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수호성인, 여군, 군인, 순교자, 영웅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05:00:05
• 프랑스 백년 전쟁의 상징이자 수호성인. • 천사의 계시를 받아 프랑스군을 이끌고 오를레앙 포위전 등 승리 견인. • 샤를 7세의 대관식을 성사시키며 프랑스 왕실의 정통성 확보에 기여. • 부르고뉴 군에 생포돼 잉글랜드에 넘겨진 후 마녀 재판에서 화형 당함. • 사후 명예 회복과 시성을 통해 역사상 유례없는 인물로 기록됨.
1412
[잔 다르크 탄생]
프랑스 북동부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농사 외에도 마을의 말단 관리로 세금 징수와 치안을 담당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동부의 바 공작령(오늘날의 로렌 주)에 있는 작은 마을 동레미(오늘날의 동레미라퓌셀)에서 자크 다르크와 이사벨 루미의 딸로 태어났다. 잔 다르크의 부모는 약 50에이커(20헥타르) 정도 되는 땅을 소유하였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농사 외에도 마을의 말단 관리로써 세금 징수와 치안을 담당하였다. 당시 동레미가 있는 지역은 부르고뉴파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프랑스 왕가에 대해 변함없이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1425
[천사의 계시를 받다]
13세 때 홀로 들판에서 성 미카엘,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로부터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데려가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그녀는 그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잔 다르크는 그녀의 나이 13세 때인 1425년에 환시를 체험하였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는 들판에 혼자 있었는데 대천사 미카엘과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그리고 안티오키아의 마르가리타가 그녀 앞에 나타나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도팽 샤를을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데려가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떠나자 잔 다르크는 눈물을 흘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 도서관 사본에는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군에 붙잡혀 마녀 재판을 받을 당시 기록에 다음과 같은 잔 다르크의 진술 내용이 씌어 있다. "13세 때 동레미에 있는 아버지 집 정원에서 나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성당이 있는 오른쪽에서 굉장한 광휘에 휩싸여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맨 처음에는 겁을 먹었으나, 나는 곧 그것이 여태껏 내 주위에서 나를 따라다니며 지시를 내려주던 천사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그는 성 미카엘이었다. 나는 성녀 가타리나와 성녀 마르가리타 역시 보았는데, 그들은 나에게 말을 걸고 훈계하며 내가 취할 행동을 알려주었다. 나는 어느 것이 어떤 성인의 말인지 쉽사리 분간해낼 수 있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의 경우 그들은 광휘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다정했다. 그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들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지금도 그들을 보고 있다."
1428
[프랑스 왕실 방문 시도]
16세 때 동레미 인근 보쿨뢰르의 프랑스군 경비대 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를 찾아가 시농에 피신해 있는 도팽 샤를 7세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무시당했으나, 지속적인 열정으로 로베르의 휘하 장군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16세 때, 잔 다르크는 친척 듀랑에게 동레미 인근의 보쿨뢰르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였다. 보쿨뢰르에 간 잔 다르크는 그곳에서 프랑스군 경비대 대장을 맡고 있던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에게 가서 시농에 피신해 있는 프랑스 궁정을 방문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로베르는 잔 다르크를 그냥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찾아와 요청하였으며, 이를 로베르 휘하에 있던 장 드 메츠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가 눈여겨보게 된다. 이들의 지지를 받아 잔 다르크는 로베르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자신에게 오를레앙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묘책이 있다고 말하였다.
1429
[도팽 샤를 7세 알현]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의 도움으로 남장한 채 시농 성에 도착, 도팽 샤를 7세를 알현하였다.
샤를 7세는 잔의 의지에 감탄하여 그녀의 도덕심과 신뢰를 얻었고, 잔은 그에게 기사가 착용하는 갑옷과 무기는 물론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지휘권을 요청하였다.
로베르 드 보드리코르는 지속적인 잔 다르크의 열정에 감동하여 결국 그녀에게 호위를 붙여 시농으로 갈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잔 다르크는 남장을 하고 적대 세력인 부르고뉴 영토를 가로질러 시농 성으로 갔다. 시농에 있는 프랑스 궁정에 도착한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 7세를 알현하였다. 반신반의하던 도팽은 잔 다르크를 직접 만나본 후에 그녀의 도덕심과 의지에 감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팽은 과연 잔 다르크가 하느님이 보낸 사자인지를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옷을 시종에게 입혀 옥좌에 앉혀놓고 자기는 변장을 한 채 가신들 속에 섞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초라한 차림의 도팽 앞으로 다가가 경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한편, 도팽 샤를의 장모인 아라곤의 욜란다는 오를레앙을 구원하기 위한 원정대를 편성하기 위한 자금을 대주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도팽 샤를에게 자신에게 기사가 착용하는 갑옷과 무기는 물론 군대를 이끌 수 있는 지휘권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갑옷과 말, 칼, 깃발 등의 군사 원정 시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기증을 통해 어렵게 받았다.
[푸아티에 종교 심사 통과]
도팽 샤를 7세의 명령으로 푸아티에에서 종교적 심사를 받았다.
조사단은 잔 다르크가 '흠잡을 구석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겸손함과 정직함 그리고 소박함의 덕목을 갖추었다'고 보고했다.
그녀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는 발견되지 않아 하느님의 특별한 임무를 받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의견을 받았다.
샤를의 신하들은 잔 다르크가 이단자나 마녀가 아니라는 확증 없이 섣불리 그녀를 지지하며 도와주었다가는, 적들에게 악마 숭배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샤를은 잔 다르크에 대한 신원을 조사하는 한편 그녀의 신앙심과 도덕성 등을 알아보기 위해 푸아티에에서 종교적 심사를 할 것을 지시하였다. 1429년 4월 조사단은 잔 다르크가 ‘흠잡을 구석이 없는 인생을 살아왔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겸손함과 정직함 그리고 소박함의 덕목을 갖추었다’고 보고하였다. 푸아티에의 신학자들은 잔 다르크가 받았다고 주장한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녀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거룩한 임무를 받았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는 의견을 샤를에게 전달하였다. 이것만으로도 샤를에게는 충분하였지만, 신하들은 여전히 잔 다르크를 의심하며 신뢰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오를레앙에 도착]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오를레앙에 도착했으나, 오를레앙을 지키는 프랑스군 지휘관 장 도를레앙은 그녀를 전투 회의에서 배제하고 교전 사실을 알리지 않는 등 무시하기 일쑤였다.
1429년 4월 29일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군의 포위를 받은 오를레앙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오를레앙을 지키는 프랑스군 지휘관이었던 장 도를레앙은 그녀를 전투회의에서 배제시키고 적군과 교전할 때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등 무시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회의 및 전투에 참여하려고 노력하였다.
잔이 오기 전 5개월간의 포위 기간 중에 오를레앙을 방어하던 프랑스 군사들은 딱 한번 공격적으로 나섰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났었다. 그해 5월 4일 프랑스군은 생루 요새를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뒤이어 5월 5일에는 생장르블랑 요새로 진격하였다.
[생아구스탱 요새 탈환]
장 도를레앙의 전투 회피 명령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는 성내 주민과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게 하여 성 밖으로 나가 생아구스탱 요새를 성공적으로 탈환하였다.
다음날 잔 다르크는 참모회의에서 장 도를레앙의 의견에 반대하고, 적군을 재차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장 도를레앙은 전투를 피하기 위해 성문을 모두 걸어 잠그라고 지시하였지만, 잔 다르크는 성내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성주에게 가서 문을 열라고 요구하였다. 장군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잔 다르크는 군대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서 생아구스탱 요새를 탈환하였다.
[오를레앙의 영웅]
잉글랜드군의 주요 요새인 르투렐르 요새를 공격하여 오를레앙 포위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 중 목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남아 지휘를 이어가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녀의 활약은 프랑스에게 불리하던 백년 전쟁의 전세를 뒤엎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날 밤 오를레앙에서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참모회의에서 잔 다르크를 배제한 채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잔은 5월 7일에 잉글랜드군의 주요 요새인 르투렐르 요새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전투 도중에 목에 화살을 맞고서도 살아남아 전투를 지휘한 모습을 보고 그녀를 영웅으로 보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에서 크게 승전을 거두었다. 잉글랜드군은 기세가 오른 프랑스군이 파리나 노르망디를 재탈환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잔 다르크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불리하던 전세를 뒤엎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자제오를 탈환]
랭스 탈환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루아르 강 인근 교량을 확보하고자 자제오를을 탈환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잔 다르크는 이러한 자신의 계획을 도팽에게 설명하면서 알랑송 공작 장 2세와 더불어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주장은 굉장히 대담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랭스는 파리보다 약 두 배나 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적군의 영역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팽의 허락을 받은 잔은 군대를 이끌고 6월 12일에 자제오를을 탈환하였다.
도팽의 허락을 받은 잔은 군대를 이끌고 6월 15일에 멍서르와르를 탈환하였다.
[보장시 탈환]
루아르 강 인근의 보장시를 탈환하였다.
이전에는 잔을 못 미더워하던 장 도를레앙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도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도팽의 허락을 받은 잔은 군대를 이끌고 6월 17일에는 보장시를 탈환하였다. 처음에는 잔을 못미더워하던 장 도를레앙을 비롯한 다른 지휘관들도 오를레앙에서의 그녀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고 결국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로 선회하였다.
[파타이 전투 대승]
존 패스톨프 장군이 이끈 잉글랜드 구원군과의 파타이 전투에서 프랑스 선발대의 기습으로 잉글랜드 주력군을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거의 손실 없이 승리하며 백년 전쟁의 결정적인 흐름을 바꾸었다.
이 승리는 아쟁쿠르 전투와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성과였다.
6월 18일 존 패스톨프 장군이 이끈 구원군이 도착해서 잉글랜드 방어군에 합류하였다. 파타이 전투는 흡사 아쟁쿠르 전투와 비견될 수 있는데, 결말은 정반대였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수비 준비를 채마치기도 전에 프랑스 선발대가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잉글랜드군의 주요 전력이 모조리 분쇄되고 지휘관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힘으로써 잉글랜드의 패배로 끝나버렸다. 지원하러 온 존 패스톨프는 살아남은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달아나버렸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거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
[랭스 진격 시작]
프랑스군이 지앙수루아르에서 랭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진격로의 여러 도시들은 아무 저항 없이 프랑스 동맹에 복귀했다.
프랑스군은 6월 29일에 지앙수루아르에서 랭스로 진격하였으며, 7월 3일 부르고뉴파가 장악하던 오세르에게 조건부 항복을 받아냈다. 그리고 프랑스군의 행로에 있던 다른 도시들 역시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프랑스 동맹에 복귀하였다. 도팽 샤를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고 했던 조약 장소였던 트루아는 4일간 공격 없는 포위에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프랑스군의 행로에 있던 다른 도시들 역시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프랑스 동맹에 복귀하였다. 도팽 샤를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려고 했던 조약 장소였던 트루아는 4일간 공격 없는 포위에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7월 16일 랭스는 프랑스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샤를 7세 국왕 대관식 거행]
랭스 대성당에서 5년 동안 공석이었던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어 샤를 7세가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잔 다르크는 대관식에 참석하여 샤를 7세에게 무릎을 꿇고 "폐하, 이제 프랑스를 다스리는 진정한 국왕이 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도팽 샤를의 대관식은 다음날 아침 1429년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로써 5년 동안이나 공석이었던 프랑스 국왕이 탄생하였으며, 샤를 7세는 프랑스의 국왕으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대관식이 끝나자 잔 다르크는 샤를 7세 앞에 무릎을 꿇고 “폐하, 이제 프랑스를 다스리는 진정한 국왕이 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파리 공격]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의 적극적인 촉구로 프랑스군이 파리를 공격하였다.
잔은 적의 석궁 화살을 다리에 맞고도 지휘를 이어갔으나, 다음날 왕의 회군 명령을 받았다.
잔 다르크와 알랑송 공작은 이 기세를 몰아 신속하게 파리로 진군하자고 촉구하였지만, 프랑스 왕실은 전쟁보다는 부르고뉴파와의 협상을 통해 휴전을 맺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이를 역이용하여 파리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지연 술책으로 프랑스 왕실과 평화 협상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군은 파리 인근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항복들을 받아냈다. 8월 15일 베드포드 공작이 이끈 잉글랜드군이 프랑스군과 마주보며 대치하였다. 9월 8일에 프랑스군은 파리를 공격하였다. 잔은 적진의 석궁에서 날아온 화살을 다리에 맞고서도 끝까지 군대를 계속 지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녀는 회군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았다.
10월에 잔은 생피에르르무치를 탈환하고 귀족 작위를 받았다.
1430
[백성들에게 보내는 격려 편지]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에 불안해하는 도시 주민들에게 "제가 적군과 마주치는 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라며 안심하고 기다려 달라는 격려 편지를 쉴리에서 보냈다.
1430년 잔 다르크는 불안에 떨고 있는 도시 주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은 머지않아 도시가 잉글랜드군에게 포위될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을 저에게 편지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적군과 마주치는 한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적이 먼저 공격해 오면 성문을 굳게 닫고 제가 올 때까지 안심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설사 도시가 포위되더라도 반드시 적들을 격퇴하여 도시를 해방시킬 것입니다. 오늘 쉴리에서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만, 이 편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갈까 염려되어 이만 줄입니다."
[콩피에뉴 전투 중 생포되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는 콩피에뉴를 구원하러 나섰다가 마리니에서 격전 중 부르고뉴군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병사들을 피신시키고 홀로 남아 후방을 지키다 포로가 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았다.
11월과 12월에 라샤리테쉬르루아르에서 소규모 전투가 있고 나서, 이듬해 4월에 잔은 콩피에뉴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러 달려갔다. 1430년 5월 23일 잔은 마리니에 있는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사로잡혔다. 부르고뉴파에서 6천 명을 추가로 병력을 보내오자, 잔은 병사들에게 콩피에뉴 성으로 피신하라고 지시했고 자신은 전장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후퇴하는 병사들의 뒤를 지켰다. 부르고뉴군은 후방에서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막는 한편 잔 다르크를 철저하게 고립시킨 다음, 활을 쏴서 말에서 떨어뜨려 사로잡았다. 처음에 잔은 항복을 거부하였다.
[잉글랜드에 신병 인도 및 루앙 이감]
부르고뉴군에 생포된 잔 다르크의 신병을 잉글랜드가 1만 리브르를 지불하고 넘겨받아, 잉글랜드가 지배하던 루앙으로 이감되었다.
잉글랜드는 그녀를 마녀로 만들어 샤를 7세의 정통성을 훼손하려 했고, 교회 또한 잔의 존재를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샤를 7세는 그녀의 석방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잔다르크가 부르고뉴군에 생포되자 잉글랜드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녀의 신병인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잉글랜드는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몸값을 지불하면 포로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잉글랜드는 종교재판을 통해 잔을 마녀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게 되면 샤를 7세는 악마와 동맹을 맺고 마녀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되므로 권위와 정통성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 교회가 관심을 보인 이유는 잔다르크가 신과 직접 소통한다며 교회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샤를 7세는 잔다르크의 석방 혹은 구출에 대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샤를 7세는 훗날 역사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잔은 억류되어 있는 동안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였다. 베르망두아에 있을 때는 높이가 21미터나 되는 탑에서 해자로 뛰어내린 적도 있었는데, 결국 도로 붙잡혀 부르고뉴파에 속한 아라스로 끌려갔다. 이후 잉글랜드는 1만 리브르를 지불하고 부르고뉴로부터 잔 다르크의 신병을 넘겨받았고 1430년 12월에 그녀는 당시 잉글랜드가 지배하고있던 루앙으로 이감되었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간의 잔에 대한 거래에서 보베의 교구장이자 친잉글랜드파인 피에르 코숑 주교가 큰 역할을 하였으며, 나중에 잔을 상대로 한 종교재판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1431
[루앙에서 부당한 종교 재판 시작]
잉글랜드의 점령지인 루앙에서 종교 재판이 시작되었다.
명목상 이단성 시비였으나, 실제로는 샤를 7세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코숑 주교는 권한 없이 재판을 지휘했으며, 증거 조작, 변호인 박탈 등 교회법을 위반한 문제투성이 재판이었다.
18세 소녀인 잔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변론으로 심문관들을 놀라게 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재판은 명목상으로는 그녀의 이단성 시비여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지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열렸다. 베드포드 공작은 조카인 헨리 6세의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잔의 활약으로 맞수인 샤를 7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잔에 대해 앙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잔을 이단 혐의로 공격하는 것은 곧 그녀가 옹립한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1431년 1월 9일 잉글랜드의 점령지역인 루앙에서 열렸다. 하지만 이 재판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은 재판이었다. 우선 교회법상 코숑 주교는 종교재판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종교재판관이 된 것은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자금을 대준 잉글랜드 정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덕분이었다.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모으는 일을 위탁받은 성직공증인 니콜라스 바이는 잔에게 불리한 증언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찾지 못하였다. 이렇게 잔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재판이 강행되었다. 나중에 법정 서기들은 상부의 강압에 못 이겨 재판 기록을 잔 다르크에게 불리하도록 일부 날조했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잔에게는 자문관이나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교회법을 또 한 번 위반하였다. 법정에는 그녀를 도울 증인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1차 공개심리 때, 잔은 법정에 출석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반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프랑스 측의 성직자들도 마땅히 이 법정에 초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잔 다르크는 홀로 자신을 변호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농가 출신의 18살 된 소녀가 연륜 있는 주교들과 신학자들로 구성된 심판관들과 그들의 끈질긴 유도 심문에 맞서 펼친 변론은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심판관들은 읽고 쓸 줄도 모르는 그녀의 유려한 변론에 여러 번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한 예로, 재판관들이 잔에게 “그대는 자신이 지금 은총의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묻자 잔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질문은 잔에게 놓은 덫이었다. 은총의 상태란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질문은 대단히 어려운 신학적 문제를 담고 있었다. 교회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을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 없다고 가르치는데, 만약 잔이 그렇다고 답변했다면 그녀는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만약 잔이 아니라고 대답했다면 그것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죄악의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법정 공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잔을 심문한 자들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어찌할 바를 몰라 무척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 20세기에 조지 버나드 쇼는 이 공방에 매우 감탄하여 자신의 희극 《성녀 잔 다르크》에서 재판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였다.
[화형 선고]
오랜 재판과 협박 끝에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으나, 이후 남성 복장을 다시 착용했다는 이유로 재범으로 간주되어 화형을 선고받았다.
훗날, 당시 법정에 참석했던 관리들은 잔 다르크의 재판에 사용된 증거들 중 많은 부분은 그녀에게 불리하도록 조작된 것이라고 실토하였다. 종교재판관 장 레메트르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가 잉글랜드측의 갖은 회유와 압력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심지어 개중에는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또한 종교재판의 규정상 여성 죄수는 수녀가 관리 감독하는 특별 시설에 수감되는 것이 통례였는데, 잔은 잉글랜드인 병사들이 지키는 일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썩은 음식을 먹다가 식중독에 걸리거나 병사들의 구타와 폭행에 시달렸다. 심지어 코숑 주교는 잔이 교황에게 항소할 기회마저 막아버렸다. 이에 비해 잉글랜드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자문관을 구성했다. 코숑 주교는 마지막에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당시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종교적인 죄였다. 잔 다르크는 남장은 남성들이 많은 군대에서 제대로 근무할 수 있기 위해, 또한 유사시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며 반박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후에 그녀는 법정의 명령에 따라 여자 옷을 입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감옥을 찾아온 한 잉글랜드 영주가 그녀를 강간하려고 시도하자 다시 남자 차림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로 잔 다르크는 사형을 당할 때까지 머리를 자르고 남자 복장을 했다. 오랜 재판 끝에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잔 다르크는 곧바로 처형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단은 초범인 경우에는 경범죄에 해당하지만, 재범인 경우에는 중죄로 다루어졌다. 잔은 각서에 서명할 때 여성의 옷을 입는 것에 동의하였다. 며칠 뒤에 법정에 선 그녀는 재판관에게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잉글랜드의 귀족이 감옥에 들어와서 자신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라고 말했다. 결국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더군다나 여성의 옷을 빼앗겨 달리 입을 옷이 없었기 때문에 잔은 다시 남성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1431년 5월 29일 법정은 잔 다르크에게 화형을 선고했다.
[비극적인 화형]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장대에 묶여 화형당했다.
마지막 순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으며, 잉글랜드군은 그녀가 살아 도망쳤다는 말이 나오지 못하게 시신을 세 번이나 불태워 잿더미로 만든 후 센강에 내다 버렸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는 루앙의 비외 마르셰 광장에서 군중이 보는 앞에서 장대에 밧줄로 묶겼다. 잔 다르크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수사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십자고상을 높이 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수사들은 잔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한 소작농 역시 잔을 애석하게 여겨 그녀 앞에 작은 십자가를 놓았다. 잔이 숨을 거둔 후에 잉글랜드군은 불을 끄고 새까맣게 그을린 그녀의 시신을 공개 전시하여 아무도 그녀가 살아서 빠져 나갔다는 말을 내뱉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군중이 그 유해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다시 시체를 세 번이나 불에 태워서 잿더미로 만든 후에 센강에 내다버렸다. 당시 처형간수였던 조프리는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진 이후 자신이 언제 천벌을 받을지 몰라 매우 두려운 나날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잉글랜드 헨리 6세의 프랑스 대관식]
프랑스 파리의 노테르담 성당에서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샤를 7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정통성을 유지하며 왕위를 지켰다.
1431년 12월 16일에 프랑스 파리의 노테르담 성당에서 헨리 6세(생몰 1421-1471)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루었지만, 샤를 7세는 흔들림없이 자신의 정통성을 유지하였다.
1435
[아라스 조약으로 동맹 와해]
백년 전쟁의 주요 전환점 중 하나인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의 동맹이 와해되었다.
같은 해 베드포드 공작이 사망하며 잉글랜드에 변화가 찾아왔다.
1435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됨으로 인하여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의 동맹은 와해되었다. 같은 해에 베드포드 공작이 사망하고, 헨리 6세는 섭정 없이 잉글랜드를 통치한 역사상 가장 젊은 왕이 되었다.
1452
[잔 다르크 재심 조사 시작]
잔 다르크의 처형 21년 후,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대심문관 장 브레알과 잔 다르크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잔 다르크 혐의에 대한 재조사를 포고하였다.
재심의 목적은 이전 판결의 정당성 여부 조사였다.
잔 다르크에 대한 재심은 전쟁이 끝난 후에 열렸다. 교황 갈리스토 3세는 대심문관 장 브레알과 잔 다르크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잔 다르크의 혐의에 대한 재조사 및 종교재판을 실시한다고 포고하였다. 재심의 목적은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는 1452년 시작되었으며, 기욤 부유 신부가 조사관을 맡았다. 공식적인 항소는 1455년 11월에 제출되었다.
1455
[공식 항소 제출]
잔 다르크의 처형 판결에 대한 공식적인 항소가 교황청에 제출되었다.
이 항소는 유럽 전역의 성직자들이 대거 참여하며 교회법에 따른 표준 절차를 준수했다.
공식적인 항소는 1455년 11월에 제출되었다。항소에는 유럽 전역의 성직자가 대거 참여하였으며, 교회법에 따른 표준 법정 절차가 준수되었다.
1456
[대심문관의 보고서]
재심 조사를 이끌던 대심문관 브레알이 최종 보고서를 작성, 잔 다르크를 순교자로 선언하고 이전 재판을 주도했던 피에르 코숑 주교를 세속적 이유로 무고한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간 이단자라고 선언했다.
신학자로 전원 구성된 배심원들은 115명의 증인들의 증언 및 증거자료들을 비교 분석하였다. 대심문관 브레알은 1456년 6월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에 그는 잔 다르크를 순교자로 선언하고, 피에르 코숑 주교에 대해서는 세속적인 이유 때문에 무죄한 여인을 죄인으로 몰아간 이유를 들어 이단자라고 선언하였다.
[재심에서 모든 혐의 무죄 판결 및 명예회복]
항소심에서 잔 다르크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져 그녀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는 잔 다르크를 통해 왕위에 오른 샤를 7세의 정통성을 다시 확고히 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담겨 있었다.
1456년 7월 7일 항소심에서 잔 다르크의 모든 혐의에 대해서 무죄라는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잔다르크에 대한 사후 복권은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진 정치적 행위였다. 잔다르크의 도움에 의해서 프랑스 왕위에 오른 샤를 7세에게는 그녀를 복권 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마녀로 남아 있을 경우에 샤를 7세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되었다.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은 교황청의 공식적인 승인하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샤를 7세는 교회가 마녀로 규정한 악마와 동맹을 맺고 그의 도움으로 즉위한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황청은 샤를 7세의 재심요구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잉글랜드가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거에 교회가 내렸던 결정을 다시 뒤집어야 했기에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곤경에 빠진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어머니로 하여금 교황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사안을 비정치화하는 외교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또한 과거의 종교재판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 코숑 주교, 종교 재판소의 대표 장 르메트르, 종교 전문가 장 에스티베등 잔 다르크를 재판했던 판사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여 재심 진행을 관철시켰다.
1849
[잔 다르크 시복 운동 시작]
나폴레옹의 잔 다르크 국가 상징화 노력에 이어, 펠릭스 뒤팡루 주교가 오를레앙 교구장에 착좌하며 그녀를 열렬히 찬양하는 강론으로 프랑스와 영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잔 다르크의 시복 운동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19세기 초반에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잔 다르크를 프랑스의 국가 상징으로 선언하면서 대중들에게 그녀를 부각시켰다. 이는 곧 큰 효과를 발휘하였으며 잔 다르크는 존경받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849년 펠릭스 뒤팡루 주교가 오를레앙 교구장에 착좌하면서 잔 다르크를 열렬하게 찬양하였는데, 당시 그의 강론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백년 전쟁 당시 프랑스의 적국이었던 영국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1909
[로마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복]
펠릭스 뒤팡루 주교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로마 교황청에서 복자(Blessed)로 시복되었다.
펠릭스 뒤팡루 주교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1909년 잔 다르크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시복인은 교황 비오 10세이다.
1920
[성인으로 시성되며 명예로운 부활]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이로써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인으로 변신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고,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공경받는 성인 중 한 명이 되었다.
투르의 마르티노, 루이 9세,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와 더불어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20년 5월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잔 다르크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이로써 잔 다르크는 마녀에서 성인으로 변신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다. 성인이 된 잔 다르크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공경을 받는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잔 다르크를 라틴어식 명칭인 아르크의 요안나 또는 요안나 아르크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잔 다르크는 투르의 마르티노, 루이 9세,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과 더불어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