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쿡
탐험가, 항해사, 지도 제작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14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 항해사 지도 제작자. 평민 출신으로 영국 해군 대령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태평양을 일곱 차례 항해하며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과 하와이 제도를 발견. 뉴펀들랜드와 뉴질랜드의 정교한 해도를 제작하는 데 크게 기여. 세계 최초로 괴혈병 사망자 없이 세계 일주를 달성하는 의학적 위업을 세움. 대항해 시대의 종언을 알리고 식민주의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을 연 역사적 인물.
1728
[위대한 항해자의 탄생]
영국 요크셔주 마턴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제임스 쿡은 훗날 세계를 바꿀 위대한 탐험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1736
[새로운 시작과 학문의 기회]
아버지가 농장 감독직을 얻어 그레이트 아이톤으로 이사했으며, 쿡은 아버지 고용주의 지원으로 학교 교육을 받으며 지식의 첫걸음을 떼었다.
1745
[바다에 매료되다]
16세에 집을 떠나 어촌 스테이테스 잡화점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상점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에 매혹되며 그의 운명을 예감했다.
1747
[항해술을 배우다]
잡화점 생활을 접고 인근 항구 도시 위토비의 워커 형제 해운사에서 견습 선원으로 일하며 대수학, 삼각 측량, 항해술, 천문학 등 필수적인 해상 지식을 익혔다.
1755
[상선에서 해군으로, 빠르게 승진하다]
발트해 무역선에서 경력을 쌓아 1752년 항해사가 되었고, 1755년에는 항해장이 되었다.
더 빠른 경력 발전을 위해 영국 해군에 자원입대, 말단에서 시작했지만 2년 만에 함선 조종 시험에 합격하며 빠르게 항해장으로 승진했다.
1759
[퀘벡 포위전의 숨은 영웅]
7년 전쟁 중 퀘벡 포위전에 참가하여 세인트로렌스강 하구 측량 및 해도 작성으로 울프 장군의 기습 상륙 작전에 크게 기여하며 탁월한 지리 조사 및 해도 작성 재능을 발휘했다.
1762
[늦은 나이, 사랑을 만나다]
34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13살 연하의 엘리자베스 바츠와 결혼하여 런던 이스트 엔드에 육상 거주지를 마련하고 여섯 자녀를 두었다.
1763
[뉴펀들랜드 해도의 대가]
1760년대 5년간 뉴펀들랜드의 복잡한 해안선 지도를 작성하며 대규모의 정확한 지도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뛰어난 능력이 영국 해군성과 왕립 학회의 주목을 받았다.
쿡은 1763년과 1764년에 북서부, 1765년과 1766년에는 브린 반도와 레이 케이프 사이의 남해안, 1767년에는 서해안을 측량하며 실지 조사에 정통할 기회를 얻었다.
1768
[첫 번째 위대한 항해, 금성 관측을 향해]
왕립 학회에 의해 금성 일면통과 관측 임무를 띠고 남태평양으로 파견되었다.
해군 대위로 임명된 그는 인데버 호를 지휘하여 영국을 출발, 1769년 4월 13일 타히티에 도착해 천체 관측소를 세웠다.
비엘리트 출신의 대위 승진은 이례적이었다.
관측은 1769년 6월 3일에 이루어졌으나, 장비의 한계로 오차 범위가 예상보다 컸다. 관측 결과는 다른 장소의 결과와 비교 검토되었으나 정확한 관측 결과는 얻지 못했다.
1769
[전설의 남방 대륙과 뉴질랜드의 발견]
금성 관측 임무를 마친 후, 해군성의 비밀 지령에 따라 전설의 남방 대륙 '테라 아우스트랄리스'를 찾아 남태평양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타히티인 '트우파이아'의 도움을 받아 유럽인으로는 사상 두 번째로 뉴질랜드에 도달, 거의 완벽한 해도를 제작하고 쿡 해협을 발견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770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 최초 발견]
서쪽으로 항로를 잡고 전설의 남방 대륙 일부를 확인하려던 인데버 호는 폭풍으로 북쪽으로 흘러 1770년 4월 20일 '힉스곶'으로 명명한 육지를 목격하며 유럽인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동해안에 도달했다.
1770년 4월 29일, 현재 커널 반도로 알려진 곳에 처음 상륙했으며, 이곳은 후에 채집된 귀중한 식물 표본을 기념하여 '보태니만'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이곳은 죄수 정착촌 후보지로 선전되었으나, 아서 필립 함장이 1788년 시드니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대륙의 영유권을 선언하다]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에 좌초되어 7주간 수리를 하는 동안 원주민과 평화롭게 교류했으며, 수리 후 케이프 요크 반도를 지나 호주와 뉴기니가 분리된 섬임을 확인했다.
1770년 8월 22일 '포제션섬'에 상륙,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영국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1771
[세계 최초, 괴혈병 없는 세계 일주 성공 및 귀환]
세계 최초로 첫 번째 항해에서 단 한 명의 선원도 괴혈병으로 잃지 않는 기적적인 성과를 달성했다.
쿡은 영국의 해군 규정에 따라 감귤류와 자우어크라우트를 부하들에게 지혜롭게 권장하며 이를 섭취하게 했다.
이 위업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에서는 말라리아와 이질이 창궐하여 많은 선원이 사망했지만, 인데버 호는 1771년 6월 12일 영국에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바타비아 도착 전까지 27개월 항해에서 사망자는 8명에 불과했으나, 바타비아 체류 10주 및 케이프 타운까지 11주 동안 무려 31명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쿡이 귀국 후 항해 일지가 출판되어 과학계에서도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1772
[남방 대륙의 진실을 찾아서]
첫 항해 귀환 후 해군 중령으로 승진한 쿡은 왕립 학회의 명을 받아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 전설의 남방 대륙 '테라 아우스트랄리스'를 찾기 위해 두 번째 항해를 떠났다.
그는 리솔루션 호를, 토바이아스 퍼노우는 어드벤쳐 호를 지휘했다.
1773
[유럽인 최초, 남극권에 발을 딛다]
아프리카 대륙 남단을 돌아 극히 고위도 지역을 일주하던 일행은 1773년 1월 17일,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남극권에 진입하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다.
이는 50년 후에야 다시 이루어질 만큼 어려운 도전이었다.
1774
[전설 속 대륙의 종지부]
남위 71도 10분까지 도달하는 등 탐험을 계속하며 남극 대륙을 발견했지만, 인류가 거주 가능한 위도에는 남방 대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전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돌아오는 항해에서 통가, 이스터섬, 뉴칼레도니아, 바누아투 등을 방문했으며, 남아메리카 남단을 돌아 사우스 조지아 및 샌드위치 제도를 발견했다. 이 항해에서 크로노미터를 활용하여 정확한 경도를 결정한 것도 큰 업적이었다.
1776
[명예로운 직위, 그러나 다시 바다로]
귀국 후 해군 대령으로 승진하고 그리니치 해군 병원 원장이라는 명예직을 받았으며, 괴혈병 예방 공로로 왕립 학회에서 메달과 특별 회원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쿡은 바다를 향한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필 항해 기록을 마친 직후 세 번째 항해를 준비했다.
1778
[유럽인 최초, 하와이 제도를 발견하다]
북서 항로 탐색을 공식 목표로 한 세 번째 항해에서 다시 리솔루션 호를 지휘한 쿡은 1778년 하와이 제도를 방문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그는 이 제도를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 '샌드위치 제도'라 명명했다.
이후 북아메리카 서해안으로 향하여 밴쿠버 아일랜드 인근까지 탐사하고, 캘리포니아에서 베링 해협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해도를 제작했다. 단 한 번의 항해로 북미 북서부 해안의 대부분을 파악하며 서구 탐험의 공백을 메웠다. 여러 차례 베링 해협을 통과하려 시도했으나, 범선으로 겨울철 항해는 불가능하여 더 북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779
[위대한 항해자의 최후]
세 번째 항해 중 하와이섬 케알라카쿠아만에서 원주민과의 충돌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위대한 대항해 시대의 사실상 마지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