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일본 다이묘, 센고쿠 무장, 통일 영웅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28:30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국의 변방 다이묘에서 일본 천하 통일을 꿈꾼 혁명가입니다. 젊은 시절 오와리의 멍청이라 불렸으나 탁월한 지략과 과감한 조총 전술로 오와리를 통일하고 미노를 공략했습니다. 천하포무를 내걸고 구시대의 질서에 도전하며 영웅적인 행보를 이어갔지만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충신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혼노지에서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일본 삼영걸로 불리며 예측 불가능한 성격과 파격적인 정책으로 일본 역사에 강렬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 오와리의 멍청이, 노부나가 탄생
- 냉혹한 살모사의 딸과 정략결혼
- 미래의 천하인, 이에야스와의 특별한 인연
- 장인도 놀란 기개와 조총에 대한 선견지명
- 파격의 상징, 아버지 장례식에서의 기행
- 본가를 멸하고 오와리 통일의 기반 마련
- 오케하자마 전투: 압도적인 열세를 뒤집은 기적
- 이에야스와의 숙명적인 '기요스 동맹'
- 미노 통일과 '천하포무' 선언
- 천하인의 상징, 교토 상경과 쇼군 옹립
- 가네가사키 퇴각: 생사의 기로에 선 노부나가
- 히에이 산 엔랴쿠지 소각 사건
- 천하를 뒤흔든 다케다 신겐의 죽음
- 무로마치 막부 멸망
- 광신도 집단, 나가시마 일향종 대학살
- 나가시노 전투: 조총 전술의 승리
- 일본 최초의 폭사: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최후
- 군신 겐신의 죽음, 제2차 포위망 해체
- 천하통일의 상징, 아즈치 성 완성
- 닌자들의 고향, 이가 정벌과 대학살
- 천하의 다케다 가문, 최후를 맞다
- 혼노지의 변: 천하 통일을 목전에 둔 비극적인 최후
1534
[오와리의 멍청이, 노부나가 탄생]
오와리국의 변방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적장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상식 밖의 행동으로 '오와리의 멍청이'라 불렸지만, 조총과 농민 세력에 관심을 보이는 등 통치자의 싹을 보였습니다.
1548
[냉혹한 살모사의 딸과 정략결혼]
중신 히라테 마사히데의 중개로 적대 관계였던 미노의 다이묘 사이토 도산의 딸 키쵸(훗날의 노히메)와 정략결혼했습니다.
당시 살모사라 불리던 장인 사이토 도산은 노히메에게 단도를 건네며 노부나가가 멍청이일 경우 주저 말고 죽이라 명했다고 전해집니다.
[미래의 천하인, 이에야스와의 특별한 인연]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전쟁 중,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이마가와의 인질이던 어린 마쓰다이라 다케치요(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납치합니다.
노부나가는 8살 아래의 다케치요와 친해졌고, 이때의 인연은 훗날 오와리와 미카와의 견고한 동맹으로 이어져 노부나가의 천하 통일에 큰 밑거름이 됩니다.
납치된 다케치요는 오다와 이마가와 양가의 협상 끝에 일단 이마가와로 보내졌습니다.
1549
[장인도 놀란 기개와 조총에 대한 선견지명]
장인 사이토 도산과의 첫 대면에서 멍청이라는 소문과 달리 정식 관복을 갖추고 기량을 겨뤘습니다.
이마가와와의 결전을 위해 대량의 조총 반입을 약속받고, 오미국의 구니토모무라에 조총 500정을 주문하며 당시 첨단 무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였습니다.
1553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노부나가는 쇼토쿠 사 경내로 갈 때까지 짐승털로 된 조끼에 화승총을 메고 반라 상태에서 말을 타고 갔는데 사이토 도산이 몰래 숨어서 이를 지켜봤다고 합니다.
1551
[파격의 상징, 아버지 장례식에서의 기행]
아버지 노부히데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맏상주인 노부나가는 장례식에 늦게 나타나고 아버지 영정에 향을 뿌리는 기행을 벌여 문중의 반감을 샀습니다.
이는 그의 파격적인 성격을 다시 한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후세의 창작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1급 사료인 《신초코키(신장공기)》에도 기록된 것으로 완전한 창작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러한 행위를 저지른 이유에 대해서 일부러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또는 아버지의 장례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노부카쓰에 대한 항의를 위해,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추측에 그치고 있습니다.
1554
[본가를 멸하고 오와리 통일의 기반 마련]
숙부 노부미쓰와 함께 본가 당주 노부토모를 처형하고 오다 씨의 본가 야마토노카미 집안을 멸문시켰습니다.
나고야 성에서 기요스 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무로마치 막부에 청원해 오와리 슈고직에 오르며 서출 집안에서 오다 씨의 명실상부한 종가로 격상시켰습니다.
숙부인 노부미쓰도 이 때 죽는데 사인이 명확히 밝혀지진 않고 있습니다. 이후 무라키토리데 전투에서 이마가와의 침공을 다시 한번 저지했습니다.
1560
[오케하자마 전투: 압도적인 열세를 뒤집은 기적]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2만~4만 대군이 오와리를 침공하자, 노부나가는 단 3천~5천의 병력으로 적 본진을 기습, 적장 요시모토의 목을 베는 기적적인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노부나가를 전국 시대의 새로운 영웅으로 각인시킨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마가와 군은 스루가국, 도토미국, 미카와국 등 3개 쿠니를 아우르는 대군이었고,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릴 기세로 교토로 향했습니다. 노부나가는 평소 좋아하던 '아쓰모리'를 추고 출진하여 악천후 속에 야전 휴식 중이던 적의 본진을 기습했습니다. 이마가와 군은 대장과 핵심 가신들을 모두 잃고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1562
[이에야스와의 숙명적인 '기요스 동맹']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이마가와 가문에서 독립한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기요스 성에서 동맹을 맺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인연으로 맺어진 이 동맹은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죽을 때까지 견고하게 유지되며, 훗날 이에야스가 천하를 잡는 기반이 됩니다.
노부나가는 이듬해인 1563년 기요스 성을 나와 거처를 미노 국경 근처인 고마키 산성으로 옮기고, 교토 및 오미 국과 당시 일본의 국제항 사카이 항구 등에 인맥을 넓혀 대량의 조총과 물자를 새로 들여오는 등, 미노 공략을 너머 중부 일본 장악을 목표로 역량을 집중해 나갔습니다.
1567
[미노 통일과 '천하포무' 선언]
사이토 도산의 손자 다쓰오키의 실정을 틈타 다케나카 한베에 등 사이토 씨의 중진들을 회유하며 이나바 산성을 점령, 미노를 손에 넣었습니다.
이후 이세 지방까지 공략하며 오와리와 미노 두 쿠니의 통합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거처를 기후로 옮기고 '천하포무(天下布武)' 인장을 사용하며 일본 통일을 공식화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습니다. 동년 11월 9일에는 오기마치 천황을 배알했으나, 황궁 개수비용 등 천황의 부탁에 대해 '일단 염두에 두겠사옵니다'라고 공손히 말하며 실리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1568
[천하인의 상징, 교토 상경과 쇼군 옹립]
미요시 삼인방에 의해 쇼군이 살해된 혼란 속에서,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노부나가는 적통 쇼군 옹립이라는 대의명분으로 교토에 입성, 롯카쿠 가문을 격파하고 요시아키를 15대 쇼군으로 옹립했습니다.
부쇼군 직위를 사양하는 대신 사카이 항구 독점권을 확보하며 실리적인 이득을 취했습니다.
노부나가에게 항복한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미요시 3인방은 시코쿠로 도주했습니다. 이케다 가쓰마사의 항복을 마지막으로 미요시 천하는 겨우 3년 여 만에 끝났습니다.
1570
[가네가사키 퇴각: 생사의 기로에 선 노부나가]
아사쿠라 가문을 토벌하려던 중 동맹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신으로 적진 한가운데 고립되는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에야스, 히데요시 등 휘하 장수들의 분전으로 겨우 10여 명의 호위병과 함께 교토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계기로 쇼군 요시아키가 주도하는 '노부나가 포위망'이 결성되었습니다.
노부나가는 거듭된 상경 명령을 무시하는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토벌하기 위해 아자이 가문과의 맹약을 파기했습니다. 아자이 가문은 결혼동맹의 조건으로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깨고 아사쿠라를 정벌했습니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귀환할 때 따르는 자는 겨우 10명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노부나가에게는 큰 위기의 하나였습니다.
1571
[히에이 산 엔랴쿠지 소각 사건]
수차례 퇴거와 중립을 권고했음에도 적대 세력을 비호하며 저항을 계속한 히에이 산의 엔랴쿠지를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습니다.
이는 당시 신성시되던 성지를 공격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타락한 불교 세력을 정치에서 배제하려는 시도로 긍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당시 불교 세력은 종교적인 계율을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정치에 공공연히 간여하는 큰 세속적 세력이기도 했습니다. 에도 시대 중기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 사건을 두고 '그 수법이 잔인했다고 말할 수 있어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승려의 폐단을 없앴으니, 이 또한 천하에 큰 공을 세운 일의 하나라고 봐야한다'고 평했습니다.
1573
[천하를 뒤흔든 다케다 신겐의 죽음]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방의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렸던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의 칙령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화친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풍림화산'의 다케다 신겐이 급사하면서 다케다 군이 귀환, 노부나가 포위망은 극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다케다 군은 미카와로 쳐들어갔고, 음력 2월 노다 성을 공략했습니다. 게다가 신겐의 상경전에 호응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미요시 요시쓰구, 마쓰나가 히사히데와 협력해 거병했습니다. 동서로 적에 둘러싸인 노부나가는 궁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음력 4월 5일 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칙령을 받아 요시아키와 화친하였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멸망]
다케다 신겐 사후, 노부나가는 반기를 든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니조성과 마키시마 성을 포위 공격하여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했습니다.
이로써 200년 넘게 이어져 온 무로마치 막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노부나가는 연호를 덴쇼로 바꿀 것을 조정에 요청했습니다.
음력 7월 28일 연호를 겐키에서 덴쇼로 할 것을 조정에 아뢰었습니다.
1574
[광신도 집단, 나가시마 일향종 대학살]
이세 나가시마의 일향종 신도들이 항복을 요청하며 배로 퇴거하려 했지만, 노부나가는 갑작스러운 일제 사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신도들의 반격으로 동생 오다 히데나리 등 많은 인명을 잃었습니다.
이후 노부나가는 성에 농성 중인 2만여 명의 신도를 학살하며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음력 7월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세 나가시마를 수륙 양면으로 포위해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장기전을 시도했습니다. 나가시마 일향종 문도의 공격도 집요했기 때문에 이복형 오다 노부히로를 비롯한 다수의 무장이 전사하였고 노부나가 군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병량이 고갈되었고, 오다 군의 맹공으로 오토리이 성이 함락되어 일향종 문도 천여 명이 죽자, 음력 9월 29일 병량 부족을 느낀 나가시마 성의 문도는 항복하고, 배로 오사카 방면으로 퇴거하겠다는 요청을 하고 노부나가는 이를 승낙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문도들의 퇴거가 늦어지자 문도들의 배에 일제 사격을 가했습니다.
1575
[나가시노 전투: 조총 전술의 승리]
다케다 가쓰요리 군이 나가시노 성을 공격하자, 노부나가는 3만 대군과 이에야스 군 8천을 이끌고 시타라가하라에서 다케다 군을 격파했습니다.
1천여 정의 조총을 활용한 전술로 다케다 군의 핵심 장수들을 전사시키며 다케다 가문에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는 1천여 정의 조총을 사용해 일제사격을 하였다고 전해지나 '총포대를 세 조로 나누어 시간차 없이 연속사격을 가했다'는 유명한 통설인 삼단사격(三段撃ち)이라는 전법을 실제로 사용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군은 야마가타 마사카게, 바바 노부하루 등의 여러 핵심적인 장수들이 전사하는 등 회생 불가능한 타격을 입습니다.
1577
[일본 최초의 폭사: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최후]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환으로 다시 반기를 든 마쓰나가 히사히데를 토벌했습니다.
노부나가는 히사히데의 명품 차 그릇 '히라구모'를 진상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권유했으나, 히사히데는 이를 거절하고 자폭하며 일본 최초의 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노부나가는 히사히데의 기량을 아껴 항복을 권유했지만, 히사히데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음력 10월 마쓰나가 군은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1578
[군신 겐신의 죽음, 제2차 포위망 해체]
노부나가에게 큰 위협이었던 '군신' 우에스기 겐신이 급사했습니다.
겐신은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죽었기에 우에스기 가문 내에서 내분('오타테의 난')이 일어났고, 이를 틈타 오다 군은 노토와 가가를 공략했습니다.
겐신의 죽음으로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은 자연스럽게 붕괴되었습니다.
1579
[천하통일의 상징, 아즈치 성 완성]
1576년부터 지휘, 감독하여 비와호 호반에 아즈치 성을 완성했습니다.
5층7계의 천수는 '유럽에도 존재하지 않는 호화로운 성'이라는 예수회 선교사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노부나가는 이곳을 천하통일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천수 내부에는 후키누키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노부나가는 기후 성을 적장자 오다 노부타다에게 양도하고, 완성된 아즈치 성에 살았습니다.
1581
[닌자들의 고향, 이가 정벌과 대학살]
차남 오다 노부카쓰의 독단적인 이가 공격 실패(1차) 이후, 노부나가는 직접 6만 대군을 이끌고 이가를 공략하여 오다 가의 영지로 삼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가의 지방 호족들과 닌자들이 대량 학살되었고, 이후 닌자들의 노부나가 암살 시도가 계속되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덴쇼 7년(1579년) 이세의 지성 구축을 방해한 이가의 호족에 화가 난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쓰는 독단으로 이가 국을 공격했지만, 대패했습니다. 노부나가는 노부카쓰를 엄하게 질책하고, 이가 호족에 대한 적의를 품었습니다.
1582
[천하의 다케다 가문, 최후를 맞다]
다케다 가쓰요리의 매제가 노부나가에게 귀순한 것을 계기로, 노부나가는 10만여 명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하여 다케다 령을 전격적으로 공략했습니다.
다케다 가문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주요 무장들의 항복이 이어졌으며, 결국 다케다 가쓰요리 부자는 덴모쿠 산에서 자결, 다케다 가문은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음력 2월 1일 다케다 가쓰요리의 매제 기소 요시마사가 신부 성의 축성에 따른 과도한 공납/군역 요구에 불만을 품고 노부나가에게 돌아섰습니다. 이를 계기로 음력 2월 3일 노부타다에게 동원령을 명하여 전격적으로 다케다 령을 공략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호조 우지나오, 가나모리 나가치카 등 여러 방면에서 진격했습니다. 음력 3월 5일 노부나가는 아즈치를 출발했고, 음력 3월 8일 노부타다가 고후를 점령했습니다.
[혼노지의 변: 천하 통일을 목전에 둔 비극적인 최후]
시코쿠 정벌 준비를 위해 교토 혼노지에 머물던 노부나가에게, 측근 아케치 미쓰히데가 갑작스럽게 반기를 들고 혼노지를 급습했습니다.
미쓰히데는 '적은 혼노지에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노부나가를 포위했고, 겨우 100여 명의 호위군 밖에 없던 노부나가는 스스로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49세의 나이로 자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음력 5월 15일 맹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즈치로 초대했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이에야스의 접대를 맡겼습니다. 히데요시의 원군 요청으로 미쓰히데에게 원군을 명했습니다. 혼노지를 급습하기 전까지 미쓰히데는 목표가 노부나가가 있는 혼노지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고 '교토에서의 열병식에 참가하기 위해서 교토로 간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노부나가는 '어쩔 방도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창을 가지고 항전했으나, 압도적 병력차 때문에 수세에 몰렸습니다. 노부나가의 사체는 결국 찾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혼노지 터 발굴조사에서 성채 수준의 규모를 갖췄다는 학설도 제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