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

계몽주의 철학자, 작가,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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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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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철학자, 작가, 역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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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사상가. 종교적 광신주의와 전제정치에 맞서 싸우며 관용과 자유를 주장. 신랄한 비판 정신과 유머로 시대의 부조리를 풍자. 『캉디드』 『철학서간』 등 다수의 대표작을 남김.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평민 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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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

[볼테르, 파리에서 출생]

프랑스 계몽주의의 거장 프랑수아마리 아루에가 파리의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볼테르'라는 필명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 철학자이자 작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본명은 프랑수아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이며, '볼테르(Voltaire)'는 그의 필명입니다. 공증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는 루이 르그랑 학교에 입학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704

[루이 르그랑 학교 입학 및 문학 살롱 출입]

10세에 예수회 운영 루이 르그랑 학교에 입학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12세에는 쾌락주의적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 문학 살롱에 드나들며 문학적 재능을 키웠습니다.

열 살에 예수회가 운영하던 루이 르그랑(Louis le Grand) 학교에 들어가,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냈고 평생 이어갈 교우관계 또한 형성했습니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대부인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쾌락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귀족들과 시인들이 모이는 ‘탕플(Temple)’이라는 문학 살롱에 데리고 갔습니다.

1711

[문학의 길 선언과 법학 공부 병행]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 문인의 꿈을 밝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법학대학에 등록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탕플' 문학 살롱을 드나들며 사치와 문학을 동경했습니다.

17세에 루이 르그랑 학교를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문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이에 반대하며 법조계를 택하라고 강경하게 권합니다. 그래서 법학 대학에 등록은 하지만 탕플을 계속 드나들면서 사치와 방탕을 선망했습니다.

1717

[오를레앙 공작 풍자 오인으로 바스티유 투옥]

루이 15세 섭정 오를레앙 공작을 풍자한 시를 썼다고 오인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에게 불평등과 전제정치의 악폐를 처음으로 통감하게 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1717년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를 풍자한 시를 썼다고 오인돼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것이 불평등과 전제정치에 관해서 그가 겪은 첫 경험이 됩니다.

1718

[《오이디푸스》 대성공, 필명 '볼테르' 사용 시작]

투옥 후 출옥하여 비극 《오이디푸스》로 대성공을 거두며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때 평민의 성 '아루에'를 버리고 '드 볼테르 씨'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출옥 후 비극 《오이디푸스》(Oedipus, 1718)의 대성공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또한 궁정에서도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는 '아루에(Arouet)'라는 평민의 성을 버리고 '아루에 2세(Arouet Lejeune)'의 글자 순서를 바꾸어 자칭 '드 볼테르 씨(M. de Voltaire)'가 되었습니다.

1726

[로앙 사건과 영국 망명, 계몽사상의 심화]

슈발리에 드 로앙의 하인들에게 폭행당하고 친구들의 무관심에 분노, 결투를 요구했다가 바스티유에 재투옥됩니다.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로크와 뉴턴의 영향을 받아 비판정신을 강화했습니다.

어느 날 슈발리에 드 로앙이 하인들을 시켜서 그를 곤봉으로 후려치게 합니다. 자신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만류하거나 옹호하기보다 재미있어하자 그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는 슈발리에에게 결투를 요구했지만 이 불손한 행위로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으로 건너간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이러한 것이 불평등과 전제정치에 관해서 그가 겪은 첫 경험이 됩니다. 전제정치의 악폐를 통감한 그는 자유로운 영국에 공감하며 존 로크와 아이작 뉴턴의 영향을 받아 비판정신은 더욱 강고히 되었습니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서사시 《라 앙리아드》(La Henriade, 1728)를 출판했습니다. 이 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간 종교 전쟁을 다루며 광신의 무서움을 고발하고 프랑스의 정치 체제를 비판했습니다.

1729

[프랑스 귀국 및 비극 《자이르》 발표]

영국 망명 후 프랑스로 귀국한 볼테르는 셰익스피어 연극의 영향을 받은 비극 《자이르》를 발표하며 다시금 문학적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1729년 프랑스로 귀국했지만 윌리엄 셰익스피어 연극의 영향이 짙은 비극 《자이르》(Zaïre, 1732)를 발표했습니다.

1733

[《철학서간》 출판과 프랑스 비방 논란, 은둔]

영국 찬미와 프랑스 비방으로 논란이 된 《철학서간》을 발표하며 당국의 노여움을 샀습니다.

이로 인해 책은 불태워지고, 애인 샤틀레 후작부인의 영지에서 10년간 저술과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철학서간》(Lettres philosophiques sur les Anglais,1733)은 런던 망명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의 자유로운 정치, 종교, 철학, 문학을 찬미하고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전제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한 책입니다. 특히 '왕에 저항하여 국왕의 권력을 규제하고 백성들이 혼란 없이 정치에 참여하는 지혜로운 정부를 수립했던' 영국을 찬미하는 구절은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751

[프랑스 궁정 역사 편찬관 및 프리드리히 2세 초청, 《루이 14세의 시대》 완성]

한때 프랑스 궁정의 역사 편찬관을 지냈으며, 이후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 국왕의 초청을 받아 프로이센으로 건너가 명작 《루이 14세의 시대》를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루이 14세 시대의 정치, 군사, 내정, 문화, 종교를 다룬 방대한 역사서로, 볼테르를 프랑스 근대 역사가의 진정한 선구자로 평가받게 했습니다.

《루이 14세의 시대》(Le Siècle de Louis XIV, 1751)는 루이 14세의 만년을 목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묻고 미간행 수기 및 인쇄된 2백 권의 회상록을 조사하는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이 책은 정치·군사, 내정, 종교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루이 14세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명합니다.

1753

[페르네 정착과 '페르네 장로'로서의 전성기]

제네바를 거쳐 프랑스령 페르네에 정착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시, 극시,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하며 전 유럽에 '볼테르 시대'를 열었고, '페르네 장로'로 불리며 반봉건, 반가톨릭 캠페인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수년간을 제네바에서 보내다가 1753년 프랑스령으로 제네바와 가까운 페르네에 정주하며 시·극시·우화·소설·수필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작품을 발표하여 전 유럽에 '볼테르 시대'를 이룩하였습니다. 진보파의 영수로서 '페르네 장로'라 불렸고 반 봉건, 반 가톨릭 교회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1759

[세계적 베스트셀러 《캉디드》 출간과 부의 축적]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풍자 소설 《캉디드》를 익명으로 출간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시기 복권, 주식 투기 등으로 막대한 재산을 늘려 페르니 성을 구입, 생애 마지막 20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평민 중 한 명이었습니다.

페르네 시기에 사상소설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 1759)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재미 삼아 쓰고 익명으로 출간한 콩트들 중 오늘날까지 매우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볼테르는 복권과 주식 투기, 국제 무역과 대부업으로 재산을 늘여 1759년 페르니 성을 구입하여 생애 마지막 20년을 이 성에서 살았습니다. 지주였던 그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땅에 마을이 들어서도록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그가 사망할쯤 그의 연간 세수입은 매우 커져서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20대 영주에 들었습니다. 그는 당대 가장 유명한 문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평민이기도 하였습니다.

1763

[칼라스 사건 변호 및 《관용론》 출판, 관용의 상징으로 자리매김]

종교적 광신으로 인한 부정 재판의 희생자 '칼라스 사건'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사재를 털어 도왔습니다.

그 결과물인 《관용론》을 출판하여 "불관용은 신의 법도 아니다"라며 종교적 관용을 강력히 주장, 오늘날까지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종교적 광신주의에 맞서 평생 투쟁했던 그는 관용 정신이 없이는 인류의 발전도 문명의 진보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70세에 가까웠을 때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자들을 변호하고 돕는 활동들을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벌여서 오늘날까지도 관용의 상징적 인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에서 "불관용은 신의 법도 아니다. 그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순교자가 될지언정 망나니가 되지 말라"고 말하며 종교의 관용을 주장했습니다.

1767

[사회 풍자 소설 《랭제뉘》 출간과 검열]

당대 프랑스 사회와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은 소설 《랭제뉘》를 익명으로 출간했습니다.

경찰에 의해 즉각 회수되었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을 다루었으며, 이는 왕의 봉인장 제도 등 정치적 비판에 대한 볼테르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랭제뉘』(L'Ingénu)는 1767년 봄에 집필되고 7월에 인쇄되어 8월에 제네바에서 익명으로 먼저 출간되고 이어서 파리에서도 출간되었으나, 파리에서는 경찰에 의해 즉각 회수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종교적 갈등 상황을 묘사하면서 장세니스트들과 예수회 양쪽 모두를 포함해 가톨릭교회 전체를 비난하고 있으며, 왕의 봉인장 제도 및 궁정인들의 도덕적 타락, 군대 계급이나 행정직 매매 제도 등 정치적인 비판도 담고 있습니다. 볼테르 자신도 봉인장 제도의 희생자가 되어 두 차례나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1778

[볼테르, 84세 나이로 파리에서 사망]

철학자이자 작가,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비록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사상은 혁명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집필에도 참여하는 등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평생 왕성한 활동을 벌인 볼테르는 84세까지 장수를 누렸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보지 못하고 1778년 5월 30일에 죽었습니다.

1791

[국가적 영광, 팡테옹에 안치]

사후 13년 뒤인 1791년,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안치되는 프랑스 팡테옹에 옮겨져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가 프랑스 역사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상징합니다.

1791년에는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들어가는 팡테옹에 안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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