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노벨
과학자, 발명가, 산업가, 자선가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0- 23:37:44
알프레드 노벨은 스웨덴의 선구적인 과학자이자 산업가 그리고 발명가입니다. 그는 세계 최초의 고체 폭탄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며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평생 355개의 특허를 보유하는 등 과학과 공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특히 그의 유언에 따라 인류에 가장 큰 혜택을 준 이들을 기리는 세계적 권위의 노벨상이 제정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강력한 무기를 만든 발명가이면서도 평화와 학술 발전을 염원했던 역설적인 인물로 기억됩니다.
1833
[알프레드 노벨의 탄생]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재주 많은 건축 기술자이자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화학과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6개 국어에 능통했다.
1837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
가정의 빈궁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여 아버지가 기계 공장을 설립했다.
1850
[파리 유학 중 나이트로글리세린 접촉]
화학자 니콜라이 지닌과 연구 후 파리로 가서 아스카니오 소브레로를 만났고,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이트로글리세린의 상업적 활용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51
[미국 유학 및 철갑선 설계자 존 에릭슨과의 인연]
18세에 1년 동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남북전쟁에 사용된 철갑선 USS 모니터를 설계한 존 에릭슨 밑에서 잠시 일했다.
1857
1859
[스웨덴 귀국 및 나이트로글리세린 연구 집중]
아버지의 공장 파산 후, 스웨덴으로 돌아와 나이트로글리세린의 안전한 제조 및 사용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1863
[공장 폭발 사고로 남동생 에밀 사망]
스톡홀름 공장에서 나이트로글리세린 창고가 폭발하여 남동생 에밀을 포함한 5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로 노벨은 폭발물 제조 면허를 박탈당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 노벨은 빈테르비켄에 새로운 회사(Nitroglycerin AB)를 설립하고 외딴 지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864
[공장 폭발 사고로 남동생 에밀 사망]
스톡홀름 공장에서 나이트로글리세린 창고가 폭발하여 남동생 에밀을 포함한 5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로 노벨은 폭발물 제조 면허를 박탈당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 노벨은 빈테르비켄에 새로운 회사(Nitroglycerin AB)를 설립하고 외딴 지역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865
[개량된 폭파 캡 설계]
1863년에 발명한 뇌관을 개량하여 폭파 캡(blasting cap)을 설계함으로써 폭발물 사용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높였다.
1867
[혁신적인 다이너마이트 발명 및 특허 등록]
불안정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와 결합하여 취급이 더 쉽고 안전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특허를 등록했다.
이는 그리스어 '힘(뒤나미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발명은 국제적으로 광산 개발과 교통망 건설에 널리 사용되며 폭발물 사용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노벨은 처음에 '노벨 안전 화약'으로 명명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이 발명은 그의 명성을 회복하고 사업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1875
[다이너마이트보다 강력한 젤리그나이트 발명]
다이너마이트보다 더 안정적이고 강력한 투명한 젤리 같은 물질인 '젤리그나이트'를 발명하고 특허를 받았다.
이 폭약은 질산칼륨 등과 결합하여 개량되었고, 운반 및 사용이 용이하여 표준 채굴 기술로 채택되며 노벨에게 큰 재정적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1884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회원으로 선출]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기관은 후에 노벨상의 물리학, 화학 부문 수상자를 선정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1887
[현대 무연화약의 전신, 발리스타이트 발명]
무연화약의 일종이자 코다이트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고 특허를 받았다.
이는 로켓 추진제로도 사용된다.
1888
[형 루드비그 사망 오보, '죽음의 상인' 기사에 충격]
형 루드비그의 사망 소식이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으로 오보되면서 한 프랑스 신문이 그를 '죽음의 상인'으로 비난하는 부고를 게재했다.
'알프레드 노벨 박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을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찾아 부유해졌고, 어제 사망했다'는 기사를 읽고 노벨은 자신이 이런 식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이 노벨상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실증되지 않는다고 본다.
1892
[평화상의 영감, 베르타 폰 주트너와의 교류]
노벨은 《무기 내려놓으라(1889)》의 저자 베르타 폰 주트너 백작 부인과 1892년부터 1896년까지 서신을 교환하며 평화상 제정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평생 독신이었던 노벨에게 그녀는 단순한 지인을 넘어 평화주의 사상의 영감을 불어넣은 원천이었습니다.
과거 노벨의 비서로 잠시 일했던 인연이 있는 주트너는 편지를 통해 전쟁 반대와 평화 운동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설득했습니다. 이러한 교류는 다이너마이트 발명가인 노벨이 유언장에 '평화상' 부문을 포함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주트너 본인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05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1893
[웁살라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수여]
스웨덴의 유서 깊은 웁살라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으며 학술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1895
[노벨상 제정을 위한 유언장에 최종 서명]
파리의 스웨덴-노르웨이 클럽에서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국적에 관계없이 매년 '인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준' 사람들을 시상할 노벨상 설립에 사용하도록 지정하는 유언장에 최종 서명했다.
세금과 개인 유산을 제외한 총 자산의 94%에 해당하는 3,122만 5,000 스웨덴 크로나를 다섯 개 부문의 노벨상 기금으로 할당했다. 2022년 기준 노벨 재단은 약 60억 스웨덴 크로나의 투자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1896
노벨은 역설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로 기억되며, 강력한 폭탄을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기여한 지적인 업적에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을 제정했다.
1901
[세계적 권위의 노벨상 제정 및 첫 시상]
노벨의 유언에 따라 왕립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된 유산으로 노벨상 제도가 신설되어 첫 시상이 시작되었다.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부문으로 시작되었으며, 국적과 성별에 관계없이 해당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공로자에게 매년 수여된다. (경제학상은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 기부로 신설)
1968
[스웨덴 중앙은행 기부로 알프레드 노벨 기념 경제학상 신설]
스웨덴 중앙은행이 설립 300주년을 기념하여 노벨 재단에 기부금을 내어 '알프레드 노벨 기념 경제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여섯 번째 상이 제정되었다.
이 상은 진정한 '노벨상'으로 인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