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제학자, 거시경제학자,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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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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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경제사의 흐름을 바꾼 거장 존 메이너드 케인스! 그는 기존 경제학의 틀을 깨고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하며 케인스 경제학을 탄생시켰습니다. 특히 대공황 시기 경기 침체 해결을 위한 유효수요 이론은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죠. 한때 주춤했던 그의 사상은 금융 위기 때 다시금 주목받으며 시대를 초월한 통찰력을 증명했습니다. 오늘날 거시경제학의 기반을 다진 이 혁명적인 경제학자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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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존 메이너드 케인스 탄생]

영국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저명한 경제학자였고, 어머니는 지역 사회개혁가였습니다.

타고난 지성과 부모님의 지지 속에서 그는 미래를 위한 탄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1897

[이튼 칼리지 입학 및 학문적 재능 발현]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을 보인 케인스는 명문 이튼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수학, 고전, 역사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드러냈으며, 훗날 영국 수상이 될 해럴드 맥밀런과 첫사랑을 경험하는 등 다채로운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1902

[케임브리지 대학교 입학 및 경제학자의 길 선택]

수학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철학에 깊은 흥미를 느꼈지만,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였던 알프레드 마셜의 권유로 경제학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는 훗날 세계 경제학의 흐름을 바꿀 위대한 선택이었습니다.

케인스는 케임브리지에서 뛰어난 학생들이 모인 비밀결사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지적인 교류를 활발히 이어갔습니다. 졸업 후에도 이 모임에 대한 유대감을 평생 유지했습니다.

1906

[영국 경제학계의 떠오르는 별]

대학 졸업 후 잠시 인도성에서 근무했으나, 이내 대학으로 돌아와 금융론을 강의하며 학문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약 20년간 알프레드 마셜의 후계자이자 아서 세실 피구와 더불어 케임브리지 학파의 쌍벽을 이루며 영국 경제학계의 핵심 인물로 빠르게 부상했습니다.

또한 로열 이코노믹 소사이어티 서기, 이코노믹 저널 편집자로서 잡지를 세계적인 권위지로 만들며 그의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1917

[바스 훈장 수훈]

국가에 대한 그의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의 권위 있는 바스 훈장 3등급(CB)을 수훈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영예를 넘어, 학자로서 그의 위상이 공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1918

[낡은 경제 이론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통찰의 시작]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경제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 및 생산 수준 문제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전통적인 자유방임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경제 원리를 탐구하며, 훗날 '케인스 혁명'이라 불릴 이론적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1936

[경제학의 혁명, 『일반이론』 출간]

경제학사에 길이 남을 그의 대표작,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통칭 『일반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기존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경기 침체 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유효수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현대 거시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이는 '케인스 혁명'의 정점이었죠.

이 책은 불황과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정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경제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당시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혁명적인 이론으로, 이후 세계 각국의 경제 정책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9

[케인스 이론, 전 세계 정책의 핵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의 경제 정책은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선진 서양 국가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채택되기 시작했습니다.

불황을 극복하고 완전 고용을 지향하는 케인스의 사상은 격변하는 세계에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하며 그 중요성을 입증했습니다.

1942

[남작 작위 서임]

경제학계와 국가에 대한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서식스 주 틸튼의 제1대 케인스 남작'으로 서임되며 영국 귀족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학자로서 그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영예로운 순간이었습니다.

1946

[존 메이너드 케인스 서거]

20세기 경제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혁명적인 사상가가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케인스 경제학'은 이후 수십 년간 세계 경제 정책의 주류를 이루며 영원히 살아 숨 쉬게 됩니다.

1950

[케인스 경제학의 황금기 도래]

케인스의 서거 후에도 그의 사상과 이론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서양 대부분의 국가에서 경제 정책의 핵심 기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는 케인스 경제학의 '황금기'로 불립니다.

1970

[신자유주의의 부상과 케인스 학파의 도전]

1970년대 석유 파동 등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대안으로 부각되며 케인스 학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그의 사상은 여전히 관료 사회에서 주류적 위치를 유지했습니다.

2007

[글로벌 금융 위기와 케인스 경제학의 화려한 재조명]

2007~2010년 글로벌 금융 위기 사태가 전 세계를 강타하며 신자유주의 노선이 한계에 부딪히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스 경제학이 다시 한번 강력한 해법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통찰력은 시대를 초월하여 다시 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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