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청나라 황제, 중국 군주, 성군,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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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청나라 황제, 중국 군주, 성군,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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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제4대 황제이자 61년간 재위하며 역사상 최장 재위 군주로 기록됨. 오배 숙청 삼번의 난 진압 대만 복속 등 내부 혼란을 극복하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함.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몽골 및 티베트 정벌로 영토를 확장하고 북방 안정을 이룸. 유교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강희자전 편찬 등 문화 사업을 적극 지원하여 강건성세를 이끌었음. 검소한 생활과 백성을 위한 선정으로 섬기는 리더십의 모범을 보였으나 황태자 책봉 문제로 말년 황자들과의 갈등을 겪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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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

[강희제 아이신 교로 효완예이 출생]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아이신 교로 효완예이)가 순치제의 셋째 아들로 베이징 자금성 경인궁에서 태어났습니다.

순치 11년 음력 3월 18일, 북경 자금성 경인궁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강비 동가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현엽은 강비 동가씨의 유일한 소생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경인궁에서 어머니에게 금지옥엽처럼 키워졌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과 궁술에 뛰어나 문무를 겸전하여 순치제와 효장문황후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1660

[황태자 지명 (비공식)]

순치제의 넷째 아들이 요절하자, 현엽이 황태자 자리에 지명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총명함과 어머니의 집안 배경 덕분이었습니다.

7살 때인 순치 17년에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순치제가 제일 총애하던 황자가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가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순치제의 황후가 아들이 없자 총명한 현엽을 눈여겨보던 순치제가 그를 황태자로 삼은 것입니다.

[황태자 현엽, 천연두에서 회복]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면서 황태자 현엽도 천연두에 걸렸으나, 다행히 얼마 안 되어 회복하였습니다.

그 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지고 현비 동악씨가 천연두에 걸리자 순치제가 총애하던 현엽을 동악씨의 양자로 주려 했으나, 효장태후와 생모인 동가씨가 황위 계승자인 현엽이 천연두에 옮을 것을 염려하였기에 이에 완강히 반대하여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며 다행히 얼마 안 되어 나았습니다.

1661

[강희제, 청나라 제4대 황제 즉위]

부친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하자, 8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청나라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가 되었습니다.

1661년(순치 18년) 부친인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하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1722년(강희 61년)까지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청나라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을 가진 황제입니다. 유조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현엽을 청나라의 새 황제로 추대하니 이가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강희인황제입니다.

1662

[연호 '강희' 제정]

강희제 즉위 이듬해, 연호가 '순치'에서 '강희'로 바뀌었습니다. '강희'는 평화로운 조화를 뜻합니다.

1662년에 연호가 순치에서 강희로 바뀌었습니다. 이 새로 정한 연호인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煕)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강희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합니다.

[남명 영력제 사망 및 남명 멸망]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남명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과 오삼계에게 살해당하면서,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남명이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강희 원년인 1662년, 중국 서남부 운남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남명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 및 평서왕 오삼계에게 버마에서 처참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로써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고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1663

[효강장황후 동가씨 요절]

강희제 즉위 후 2년 만에 생모인 효강장황후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1667

[강희제, 친정 시작 및 황권 확립]

14살이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을 시작하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러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667년(강희 6년) 7월 14살이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습니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릅니다.

1669

[오배 제거로 황권 강화]

섭정대신 오배의 전횡이 심해지자 강희제는 선복영을 양성하여 오배를 체포하고 처형함으로써 권력 독점을 막고 황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 등을 규합하여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병을 양성하였습니다. 1669년(강희 8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려 오자 강희제는 기회를 틈타 선복영을 앞세워 오배를 체포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기만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습니다.

1671

[강희제, 조선에 '군약신강' 지적]

조선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강희제는 조선의 동지사에게 "신하가 강한 소치"라며 조선의 왕권 약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삼번의 난 중에 조선은 큰 기근이 들었는데 강희제는 1671년(강희 10년, 조선 현종 12년) 조선에서 온 동지사 복선군 이남에게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도록 하라."라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흔히 군약신강(君弱臣強)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당시 조선의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크다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비웃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673

[삼번 철번 명령]

강희제는 삼번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철번을 명령하였고, 이는 삼번의 난으로 이어졌습니다.

강희제는 삼번을 염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정남왕의 직위는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이 승계하였습니다. 강희제 즉위 무렵에는 이미 남명이 멸망하고 반청 세력이 일소된 상황이었으나 삼번은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번이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려는 청나라 조정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강희제는 철번을 승인하여도 모반할 것이고 불허하여도 모반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모반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삼번의 철번을 명하였습니다.

[오삼계, 삼번의 난 발발]

강희제의 철번 명령에 반발한 오삼계가 명나라 갑옷을 입고 반청복명을 외치며 거병, 9년간 이어진 삼번의 난이 시작되었습니다.

1673년(강희 12년) 7월 철번의 명이 내려지자 오삼계 등은 모반을 결정하였고 그 해 11월 오삼계는 명나라의 갑옷을 입고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이유로 거병하였습니다. 그러나, 영력제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오삼계 자신이었기 때문에 모반의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하여 명나라 황족을 옹립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중원 이남은 물론이고 섬서 몽골 등 여러 지역의 반청세력이 가담하여 전란이 확대된 후 삼번의 난은 9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674

[효성인황후 난산으로 붕어]

강희제의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가 둘째 황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은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효성인황후가 1674년(강희 13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였습니다.

1675

[윤잉, 황태자로 책봉]

효성인황후가 붕어하자, 강희제는 그녀의 아들인 윤잉을 황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이는 만주족 전통을 깨고 한족 전통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효성인황후가 1674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가 이듬해인 1675년(강희 14년)에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습니다. 이것은 본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었기에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유학을 숭상한 강희제는 이런 논의를 단호히 일축하였습니다.

1676

[삼번의 난, 전세 역전]

삼번의 난 중, 물자가 많은 조정에 전세가 유리해지자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이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했습니다.

삼번의 난 역시 곧 시간이 갈수록 물자가 많은 조정에 유리해져 갔고, 곳곳에서 도해·주배공 등 훌륭한 장수들과 팔기군의 활약으로 나태해진 삼번의 군사들을 대파할 수 있었습니다.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이들 한족 장수들은 만주족이 잘 모르는 삼번의 약점들을 잘 알아 더욱 손쉽게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1676년(강희 15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습니다.

1677

[황하 치수 공사 착수]

강희제는 황하의 범람으로 인한 농민 피해를 줄이고자 치수 공사에 착수했으며, 근보를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됩니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강희 16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습니다.

1678

[삼번의 난 맹주 오삼계 사망]

삼번의 맹주 오삼계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주'로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사망하면서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습니다.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고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죽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오삼계군의 군세는 크게 약해졌습니다.

1681

[삼번의 난 종결 및 황권 강화]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이 곤명에서 자살하고 청군이 곤명을 함락시키면서 9년에 걸친 삼번의 난이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이 반란 종결로 강희제는 황권과 군 통수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나라, 즉 오주(吳周)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昆明)에서 자살을 하고 청군이 곤명을 함락시킴으로써 9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끝이 났습니다. 이 반란 이후에 강희제는 번 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친왕들과 군왕들에게 최소한의 사병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녹영이나 팔기군에 배속시켜 친왕들의 군 지휘권을 거의 뺏어 버렸습니다. 이 반란은 강희제의 황권과 군 통수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1682

[갈단, 타림 분지 점령 및 세력 확장]

몽골 오이라트 부족의 갈단이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하여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습니다.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부족의 칸인 갈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습니다. 이미 갈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습니다.

1683

[대만 복속으로 중국 통일 완성]

시랑과 요계성을 통해 대만을 공격, 정극상이 청에 항복함으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습니다.

강희제는 과거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을 수군 총제독으로,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였던 당시의 복건 순무인 요계성을 병부상서 급의 권한을 가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을 점령할 작전을 세웠습니다. 강희제는 잘 훈련된 팔기 수군과 서양 선교사로부터 자문을 구해 만든 최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대만을 공격하였습니다.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과 그에 따른 대만 상륙에 결국 정극상은 1683년(강희 22년) 7월에 변발과 호복 차림으로 청에 항복하여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달성하였습니다.

1684

[황하 치수 공사 완성]

1677년에 착수했던 황하 치수 공사가 완성되어 황하의 범람을 막고 농민의 피해를 줄였습니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강희 16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으며 1684년(강희 23년)에 완성해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습니다.

1688

[준가르의 할하족 학살 및 원조 요청]

준가르 부족의 갈단이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부족민을 학살하자, 살아남은 할하족은 강희제에게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습니다.

1689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최초 평등 조약)]

러시아와의 국지적 충돌이 계속되자 강희제는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네르친스크에서 러시아와 조약을 맺게 했습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동북쪽의 넓은 영토를 얻었고,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국가 간 평등한 위치에서 맺은 조약이었습니다.

청군과 러시아군이 아무르강 부근에서 국지적으로 싸우고 휴전하기를 반복한 뒤에, 1689년(강희 28년)에 강희제는 영시위내대신이자 자신의 처숙인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을 보게 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청나라 대표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헤이룽강의 지류인 고르비트사강과 스타노보이산맥을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으로 확정 지으니,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중국사 이래 처음으로 국가간의 평등한 위치에서 맺은 조약으로서 당시 동양 국가들이 맺는 대국-소국 간의 조약과는 다른 유럽식 조약이었습니다.

1690

[강희제, 몽골 원정 친정]

준가르 군사들이 청나라 영토를 침략하자,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제들을 대동하고 팔기군을 이끌어 몽골 원정에 나섰습니다. 이는 명나라 영락제 이후 황제가 직접 고비 사막을 넘은 첫 원정이었습니다.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1692

[가톨릭 포교 허가 칙령 반포]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고 박해를 엄금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습니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선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1696

[차오모도 전투 대승, 준가르 격파]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습니다. 패한 갈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습니다.

1697

[준가르 칸 갈단 사망]

차오모도 전투에서 대패한 갈단은 알타이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습니다.

1696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습니다. 패한 갈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습니다.

1699

[경민황귀비 장기야씨 사망]

강희제의 후궁 경민황귀비 장기야씨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녀는 13황자 윤상의 생모입니다.

민비(敏妃) 경민황귀비(敬敏皇貴妃) 장기야 씨(章佳氏)는 169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1703

[색액도 사사, 황태자당 척결]

황태자 윤잉의 작은 외조부 색액도가 강희제 암살을 기도하자, 강희제는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하였습니다.

그중 이미 황태자 윤잉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윤잉의 작은외조부이자 이미 40여 년 전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는 자신을 위시로 한 태자당(太子黨)의 결성과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와 그 외숙부 납란명주를 위시로 한 황장자당의 결성으로 붕당이 시작되어 서로 조정의 주도권과 황위 후계권을 잡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태자당이 윤잉에게 알리지 않고 강희제를 암살하려 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1703년(강희 42년)에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해 처형하거나 유배보낸 뒤 윤잉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습니다.

1704

[교황, 중국 전례 금지 회칙 발표]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중국의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로 비판하며 중국 전례를 금지하는 회칙을 발표, 가톨릭 전례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나 천주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습니다.

1706

[가톨릭 선교사 국외 추방]

강희제는 교황의 전례 금지 회칙에 불쾌감을 표하며,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했습니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습니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습니다.

1708

[황태자 윤잉 1차 폐위]

주색잡기에 빠지고 나태해진 황태자 윤잉에게 실망한 강희제는 그를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宗人府)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윤잉을 폐위하고 태묘(太廟)에 고할 때, 강희제는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6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중풍에까지 들었다고 실록은 기록하였습니다.

1709

[황태자 윤잉 복위]

강희제는 윤잉을 총애했고 골육상쟁을 염려하여 이듬해 윤잉이 직접적인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켰습니다.

그러나 본래 윤잉을 총애하였고 황태자를 자리에 두고 골육상쟁을 염려한 강희제는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윤잉이 직접적으로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도리어 납란명주를 하옥시켰습니다.

1711

[인두세 동결 '성세자생인정' 공포]

강희제는 성인의 인두세를 동결하고 장정 수를 제한하는 성세자생인정 제도를 공포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였습니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습니다.

[대명세의 '문자의 옥' 발생]

한족 학자 대명세가 명나라 연호를 사용한 저서 《남산집》으로 인해 삼족이 처형당하는 '문자의 옥'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실제로 1711년(강희 50년)에 대명세라는 한족 학자가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여, 대명세의 삼족이 모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쳐 만주족에 비판적인 학자를 더욱 탄압하여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하였고, 비판한 책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거나 금서로 지정하였습니다.

1712

[황태자 윤잉 최종 폐위 및 저위비건법 시작]

황태자 윤잉이 강희제 순행 중 쿠데타를 기도하려다 발각되어 최종 폐위되었고, 강희제는 후계자 밀봉제인 '저위비건법'을 시작했습니다.

1712년(강희 51년)에 강희제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윤잉을 못미더워한 강희제가 윤잉이 북경에서 딴 마음을 품지 않나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북경을 비운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가 궁을 비웠으니 황태자였던 윤잉이 임시로 정무를 돌보았습니다. 그러나 윤잉은 음모를 꾸며 강희제가 북경으로 환도하면 강희제에게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자신이 찬위하겠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 사건은 확실히 윤잉이 주도한 역모였습니다. 이것을 눈치챈 북경의 대신들은 순행 중인 강희제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잉을 바로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냉궁인 함안궁에 가두고 폐서인하여 영원히 서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습니다. 강희제는 얼마 뒤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보관토록 하고 자신이 붕어한 뒤에 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입니다.

1715

[중국 전례 금지 회칙 재확인]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1704년에 발표했던 중국 전례 금지 회칙을 재확인하면서 강희제와 로마 교황청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나 천주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습니다.

1716

[《강희자전》 완성 및 중국어 어법 확립]

1711년에 시작된 《강희자전》 편찬 사업이 5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이 자전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문화적 업적입니다.

강희제는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습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습니다.

1717

[준가르, 티베트 점령]

준가르 부족의 칸 체왕 아랍단이 6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티베트를 점령하고 티베트의 왕 랍장을 살해하였습니다.

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귀족 툴리센을 남러시아 볼가강 하류에 살던 투르구트족에게 사절로 보냈습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갈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습니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습니다.

1720

[티베트 원정, 준가르 격퇴]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으로 준가르군은 티베트에서 패퇴하였고,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은둔하였습니다.

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습니다.

1721

[티베트 청나라 편입 및 가톨릭 선교 불법화]

청군은 켈장 갸초를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안정시켰습니다. 또한 강희제는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불법화했습니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습니다. 강희제는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선교는 불법화하였습니다.

1722

[강희제, '천수연' 개최]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아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등 3천여 명의 관리들을 자금성에 초대하여 '천수연'을 베풀었습니다.

1722년(강희 61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는 것을 기념하여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들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천수연은 이미 1713년(강희 52년) 강희제의 나이가 육순이 넘은 것을 기념하여 자신의 동년배인 대신들을 불러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열린 이 천수연에선 3000명 정도의 각기 다른 민족 출신의 신하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전직 재상들과 대신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습니다.

[강희제 붕어]

이궁인 창춘원에서 69세의 나이로 붕어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오한과 호흡 곤란이나 독살설 등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이를 호기로 삼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얼마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9세였습니다. 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라 하나, 일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며칠 뒤에 돌연사했다 하여,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724

[옹정제, 가톨릭 선교 전면 불법화]

강희제가 붕어한 뒤 아들 옹정제가 가톨릭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까지 마카오로 추방했습니다.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마카오(澳門)로 추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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