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통치자, 무장, 쇼군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2:20:48
일본 센고쿠 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킨 위대한 통치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 3대 영웅으로 불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천하의 주도권을 잡고 에도 막부를 개창 일본 역사의 새 시대를 열었다. 탁월한 인내와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치밀한 권모술수로 난세를 헤치고 최고 권력에 올랐다. 에도를 일본의 수도로 발전시키고 260년간 이어진 평화로운 시대를 구축한 만능 영웅이다.
- 난세의 서막, 도쿠가와 이에야스 탄생
- 운명의 전환점, 오케하자마 전투
- '도쿠가와' 씨로 개성, 새 시대의 기틀
- 비극적 선택, 정실과 장남의 자결
- 혼노지의 변, 생사의 탈출
- 히데요시와의 대립,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 히데요시에게 복종, 천하통일의 발판
- 오다와라 성 함락, 센고쿠 시대 종식
- 에도 입성, 신도시 건설의 시작
- 임진왜란 불참, 병력 보존의 지혜
- 히데요시 사망, 권력 쟁탈전의 서막
- 천하를 가른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압승
- 에도 막부 개창, 쇼군에 오르다
- 도요토미 씨 제거, 오사카 전투 시작
- 오사카 성 함락, 도요토미 씨 멸문
- 일본을 바꾼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거
1543
[난세의 서막, 도쿠가와 이에야스 탄생]
미카와 국 오카자키 성에서 태어난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2살에 어머니와 헤어지고, 6살에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인질로 잡히는 등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보냈죠.
이는 훗날 그가 '인내의 귀재'로 불리게 되는 바탕이 됩니다.
1558
[첫 승리의 맛, 난세에 뛰어들다]
16세, 이에야스는 미카와 국 서부 데라베 성 공략을 시작으로 생애 첫 전투에 나섰습니다.
방화 작전 등 기발한 전술로 연이어 승리하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신임을 얻었고, '모토야스'로 개명하며 점차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습니다.
1560
[운명의 전환점, 오케하자마 전투]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습당해 전사하는 오케하자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질 신분이었던 이에야스는 극적으로 자유를 얻고, 오카자키 성으로 입성하며 독립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만 5천 대군을 이끌고 오다 씨의 본거지를 포위했으나, 오케하자마 산에서 휴식 중 오다 군의 기습에 당해 사망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군 중 가장 늦게 적진을 탈출했음에도 노부나가의 추격을 받지 않았고, 오카자키 성에 귀환하여 인질 신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1562
[은밀한 동맹, 기요스 동맹 체결]
이마가와의 감시를 피하며 신중하게 독립을 준비하던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와 비밀리에 '기요스 동맹'을 맺습니다.
이는 훗날 노부나가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며 이에야스의 세력 확장에 큰 도움이 됩니다.
미즈노 노부모토의 중재로 이에야스는 기요스 성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비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이에야스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미카와 중신들의 처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했습니다. 이에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일족을 인질로 잡아 가족과 교환하며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습니다.
1563
[생사의 기로, 일향종 잇키 진압]
미카와 일향종 사찰들이 세금 문제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야스는 강경한 태도로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총탄을 두 발이나 맞았지만 갑옷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사건은 이에야스의 강단 있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조구 사를 중심으로 미카와의 일향종이 벼 징수 문제로 잇키를 일으켰습니다. 이에야스의 가신 상당수가 적으로 돌아서 잇키에 가담했으나, 이에야스는 주동자를 죽이고 가담자들을 용서한 후 미카와 국 내의 일향종 사원을 전부 부수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불굴의 의지, 이에야스(家康)로 개명]
이마가와 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며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모토야스'에서 '이에야스(家康)'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동시에 장남의 이름도 노부나가의 이름을 따 '노부야스'라 칭하고,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와 정략 약혼을 시키며 동맹 관계를 굳건히 했습니다.
1565
[미카와 국 통일, 기반을 다지다]
요시다 성과 다하라 성을 점령하며 이마가와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미카와 국을 통일했습니다.
이는 이에야스가 독자적인 세력의 수장으로서 기반을 확고히 다진 중요한 사건입니다.
1566
['도쿠가와' 씨로 개성, 새 시대의 기틀]
칙허를 받아 성씨를 '도쿠가와'로 변경했습니다.
이는 이에야스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훗날 일본을 통일하여 에도 막부를 개창하는 기반을 마련한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569
[이마가와 씨 멸망, 도토미 확보]
다케다 신겐과의 동맹을 통해 이마가와 씨의 영지인 도토미 국을 공격, 가케가와 성까지 추격하여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낙향시킴으로써 이마가와 씨를 사실상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미카와와 도토미 전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1570
[노부나가와의 연합, 전국시대 전장 누비다]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에치젠, 오미 공격에 참가했으며, 이후 다케다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 전투, 나가시노 전투 등을 겪으며 전국시대 다이묘로서 입지를 크게 넓혔습니다.
1579
[비극적 선택, 정실과 장남의 자결]
오다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정실 쓰키야마도노와 장남 노부야스가 자결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는 이에야스의 가문 내 갈등과 노부나가와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자, 이에야스가 권력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했음을 드러냅니다.
1582
[다케다 씨 멸망, 영토 확장]
호조 씨를 포섭하여 오다, 도쿠가와, 호조 연합군이 가이 국을 공격,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등 세 개의 국을 장악하며 세력을 더욱 키웠습니다.
[혼노지의 변, 생사의 탈출]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자결한 '혼노지의 변'이 발생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이가 닌자 핫토리 한조와 대상인 자야 시로지로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미카와 국으로 탈출했습니다.
1584
[히데요시와의 대립,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급부상에 맞서 오다 노부카쓰와 손잡고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나가쿠테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선봉대를 궤멸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나, 결국 오다 노부카쓰의 강화로 이에야스도 인질을 보내며 냉전 체제에 돌입했습니다.
1586
[히데요시에게 복종, 천하통일의 발판]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와 정략 결혼을 하고 히데요시에게 형식적으로 복종을 맹세했습니다.
이는 천하의 대세에 순응하며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고 훗날을 도모하는 이에야스의 치밀한 전략을 보여줍니다.
히데요시는 이미 소에다 요시나리에게 시집간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이에야스는 이 결혼을 통해 히데요시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천하 통일의 야망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1590
[오다와라 성 함락, 센고쿠 시대 종식]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고호조 씨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키며, 100여 년간 이어진 일본 센고쿠 시대를 마침내 종식시켰습니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선발대를 이끌며 공을 세웠습니다.
[에도 입성, 신도시 건설의 시작]
히데요시의 논공행상으로 간토 지역을 받고, 당시 황량한 어촌이었던 에도에 입성하여 에도 성 대규모 증축 및 도시 정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에도가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고 에도 막부의 본거지가 되는 초석을 다진 일입니다.
이에야스는 백성들에게 쌀을 무상 배급하며 민심을 얻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도카이도의 5개국 대신 간핫슈와 이즈를 내렸습니다. 이에야스는 오다와라나 가마쿠라 대신 간토 중앙의 에도를 선택했습니다. 에도 입성 시 백성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간소한 옷차림으로 성에 들어갔고, 닷새 후 쌀을 무상 배급했습니다. 이후 에도 건설은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막대한 부역 부담을 지우며 진행되었으며, 이는 다이묘 통제 수단으로도 활용되었습니다.
1592
[임진왜란 불참, 병력 보존의 지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임진왜란)을 감행했을 때, 이에야스는 출병 명령을 받지 않고 일본 본토에 머물며 병력을 보존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다이묘들이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는 동안 이에야스는 세력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히젠 나고야 성으로 출진 명령을 받았으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조선 출병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일본군이 고전하고 다이묘들이 막대한 비용과 군사를 잃는 동안, 이에야스는 일본 내부에서 무공파와 문관파의 갈등 속에서 무공파의 인망을 얻었습니다. 임진왜란 불참은 이에야스가 권모술수에 능하며,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598
[히데요시 사망, 권력 쟁탈전의 서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후시미 성에서 사망하며 이에야스에게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금지되었던 다이묘 간의 혼인 관계를 맺으며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히데요시 사망 후 이에야스는 여러 다이묘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는 다른 다이로와 부교들의 비난을 샀지만, 마에다 도시이에와의 화해로 직접적인 충돌은 피했습니다. 그러나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이시다 미쓰나리 중심의 반도쿠가와 세력과의 대립이 본격화되었습니다.
1600
[천하를 가른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압승]
이시다 미쓰나리가 서군을 결집하여 이에야스의 동군과 '세키가하라'에서 운명을 건 대결을 펼쳤습니다.
이에야스는 서군의 지휘 체계가 통일되지 못함을 간파하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 서군 핵심 다이묘들의 배반을 유도하는 치밀한 전략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천하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일본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꾼 일본 최대의 내전으로 기록됩니다.
우에스기 가케카쓰의 모반 소문으로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을 명하자, 이시다 미쓰나리는 반도쿠가와 파를 결집해 서군을 형성했습니다. 서군은 세키가하라의 비좁은 분지로 동군을 유인하여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이에야스는 이미 서군 다이묘들의 배반을 약속받은 상태였습니다. 전투 당일,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배신으로 서군은 궤멸되었고, 미쓰나리는 참수되며 이에야스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1603
[에도 막부 개창, 쇼군에 오르다]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 후, 이에야스는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며 에도에 막부를 개창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정치 중심지가 교토에서 에도로 이동하고, 260여 년간 이어질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연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1605
[쇼군직 양위, 오고쇼 정치 시작]
쇼군 직위를 3남 히데타다에게 양위하고 슨푸 성으로 은거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의 은거였을 뿐, 이에야스는 '오고쇼(大御所)'로서 에도의 히데타다와 함께 이중 정치를 이끌며 막부 초기 정권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또한 외국인 고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해외 무역을 추진하고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씨의 위협을 제거하고 도쿠가와 쇼군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쇼군직을 양위했습니다. 슨푸에서 9년간 각계각층의 측근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새로운 통치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미카와 시절 원로들은 은퇴시키고 혼다 마사즈미, 나루세 마사나리 등 젊은 다이묘와 행정 전문가, 승려, 유학자, 경제 전문가, 외국인 등을 중용했습니다. 조선통신사 파견(1607년), 기유약조 체결(1609년) 등을 통해 외교를 중시하고 해외 무역을 장려했습니다.
1612
[기독교 금교령 발표, 종교 정책 강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기독교 금지 정책을 에도, 오사카, 교토에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이듬해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세력의 확산을 경계하고 중앙 통제를 강화하려는 막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해외 무역 확대를 위해 전교 활동을 묵인했지만, 기독교의 일부다처제 금지, 할복 금지, 다신교와의 대립 등이 막부를 긴장시켰습니다. 오카모토 다이하치 뇌물 사건과 도요토미 잔당 중 기독교도가 많다는 것을 명분으로 선교사와 신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불교 신도가 될 것을 강요하고 개종을 거부한 신자들을 추방했습니다. 1616년에는 유럽인의 거주 및 무역 지역을 히라도와 나가사키의 데지마 일대로 제한했습니다.
1614
[도요토미 씨 제거, 오사카 전투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리 측이 호코 사 대불전 종 명문의 내용(이에야스를 저주하는 내용으로 해석)이 불순하다는 주장을 빌미로 오사카 성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안정을 위해 잠재적인 위협 요소였던 도요토미 씨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이에야스의 마지막 계략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막대한 재산을 소모시키기 위해 신사, 사찰의 수리와 조영을 건의했고, 호코지 대불전 수리에 가장 많은 돈을 썼습니다. 완성 후 법종 명문 중 '국가안강 군신풍락' 구절이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갈라놓고 도요토미(豊臣)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이후 후다이/도자마 다이묘들에게 출진 명령을 내려 오사카 성을 포위했습니다.
1615
[오사카 성 함락, 도요토미 씨 멸문]
겨울 전투 후 강화 조건으로 오사카 성의 해자 매립을 약속받았으나, 이에야스는 안쪽 해자까지 파괴하며 히데요리를 자극했습니다.
결국 재개된 여름 전투에서 병력 우위와 내통자 활용으로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생모 요도도노가 자살함으로써 도요토미 씨는 완전히 멸문되었습니다.
이는 이에야스의 천하 통치에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한 사건입니다.
이에야스는 혼마루만을 남기고 해자를 매립하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안쪽 해자와 망루까지 파괴했습니다. 히데요리에게 야마토국 등으로 옮겨가도록 명령하여 자극했고, 히데요리 측의 교토 방화를 빌미로 1615년 4월 오사카 성을 다시 공격했습니다. 초반 사나다 유키무라의 분전으로 고전했으나, 유키무라 전사 후 성내 내통자와 손녀 센히메를 풀어주도록 압박하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1616
[일본을 바꾼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 서거]
매 사냥 중 얻은 복통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73세의 나이로 슨푸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일본 통일과 에도 막부 개창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뒤로 한 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사후에는 닛코 동조궁에 안치되었고, 도쇼다이곤겐으로 신격화되어 추앙받았습니다.
직접적인 사인은 위암, 매독, 각기병 등이 제시됩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유훈과 매장지에 대한 구체적인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해는 구노잔에 장사지낸 후 1주기가 되던 날 닛코로 옮겨졌고, 천황으로부터 도쇼다이곤겐이라는 신호가 부여되며 신격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