과 학업 지속]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우카시 바첸로데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큰누나는 수녀가 되었고, 작은 누나는 상인과 결혼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 형제는 대학에 다닐 수 있을지 불확실해졌지만, 외삼촌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그들을 자신이 졸업한 세인트 존스 스쿨에 보냈습니다.

1491

[크라쿠프 대학 입학 및 학업]

당시 독일 작센에 속했던 폴란드 남부 대도시 크라카우(현 크라쿠프)의 야기옐론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 및 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대학의 천문학 연구는 북유럽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1491-1492년 겨울 학기에 'Nicolaus Nicolai de Thuronia'라는 이름으로 등록했습니다. 예술 과정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강의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을 분석하고 동료들과 토론하며 자신의 사상 밑거름을 쌓았습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과 사크로보스코의 <천구>를 교재로 사용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모순되는 이론을 접하고 새로운 우주 체계 구상의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1495

[볼로냐 유학 및 참사회 활동 시작]

크라쿠프 대학에서 학위를 받지 않고 떠난 후, 외삼촌 바첸로데 대주교의 추천으로 바르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 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했습니다.

외삼촌은 1489년에 바르미아 대주교로 선출되었고, 코페르니쿠스가 프롬보르크에 도착했을 때 참사회 위원 중 한 명이 사망하여 그 자리에 코페르니쿠스를 임명했습니다. 모든 학비는 외삼촌이 지원했습니다. 교회법은 교회의 운영과 관련된 판결들을 모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볼로냐에서 공부하던 중 참사회 회원으로서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지며 다시 천문학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1497

[천문학 연구 심화]

볼로냐 대학 천문학 교수 도메니초 마리아 다 노바라의 집에서 하숙하며 그의 천문학 관측을 돕고 지식을 넓혔으며,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의 발췌본>을 공부했습니다.

1500

[로마 여행]

볼로냐 대학에서 4년간의 법률 공부를 마친 후 로마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1501

[추가 학업 허가]

프롬보르크에서 열린 바르미아 가톨릭 대교구 참사회로부터 2년 동안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습니다.

[파도바 대학 의학 등록]

파도바 대학 의학 과정에 등록했습니다.

1503

[바르미아 귀환 및 참사회 활동]

바르미아로 돌아와 참사회 위원으로서 교회 소유 재산 관리 감독, 로클로우 교회 학교 수업 진행 감독 등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외삼촌인 바첸로데 대주교의 비서와 주치의로도 일하며 수당을 받았고, 이를 위해 리츠바르크 성에 머물렀습니다. 여가 시간에는 그리스어를 독학하여 그리스어로 쓰인 편지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법 박사 학위 취득]

볼로냐에서 멀지 않은 페라라 대학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504

[행성 관찰 및 태양중심설 발전]

행성들이 게자리에서 하나로 만나는 대화합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기존 천문학 표와 비교하여 몇몇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알마게스트의 발췌본>을 계속 공부하며 그의 해석이 태양중심설 구상에 중요한 단초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분석과 계산을 통해 자신의 태양중심설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509

[그리스어 번역본 출판]

테오필락투스의 <도덕, 시골뜨기, 사랑꾼의 편지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1510

[태양 중심 체계 구상 및 《짧은 해설서》 배포]

바첸로데 대주교의 비서직을 그만두고 프롬보르크의 가톨릭 참사회 위원으로만 일하며 천문학 연구에 집중했습니다.

태양 중심 천문 체계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고 <짧은 해설서(Commentariolus)>라는 제목의 요약본을 지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짧은 해설서>는 등속 중심 개념에 문제를 제기하고 태양 중심 우주론을 제시한 40쪽짜리 원고입니다. 현재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에 단 세 권만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 사후에 잊혔다가 19세기 후반에 필사본이 발견되어 출판되었습니다.

1511

[참사회 고문 활동]

1513년까지 참사회의 고문으로서 참사회 업무 수행에 필요한 서류와 문서들을 작성하고 재정 거래를 관리했습니다.

1512

[프롬보르크 참사회원 활동]

외삼촌 루카스 바첸로데가 사망하고, 볼로냐 대학 동료였던 파비안 루찬스키가 대주교가 되자 동프로이센의 프라우엔부르크(프롬보르크)로 옮겨가 성당 참사회원으로 일했습니다.

참사회원은 성당 미사 계획 및 건물 관리 직책으로 일이 많지 않아 남는 시간에 천문학을 연구했습니다.

1516

[영토 관리 임무 수행]

바르미아 참사회의 영토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아 소작농 문제를 해결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1517

[화폐 개혁 논문 작성]

화폐 개혁에 대한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1520

[프롬보르크 방어 활동]

게르만 기사단이 프롬보르크를 공격하자 폴란드 국왕과 동료 위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등 프롬보르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여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1522

[화폐 주조 개혁 논의]

왕립 프로이센 의회 회의에 참석하여 은전 주조 개혁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1523

[임시 대주교 선출]

파비안 루찬스키 대주교가 사망하자 다음 대주교가 선출될 때까지 참사회 위원들에 의해 임시 대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1525

[평화 협정 체결 및 종교 개혁 영향]

폴란드와 게르만 기사단이 최종 평화안에 서명했으며, 이 무렵 루터의 종교개혁이 바르미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529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집필 시작]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을 완전히 개정하려 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출판을 권유했습니다.

1530

[천문학 연구 집중기]

경력이 높아져 할 일이 감독과 조언 등으로 줄어들면서 천문학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1532

[우주 모델 완성 임박]

자신의 우주 모델에 관한 내용을 거의 마무리했습니다.

1533

[교황청에 이론 소개]

교황의 비서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교황과 추기경들에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1536

[추기경의 출판 독려]

바티칸 강연에 참석했던 니콜라스 폰 쇤베르크 추기경이 코페르니쿠스에게 편지를 써서 책의 출간을 재촉했습니다.

1539

[레티쿠스의 해설서 집필]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의 노트를 읽고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관한 해설서를 집필했습니다.

1540

[레티쿠스 해설서 출판 및 출간 촉구]

레티쿠스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관한 해설서를 출판하며 노트를 책으로 출판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1542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출판 및 건강 악화]

계속된 교정 끝에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되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원래 책 제목을 <회전>이라 하려 했지만, 인쇄소에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로 바꾸어 출판했습니다.

출판 직후 그는 뇌출혈을 겪어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었습니다.

루터주의자였던 안드레아 오시안더는 책의 내용이 교회와 마찰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코페르니쿠스의 허락 없이 '계산상의 편의를 위한 추상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문을 추가했습니다. 책은 즉각적인 반응이 미약했고, 400부 초판이 다 팔리지 못했습니다.

1543

[사망]

폴란드 프롬보르크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성직자로 살았지만 30년 넘게 천문학에 열정을 바쳤습니다.

1616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금서 지정]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금서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헤르메스주의자였던 브루노가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했기 때문인데, 브루노의 사상이 이단으로 여겨지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책도 한통속으로 취급받았습니다.

1758

1758 사후 215년

[금서 해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교황청의 금서 목록에서 해제되었습니다.

1807

1807 사후 264년

[나폴레옹의 유해 수색 실패]

나폴레옹이 그의 무덤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2005

2005.08 사후 462년

[유해 발견]

14세기에 건축된 플라우엔부르크 대성당 제단 아래에서 여러 구의 유골 중 코페르니쿠스의 것으로 보이는 아래턱이 없는 두개골과 다리뼈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유골은 사망 당시 연령이 60~70세로 추정되었으며, 부러진 코, 왼쪽 눈 위 흉터 등 두개골의 특징이 현존하는 초상화와 일치했습니다.

2008

2008.11.20 사후 465년

[유해 DNA 일치 확인]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의 유전학 전문가 마리 알렌이 기자회견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책에서 나온 두 가닥 머리카락의 DNA가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뼈의 DNA와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유해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아 아래턱 부분은 소실된 상태였으며, 뼈의 상태 조사 결과 약 70세가량 노인의 것으로 확인되어 사망 당시 나이와 일치했습니다.

2010

2010.05 사후 467년

[재안장식 거행]

사망 약 500년 만에 폴란드에서 장례식이 다시 치러졌습니다.

폴란드 국민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를 국민적 영웅으로 기리며 최고의 예우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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