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피사로
스페인 정복자, 잉카 정복자, 식민지 개척자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5:10
- 스페인의 전설적인 콩키스타도르. -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 - 사생아 출신 문맹이었으나 신대륙에서 거대한 제국을 세움. - 황금을 향한 끝없는 집념과 냉혹함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결국 암살당함.
1471
[프란시스코 피사로 출생]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트루히요에서 육군 장교 아버지와 도시 빈민층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6촌 지간이다.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트루히요에서 육군 장교 아버지와 도시 빈민층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며,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6촌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략 1470년대 정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문맹으로 살았다.
1509
[신대륙 첫 항해와 식민지 개척 포기]
알론소 데 오제다가 이끄는 선단에 합류하여 신대륙, 현재의 콜롬비아 지역으로 항해했다. 그곳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려 했으나, 기후와 질병 문제로 사업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알론소 데 오제다가 이끄는 선단에 합류하여 현재 콜롬비아로 항해했고, 그 곳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려 하였으나, 기후와 질병 등으로 인해 결국 식민지 사업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후, 한동안 거리를 전전했다.
1513
[태평양 최초 목격 및 관리직 임명]
바스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바라본 유럽인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모험을 통해 식민지 총독과 가까워졌고, 원주민들과 가축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바스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바라본 유럽인들 중 한 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모험을 통하여 식민지의 총독과 가까운 사이가 되게 되었고, 같은 해에 그는 원주민들과 가축들을 관리하는 직을 맡게 되었다.
1519
[발보아 체포와 파나마 시장 취임]
총독의 명을 받아 발보아를 체포하여 데려왔고, 발보아는 사형당했다. 피사로는 총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당시 막 지어지고 있던 파나마시티의 시장직과 행정관 자리에 올랐다.
총독이 발보아를 점차 싫어하게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겠다는 계획을 짠 후, 그는 피사로에게 발보아를 직접 체포하여 데려오라고 명한다. 피사로는 그를 그대로 체포하여 끌어왔고, 발보아는 1519년 1월에 사형당한다. 한편 피사로는 총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당시 막 지어지고 있던 파나마시티의 시장직과 행정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된다.
1524
[황금의 나라를 찾아 첫 남미 원정]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첫 원정대를 꾸려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으나, 고질적인 기후 문제와 향토병 때문에 후퇴해야 했다.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피사로에게 큰 관심을 갖게 했고, 그는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그는 1524년에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지만, 고질적인 기후 문제와 향토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만 했다.
1526
[두 번째 남미 원정 및 모험 지속]
황금의 나라를 찾아 두 번째 원정대를 조직하여 남아메리카로 향했지만, 다시 한번 기후와 향토병 문제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파나마 총독의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모험을 계속했다.
그는 1526년에 두 번째 원정대를 만들어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는데, 고질적인 기후 문제와 향토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나마의 총독은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지만, 피사로는 이를 거부했고 모험을 계속해나갔다.
1528
[북부 페루 진출과 황금 발견]
끊임없이 남하하여 북부 페루 지방까지 진출하여 그곳의 원주민들과 황금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세 번째 원정을 계획하는 열망을 심어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남하했고, 1528년 4월에 북부 페루 지방까지 진출하여 그 곳의 원주민들과 황금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그에게 세 번째 원정을 나서겠다는 열망을 심어주었다.
1530
[스페인 국왕의 지원 확보 및 파나마 출발]
스페인으로 돌아가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직접 설득하여, 지원부대와 점령하는 땅에 대한 지배권까지 얻었다. 가족과 친구들을 모아 파나마를 떠났다.
파나마로 돌아가 총독에게 지원과 새로운 원정단 조직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향해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직접 설득하려 나선다. 그의 계획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는 지원부대 뿐만 아니라 그가 점령하는 땅에 대한 지배권까지도 일부 손에 넣게 된다. 그는 이후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모두 불러모은 후 1530년에 파나마를 떠난다.
1532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 포로로 잡다]
잉카 제국 영토로 들어가 황제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잡았다. 이는 잉카 제국 정복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해안가에는 호전적이거나 이방인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사로와 그 일행은 내륙을 통해 점차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그는 결국 잉카 제국이 다스리던 영토까지 들어가게 되고, 당시 잉카 제국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는 피사로가 그의 영토에 감히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1532년 11월에 피사로 일행에 의해 포로로 잡히게 되며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1533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 처형]
방에 가득 들어찰 만큼의 황금을 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살려줄 것을 빌었던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결국 사형시켰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방에 가득 들어찰만큼의 황금을 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살려줄 것을 빌었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으나 1533년에 피사로에 의해 사형당하고 만다.
1535
1535년 1월에 그는 현재 페루의 수도 리마를 세웠으며 이를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했다.
1540
피사로는 그와 함께 잉카 정복에 나섰던 일행 중 하나인 디에고 알마그로와 내분이 일어나게 되면서 결국 전투까지 치르게 되고, 여기서 패배한 디에고 알마그로는 포로로 잡혀 사형당했다.
1541
[프란시스코 피사로 암살]
알마그로의 아들이 앙심을 품고 리마에서 피사로를 살해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끝났다. 그의 유해는 리마 대성당에 묻혔다.
디에고 알마그로의 아들이 앙심을 품고 1541년 6월에 피사로를 리마에서 살해함으로서 파란만장했던 생애도 끝나게 된다. 그의 유해는 리마 대성당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