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무장, 다이묘, 정치인, 일본 통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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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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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무장, 다이묘, 정치인, 일본 통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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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출에서 일본 최고 권력자로 입신양명한 입지전적인 인물. •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시대를 통일하며 혼란을 종식시켰습니다. •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반도를 침략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문화재 약탈을 초래했습니다. • 태합검지 등 내정 정책에도 기여했으며 특유의 수완과 기발함으로 출세했습니다. • 그의 인생은 비천한 신분에서 시작해 성공했으나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면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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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

[미천한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 탄생]

오와리국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히요시마루'라 불렸으며, 훗날 전국 3영걸 중 한 명으로 일본을 통일하게 됩니다.

덴분 6년 음력 2월 6일, 지금의 일본 나고야시 나카무라구에서 농민 기노시타 야에몬과 어머니 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아명은 히요시마루였으며, 널리 유포된 설에 따르면 양아버지의 학대를 피해 집을 뛰쳐나와 무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의 출신성분은 당대에도, 후대에도 왜곡되거나 미화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의 비천한 신분은 나중에 일본을 지배하고도 쇼군에 취임하지 못하고 태합을 칭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1554

[오다 노부나가와의 운명적 만남]

오다 노부나가의 허드레꾼으로 들어간 그는 남다른 재치와 성실함으로 노부나가의 눈에 들어 출세의 기회를 잡게 됩니다.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 마쓰시다 유키쓰나를 잠시 섬긴 후, 덴분 23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허드레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잔일을 도맡아 했고, 변소 청소부터 신발 제작까지 모든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우물에 빠진 금술잔을 기발한 방법으로 찾아내 노부나가의 총애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노력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그는 점차 오다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노부나가는 그의 용모를 보고 '원숭이', '대머리 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561

[정실 네네와의 결혼]

아사노 나가카쓰의 양녀인 네네와 결혼하며 오다 가문 내에서 안정적인 기반을 다져 나갑니다.

에이로쿠 4년, 아사노 나가카쓰의 양녀이자 스기하라 사다토시의 딸인 고다이인(네네)과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은 그의 오다 가문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573

[하시바 성 하사 및 나가하마성 축조]

아자이 가문 멸문 후 오미 3개 군을 하사받고 나가하마성을 축조하며, 오다 가문 내 유력 가신들의 성씨를 따 '하시바'로 개명하며 세력을 확장합니다.

덴쇼 원년, 아자이 가문이 멸문되자 히데요시는 그들의 영지였던 오미 3개 군을 하사받아 오다니 성에 입성합니다. 그러나 산성인 오다니 성 대신 비와호 호변의 이마하마에 성을 축조하고 지명을 나가하마로 개명하여 나가하마성주로 부임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다 가문의 유력 가신인 니와 나가히데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성씨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 자신의 성을 하시바(羽柴)로 개명했습니다. 또한 오미 지역의 인재들을 발굴하여 옛 아자이 가문의 가신들과 이시다 미쓰나리 등 유능한 젊은 인재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키워냈습니다.

1582

[주군 노부나가의 죽음과 아케치 미쓰히데 토벌]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급작스럽게 자결하자, 히데요시는 즉시 '주고쿠 대회군'을 단행하여 역신 아케치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굳힙니다.

빗추 다카마쓰성 공략 중이던 덴쇼 10년 음력 6월 2일,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히데요시는 이 사실이 외부에 새어 나갈 것을 염려하여 소식을 가져온 사자를 직접 베어 죽이고, 성 공격을 급히 진행하면서도 바깥에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와 강화를 맺어 그를 할복시킨 직후, 히데요시는 '주고쿠 대회군'이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교토로 회군했습니다. 음력 6월 13일, 셋쓰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와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미쓰히데를 살해했습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복수를 달성하고 교토를 장악하며 강력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오다 가문의 운명을 바꾼 기요스 회의]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와 영지 분할을 논의하는 기요스 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어린 산보시(오다 히데노부)를 후계자로 천거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합니다.

음력 6월 27일, 기요스성에서 노부나가의 후계자 문제와 영지 분할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노부나가의 3남 간베 노부타카를 천거했으나, 미쓰히데 토벌로 공을 세운 히데요시의 입김과 이케다 쓰네오키, 니와 나가히데의 지지로 히데요시가 천거한 적손 산보시(오다 히데노부)가 후계자로 결정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어린 산보시의 후견인으로 노부타카를 내세우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가쓰이에의 수긍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회의 결과,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옛 영지를 포함한 단바, 야마시로, 가와치 지역의 28만 석을 추가로 얻어 오다 가문 필두 가신이었던 가쓰이에보다 우위에 서게 됩니다.

1583

[패권 경쟁의 종결, 시즈가타케 전투 승리]

오다 가문 내 최강 세력인 시바타 가쓰이에와의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하며 일본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합니다.

덴쇼 11년 음력 2월 28일, 호쿠리쿠에서 가쓰이에의 마에다 도시이에가 선봉으로 출진했고, 음력 3월 9일에는 가쓰이에 자신이 이끄는 3만의 대군이 오미로 출발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세 전선을 가모 우지사토에게 맡기고 오미로 돌아와 시바타 군과 대치했습니다. 4월 20일, 가쓰이에의 중신 사쿠마 모리마사가 히데요시가 미노로 출병한 틈을 노려 오이와산과 이와사키산의 성채를 공격해 함락했지만, 가쓰이에의 명을 어기고 함락한 성채에 머물렀습니다. 21일, 신속히 회군한 히데요시의 반격을 받았고, 마에다 도시이에의 배신까지 겹쳐 가쓰이에는 대패하여 에치젠으로 철수했습니다. 이 승리로 히데요시는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습니다. 음력 4월 24일, 가쓰이에는 기타노쇼 성에서 정실 오이치노 가타와 함께 자결하며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이어서 음력 5월 2일, 미노를 공략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3남 오다 노부타카를 자결로 몰았고,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항복을 받아내며 반 히데요시 진영을 멸했습니다.

1584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결, 나가쿠테 전투]

오다 노부카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과의 '나가쿠테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지만, 정치적 수완으로 결국 이에야스의 굴복을 이끌어냅니다.

덴쇼 12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에 반발하며 중신들을 모살하고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카쓰에 가담하고 조소카베 모토치카, 기이 사카이 무리도 반 히데요시 세력에 합류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케다 쓰네오키를 우군으로 맞이하여 이누야마성을 공략했습니다. 그러나 이에야스와 노부카쓰 연합군은 반격하여 하구로에서 모리 나가요시를 격파했습니다. 음력 4월 6일, 히데요시의 조카 미요시 히데쓰구를 총대장으로 미카와 기습을 단행했으나, 9일 도쿠가와 군의 역습을 받아 쓰네오키, 모토스케 부자와 나가요시 등이 전사하는 대패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카쓰를 무단으로 강화하게 만들었고, 대의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결국 히데요시에게 굴복하여 차남을 양자로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이에야스가 승리했으나 정치적 승리는 히데요시의 몫이 되었습니다. 덴쇼 14년(1586년)에는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내고, 어머니 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보내는 등 이에야스의 입경을 재촉하여 결국 그를 복종시켰습니다.

1585

[내대신 임관]

조정으로부터 정2위 내대신에 위계 임관되며 정권 장악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덴쇼 13년 음력 3월 10일, 히데요시는 조정에서 정2위 내대신에 위계 임관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천출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고위 관직에 오르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줍니다.

[기이 평정]

직접 기이 공략에 나서 사이카 무리의 수령을 모살하며 기슈를 평정, 자신의 통치 영역을 넓혔습니다.

덴쇼 13년 음력 3월 21일, 히데요시는 기이 공략에 나서 사이카 무리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최종적으로 도도 다카토라에 명하여 사이카 무리의 수령 스즈키 시게오키를 모살하며 기슈(紀州)를 평정했습니다.

[관백 취임]

천출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 최고 명예직 중 하나인 '관백'에 오르며 도요토미 정권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예전부터 관백직을 둘러싼 내분이 다시 불거지자, 히데요시는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어 관백(關白)직에 올랐습니다. 이는 평민 출신으로서 쇼군이 될 수 없었던 그에게 천황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최고의 명예직이었습니다.

[시코쿠 평정]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를 총대장으로 시코쿠를 평정하여 서일본 장악에 박차를 가합니다.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에 대해서는 동생 하시바 히데나가를 총대장에 임명해 출진시켰습니다. 모리 데루모토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의 모리 군도 가세하여 음력 7월 25일 시코쿠를 평정했습니다. 모토치카에게는 도사국만 그에게 주었습니다.

1586

[엣추 평정]

엣추국의 삿사 나리마사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며 혼슈 중부 지역까지 통치 영역에 편입됩니다.

엣추의 삿사 나리마사에 대해서는 음력 8월 히데요시가 직접 군을 이끌고 도야마로 진군했지만, 거의 전투 없이 음력 8월 25일 나리마사는 히데요시에 항복했습니다. 오다 노부카쓰의 조력도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나리마사를 용서하고 엣추 국 니카와군을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기이, 시코쿠, 엣추를 세력하에 두었습니다.

[도요토미 성 하사]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그의 가문이 일본 최고 권문 세족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덴쇼 14년 음력 9월 9일,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 성을 하사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권력과 위상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태정대신 임관 및 정권 확립]

일본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에 올라 도요토미 정권을 명실상부하게 확립합니다.

덴쇼 14년 음력 12월 25일, 태정대신(太政大臣)에 올라 정권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그가 명실상부한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1587

[규슈 평정의 성공]

20만 대군을 이끌고 규슈를 평정하며 서일본 전역을 장악, 일본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듭니다.

덴쇼 14년, 분고국 헤쓰기 강 전투에서 시마즈 가문에 패배(헤쓰기가와 전투)했지만, 덴쇼 15년 히데요시 자신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규슈를 공략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에 시마즈 가문은 항복했습니다. 이로써 서일본 전역이 히데요시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전후 하카타에서 바테렌 추방령을 반포했지만 사실상 기독교인은 묵인되었고, 덴쇼 16년(1588년)에는 가타나가리(도검 몰수령)를 실시하여 국내 안정을 꾀했습니다.

1590

[오다와라 정벌과 일본 통일]

고호조 가문의 거성 오다와라성을 3개월 만에 함락시키고 마침내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합니다.

이는 그의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증명한 세계최초의 사건입니다.

덴쇼 17년(1589년), 측실 요도도노 사이에서 아들 쓰루마쓰가 태어나 후계자로 지명됩니다. 덴쇼 18년, 고호조 가문의 가신 이노마타 구니노리가 사나다 가문의 나구루미성을 탈취한 일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고호조 가문을 제압하기 위해 자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다이묘들을 소집한 뒤 육군, 수군을 합친 총 병력 21만 명의 세계최대 규모 대군을 이끌고 간토로 출병, 호조 가문의 거성인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습니다.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도 함락하지 못한 견고한 오다와라성이었지만, 히데요시의 병농 분리 정책으로 장기전이 가능한 도요토미군과 호조 가문 내부의 단결력 부족으로 인해 3개월의 농성 끝에 개성되었습니다. 이로써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계속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통일했습니다. 그는 정이대장군 직을 폐지하여 자신의 천출 신분으로 인한 제약을 없애고 관백으로서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1591

[태합 취임과 센노 리큐 할복 사건]

사랑했던 아들 쓰루마쓰가 요절하자 조카 히데쓰구에게 관백직을 양도하고 '태합'을 칭하며, 다도 스승 센노 리큐에게 할복을 명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입니다.

덴쇼 19년, 후계자로 지명했던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조카 히데쓰구를 양자로 맞이해 관백직을 양도하고 자신은 '태합'으로 불렸습니다. 이 시기, 다도 스승 센노 리큐에게 할복을 명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리큐의 제자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은 효수되었으며, 할복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또한 같은 해, 도호쿠 지방에서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이 발생하자 히데요시는 대군을 파견하여 이를 평정하고 구노헤 가문을 멸문시켰습니다.

1592

[조선 침략, 임진왜란 발발]

명나라 정복과 조선 복속을 목표로 16만 대군을 한반도에 파병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이는 그의 생애 최대의 과오이자 비극으로 평가됩니다.

분로쿠 원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도하에 일본은 명나라 정복과 조선 복속을 목표로 16만의 군대를 한반도 남부에 침투시키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한성, 평양을 점령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명의 원군,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활약으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유력 다이묘들의 권력 약화, 자신의 공명심과 영웅 심리, 죽은 아들 쓰루마쓰의 비통함, 해외무역 장악,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 계획 계승, 천하야욕 실현, 정권의 불안정한 영속성 개선, 일본 내부 갈등 해소 등 다양한 설이 제기됩니다. 특히 천출로서 쇼군이 될 수 없었던 그가 막부를 세울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상당수의 다이묘들이 반대했지만 히데요시는 출병을 강행했습니다.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라는 앙숙을 선봉장으로 삼아 경쟁을 유도, 빠른 점령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차단되자 침략군들은 고전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도공 납치 및 문화재 약탈 등 막대한 피해를 조선에 남겼으며, 히데요시 스스로도 무고한 조선인들을 대량 학살하고 수급 대신 귀나 코를 베어 오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1595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후계자였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강제로 할복시키고 그의 일가까지 몰살하여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합니다.

이 사건은 도요토미 가문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분로쿠 2년(1593년) 측실 요도도노가 히데요리(세번째 아들)를 낳자, 히데요시는 히데쓰구와의 대립이 표면화되었습니다. 2년 후인 분로쿠 4년, 히데요시는 관백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악정과 난행을 이유로 폐적시키고 고야산으로 추방한 후, 모반 혐의를 씌워 할복시켰습니다. 히데쓰구의 보좌역이었던 마에노 나가야스 등 유력 가신들도 연좌되어 죽거나 유배되었으며, 히데쓰구 일가도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히데요리의 방해꾼을 제거하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다이묘들의 결속을 저해하고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정권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 호소카와 다다오키 등 연루된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는 후에 이에야스에게 충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97

[정유재란 발발]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14만 군으로 조선을 재침략하며 '정유재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소모와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분로쿠 5년(1596년) 계속되어 왔던 명과의 강화 교섭이 결렬되어, 게이초 2년, 14만의 군으로 조선을 재침략하였습니다. 칠천량해전을 시작으로 2개월 동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석권하고 경기도로 나간 후, 조선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여 장기 점령을 꾀했습니다. 이후 울산성 전투에서 고전한 후, 전선을 축소하려는 무단파와 문치파 간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조선 팔도 중 남부 4개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명나라 황녀를 일본 덴노와 혼례시킬 것 등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무리한 요구를 한 탓에 강화가 결렬되었습니다.

1598

[권력의 정점에서 맞이한 죽음]

임진왜란 중 위암으로 후시미성에서 사망합니다.

그의 죽음은 일본군에 비밀로 부쳐졌고, 이는 전쟁의 종결과 도쿠가와 정권의 도래를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게이초 3년 음력 8월 18일, 후시미성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향년 62세. 그는 고다이로 필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에게 어린 아들 히데요리의 후사를 부탁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병력 사기 문제와 조선에 출병 중인 일본군에 대한 영향을 고려하여 비밀에 부쳐졌고 장례도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그의 무덤은 폭파되어 소멸되었는데, 이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 회복을 위해 임진왜란의 원인 제공자의 무덤을 처단함으로써 전쟁이 히데요시의 강요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도요토미 정권은 점차 막을 내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들 도요토미 구니마쓰는 1615년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처형당했고, 이로써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단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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