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비스마르크
정치가, 외교관, 재상, 군인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42:31
독일 통일의 아버지 철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가입니다. * 철혈 정책으로 주변국을 제압하며 독일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 유럽 외교 무대를 주도하며 세력 균형을 유지했습니다. * 세계 최초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해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815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탄생]
프로이센 쇤하우젠의 융커(지방호족) 집안에서 태어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훗날 독일 통일의 주역이자 '철의 재상'으로 불리며 유럽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그의 유년기는 포메른 지방의 광대한 영지에서 보내졌으며, 이는 훗날 그의 정치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융커 출신인 아버지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와 어머니 빌헬미네 멘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큰 형이 요절하여 사실상 차남으로 자랐습니다.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다음 해인 1816년, 가족은 포메른 지방의 크니프호프로 이주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낙후되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포메른에서 그는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깊은 신앙심은 훗날 그의 교회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822
[교도소라 불렀던 학교]
베를린 플라만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철저한 페스탈로치 방식의 교육에 비판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이 학교를 '교도소'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그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1822년 초 베를린의 플라만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이 학교의 강한 심신을 지향하는 교육 방식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이후 1827년부터 1832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과 그라우 수도원 부설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시기 그는 역사 과목을 제외한 모든 학과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고, 특히 언어 능력(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구사)이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에는 조용한 학생으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1832
[방탕한 청춘, 괴팅겐 대학교 시절]
17세의 나이로 괴팅겐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학문보다 대학 생활의 즐거움을 쫓아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25번 이상 결투를 벌여 여러 번 감금되기도 했으며, 고루한 강의 대신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 학업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1832년 4월, 비스마르크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5월 10일 괴팅겐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사관학교 진학을 바라던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랐습니다. 입학 후 학문적 명성보다 대학 생활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금지된 '결투'를 25번 이상 하여 대학교 내부 감옥에 여러 번 감금되었고, 고루한 대학 강의를 듣지 않고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 학업 중단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학교에서 헤렌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유럽 국가 체제에 대한 독창적인 관점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학업에 충실히 임했습니다.
1835
[법관시보, 그리고 첫사랑]
대학 졸업 후 법관시보 시험에 합격, 베를린과 아헨에서 실무를 익혔습니다.
이 시기 국제적인 사교 활동을 체험하며 클리블랜드 공작의 조카딸 러셀과 연인 관계가 되었으나, 1838년 러셀의 결혼으로 연애가 끝났습니다.
1835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 법관시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1835년부터 1836년까지 베를린과 아헨에서 실무를 익혔고, 아헨에서는 국제적인 사교활동의 역동성을 경험하며 클리블랜드 공작의 조카딸 러셀을 만나 연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첫사랑에 빠져 관료 직무를 유기하기도 했으며, 1837년 7월 초에는 소속 부서 허가 없이 그녀와 가족들과 장기간 여행을 떠났습니다. 1838년 러셀이 결혼하면서 그의 연애는 일방적으로 끝났습니다. 이후 외교관이 되고자 목표를 세웠고, 프로이센의 강제 규정에 따라 1838년부터 포츠담과 그라이프스발트에서 군복무를 하게 됩니다.
1839
[관료 생활에 질린 농장 경영주]
군복무를 마친 비스마르크는 관료주의적인 법정 생활에 싫증을 느껴 국가 관료 활동을 포기했습니다.
몇 년간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큐르츠에서 농장 경영주로 살아가며 역사, 철학서 등 다양한 독서로 사상을 수양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군복무 생활은 1839년 오순절에 끝났습니다. 법정 생활의 관료주의적인 관행 및 규칙적 업무에 싫증을 느껴 더 이상 국가 관료로 활동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는 당시 융커 귀족 사회에 널리 확산된 관료주의 체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몇 년간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큐르츠에서 농장 경영주로 살아가며 역사, 철학서는 물론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의 작품을 읽으며 자신만의 사상을 수양했습니다. 2200모르겐에 달하는 장원을 소유하고 44명의 소작농을 거느렸으며, 물려받은 부채를 빠르게 청산했습니다.
1844
[개성 존중! 14일 만에 사직]
포츠담 정부 관청에서 법률 관료 활동을 재개했으나, 편협한 직속상관과의 의견 충돌로 단 14일 만에 직을 그만두었습니다.
그의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성품이 고루한 관료 생활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842년 대영제국,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며 독서를 많이 했지만, 시골 생활에 불만을 느꼈습니다. 1844년 4월 7일 포츠담의 정부 관청에서 법률 관료로서 활동을 재개했으나, 편협한 직속상관과의 의견 충돌로 인해 14일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성품이 이런 고루한 관료 생활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847
[정계 진출의 첫걸음, 보수적 면모 드러내]
결혼 직전, 철도 건설 재원 마련을 위한 통합지방의회 보궐 의원으로 선출되며 정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이 의회에서 그는 왕권 및 융커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적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여 의원들의 반발을 샀지만, 이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결혼식 몇 주 전부터 비스마르크는 다시 공직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847년 5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철도 건설 재원 마련을 위해 공채 발행을 위한 통합의회 개원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융커들의 신임을 얻지 못해 직접 선출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보궐 의원으로 활동할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브라우휘트시 의원의 지병으로 1847년 5월 8일 작센의 통합지방의회 의원에 선출되었습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실제적 대의회였던 통합지방의회는 온건적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고, 비스마르크는 보수적 성향을 보이며 헌법을 인위적으로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과 국왕 및 융커 계층의 봉건적 관점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지방의회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이에 개의치 않고 국왕 및 귀족 계층의 권한 증대가 자신의 주된 과제임을 인식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참여한 통합지방의회는 철도 건설을 위한 공채 발행에 동의하지 않아 활동을 일찍 마쳤습니다.
[경건주의 신앙과 평생의 반려자]
경건주의 교우회와 교류하며 내면적 전환기를 맞았고, 친구의 부인이었던 마리 폰 타텐의 주선으로 요하나 폰 푸트카머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정치적 행보에 큰 영향을 미치며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주었습니다.
1843년 비스마르크는 경건주의 교우회와 빈번한 접촉을 했으며, 특히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의 교류를 통해 내면적 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당시 학창 시절 친구인 브란켄부르크의 부인이자 요하나와 친했던 마리 폰 타텐은 비기독교적이었던 비스마르크를 순화시키려 노력했고, 그 결과 비스마르크는 개신교 경건주의 신앙에 귀의했습니다. 마리 폰 타텐은 1844년 10월 4일 브란켄부르크와의 결혼 피로연에서 요하나를 비스마르크에게 소개했습니다. 마리 폰 타텐이 1846년 여름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비스마르크는 1846년 12월 21일 요하나와 결혼 의사를 밝혔고, 다음 해 7월 28일 23세의 요하나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동생에게 그녀를 '귀족적 성향을 가졌지만 편안한 평생의 반려자가 될 수 있는 여자'로 소개했으며, 이들 부부 사이에서는 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1848
[혁명 진압을 꿈꾼 비스마르크]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베를린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혁명 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자신의 소작농들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군사력을 통한 진압을 주장하며 국왕을 알현하려 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1848년 3월 13일, 프랑스 2월 혁명의 영향으로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에서 민중봉기가 발생했습니다. 3월 18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은 혁명의 열기에 위협을 느껴 자유주의적 제 권한을 보장하는 헌법 제정을 승인하고,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 주도 역할을 맡을 것이며 베를린 주둔 군대를 포츠담으로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군대의 우발적 발포로 상황이 급반전되어 격렬한 시가전이 펼쳐졌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하여 혁명 세력을 붕괴시키기 위해 자신의 충실한 소작농들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구상이 비현실적임을 파악한 후 포츠담에서 군부 핵심 인사들과 만나 반혁명적 소요의 당위성을 역설했으나, 국왕 명령 없이는 군사 행동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국왕을 알현하여 무력 진압을 주장했지만 거절당했고, 황족 인사들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계획을 포기하고 고향 쇤하우젠으로 돌아와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및 프로이센 지방의회 의원에 선출되지 못했음에도 간헐적으로 정치적 입장을 밝혔습니다. 1848년 8월 18일 지주의회에 참석하여 '무력으로 반혁명 세력을 타파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십자신문'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보수당 창당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1851
[외교 무대 데뷔, 오스트리아와 대립각]
외교 문외한이었던 그가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판단,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 증대를 위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했습니다.
1851년 5월 15일,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외교정책에 문외한이었던 비스마르크에게 대사 직책이 주어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는데, 레오폴드 게를라흐가 비스마르크만이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하여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적극 추천했습니다. 국왕 역시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성향과 역량을 파악하고 게를라흐의 제청을 수용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한 국가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인지하고,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높일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그는 독일 통일에 있어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을 주장했으나,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판단,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1859
[국제적 감각을 키운 외교 경험]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고,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으며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우호 관계 정립에 기여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국제적 외교 감각을 한층 성장시켰습니다.
1859년 1월 23일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었고, 3월 말 임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려 노력하며 자신의 관점을 현실화하는 데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어 러시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우호적 관계 정립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러시아 공사 임기를 마친 후 1862년 프랑스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근무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 그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외교적 업적으로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의 정책 운영 과정을 세밀히 관찰했습니다. 이는 훗날 비스마르크가 수상 취임 후 군제 개혁 과정에서 의회와의 충돌이나 1870년대 의회 내 반대 세력과의 대립 등 내정 문제를 외교적 업적으로 해결하려 한 데서 확인됩니다.
1862
[격동의 시기, 프로이센 수상으로 등극]
군비 확장 문제로 국왕과 의회가 대립하던 시기, 국방부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의 추천으로 수상에 임명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국왕 빌헬름 1세에게 의회의 기능을 무시한 독재의 한시적 도입을 강조하며 그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새로운 지배자 빌헬름 1세는 섭정 지위에 있을 때 전쟁장관 론과 육군 참모총장 몰트케에게 프로이센군 증강 방안을 지시했습니다. 론은 1860년 2월 10일 하원에 군사력 증강 계획과 예산 확보 방안을 제출했습니다. 내용은 신규 징병 규모 확대, 복무 기간 연장, 추가 군사비 지원 등이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은 예비역 축소가 해방전쟁의 전통과 시민-군대 결속 이념에 위배된다고 우려했습니다. 빌헬름 1세는 엄격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며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했습니다. 의회와의 충돌 시기, 론은 비스마르크만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 1862년 9월 18일 프랑스에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조속히 귀국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수상 임명에 회의적이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전보를 받자마자 베를린으로 출발했습니다. 9월 20일부터 바벨스베르크성에 머무르며 국왕과 의회 대립 상황을 파악했고, 9월 22일 빌헬름 1세와 독대하여 군제 개혁을 완수할 장관 취임 의사를 밝히고 '의회와 대립 과정에서 군주를 위험에 놓이게 하느니 차라리 그와 더불어 몰락하겠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또한 의회의 기능을 무시한 독재의 한시적 도입을 강조하여 빌헬름 1세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유명한 '철혈연설'로 '철의 수상' 별명 얻다!]
취임 후 예산위원회에서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유명한 '철혈연설'을 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그는 훗날 '철의 수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는 의회의 예산권을 무력화시키고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예산위원회에 군사비 항목이 삭감된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는 헌법에는 의회 해산권이 연달아 12번까지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온당치 않으며, 예산안 편성도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몇몇 의원들이 상비군이 무용하다고 주장하며 예산 불필요를 통과시키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헌법이 위기에 놓인 것은 명예로운 일이며, 여론은 바뀌는 법이고 신문 보도를 여론이라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민 대표 의원의 사명은 일반인의 목소리를 지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며, 군비가 빈약해도 이롭다면 익숙해지려는 정열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일이 현재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군비입니다.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하원의 반발로 차기 연도 예산이 확정되지 못하자,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 불일치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파악하고,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점이론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는 '프로이센이 영국이 아니므로 베를린 정부는 런던 정부처럼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헌법적 교착 상태 시 국왕만이 해결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도 밝혔습니다. 이후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의회의 예산권은 무력화되고 군제 개혁을 둘러싼 분쟁은 헌법 투쟁으로 비화되었습니다.
1863
[프로이센의 위상을 지키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소집한 독일연방 개혁 논의에 빌헬름 1세가 참석하려 하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위상만 높여줄 뿐'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의 사임 의사 표명으로 국왕은 결국 회의에 불참했고, 프로이센 없이 통과된 의안은 의미를 잃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예산 불승인에도 불구하고 조세 징수를 강행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납세 거부 호소는 비스마르크의 탄압을 강화시켜 자유주의 세력이 위축되었습니다. 1863년 8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독일연방의 개혁을 논의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체 독일 군주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주요 의제는 제후의회 소집, '5인 집정부' 설치, 300명의 의원으로 자문회의 구성 등이었으며, 대다수 독일권 국가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군주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조언에 따라 회의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재차 초청을 받자 빌헬름 1세의 결심이 흔들리자,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국왕이 회의에 참석할 경우 이는 단지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의 위상만 높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견해를 밝혔습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는 빌헬름 1세에게 큰 갈등이었습니다. 결국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의견에 따라 제후의회에 불참했고, 프로이센 국왕의 참여 없이 활동을 시작한 제후의회에서 오스트리아 빈 정부가 제출한 의안이 통과되었으나, 이는 프로이센의 참여 없이는 아무것도 성사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1864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전쟁]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습니다.
덴마크의 슐레스비히 공국 편입 시도에 맞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독일 통합과 연계시키려는 비스마르크의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1864년 2월 16일부터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덴마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가 1863년 11월 16일 슐레스비히 공국을 덴마크에 편입시키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 문제를 당시 제기되던 독일 통합과 연계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같은 해 8월 1일에 종료되었고, 덴마크의 소유령이면서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던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의 신탁통치하에 놓였습니다. 이 전쟁에서의 핵심적 역할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 국왕으로부터 백작 칭호를 받았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승리의 대가로 홀슈타인에 대한 신탁 통치권을 확보했는데, 이는 향후 프로이센과의 대립을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1865년 8월 14일 체결된 '가슈타인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 지방을 차지했습니다).
1866
[숙적 오스트리아를 굴복시키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통일에서 프로이센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자, '소독일주의' 통일을 위해 군비 강화를 단행하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중립을 확보하고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는 등 치밀한 외교 전략을 펼쳤습니다.
몰트케가 지휘한 프로이센 군대가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오스트리아를 압도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가 지향하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독일주의' 원칙에 따른 독일권의 통합을 지향했습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 하에 군사력 강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1865년 10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비밀리에 만나 보오전쟁 발발 시 프랑스의 중립을 약속받았고, 1866년 4월 8일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3개월간의 한시적 군사동맹 체제를 체결하여 오스트리아 패전 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지방 합병도 인정했습니다. 러시아 제국과의 친선 관계는 1859년부터 약 3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사로 근무했을 때 이미 구축된 상태였습니다. 1866년 5월 7일, 페르디난트 코헨블린트라는 대학생이 베를린 운터덴린덴 거리에서 비스마르크를 암살하려 몇 발의 총을 쏘았으나, 비스마르크는 기적적으로 부상을 입지 않았고 코헨블린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감옥에서 자살했습니다. 1866년 6월 21일,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 군대를 홀슈타인으로 출병시켜 보오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즉시 독일 연방의회를 개최하여 프로이센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대다수 국가를 자국 측에 가담시켰지만, 프로이센군의 신식 무기와 신속한 작전에 밀려 3주 만에 홀슈타인령을 상실했습니다. 7월 3일에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주력군대가 몰트케가 지휘한 프로이센 군대에 대패했습니다. 이 전투 후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1866년 8월 23일 오스트리아와 프라하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독일연방은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되었습니다. 한편, 쾨니히그레츠 전투가 시작되는 날 실시된 하원 선거에서 진보적 성향 정당은 참패하고 보수파가 대약진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862년 이후 예산 승인 없이 사용한 경비에 대해 '사후 승인'을 받는 안을 1866년 9월 3일 의회에 제출하여 다수결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과 타협하여 의회가 프로이센 국왕의 대권, 특히 군 통수권을 승인하고 군제 개혁도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1867
[독일 통일의 기반, 북독일 연방 창설]
독일 연방 해체 후, 마인강 이북의 22개 영방을 결속시켜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습니다.
단순한 연맹체가 아닌 중앙 권력을 갖춘 연방 국가의 성격을 가졌으며,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연방 의장을 맡아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했습니다.
이는 훗날 독일 제국 탄생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독일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일권은 마인강을 경계로 남북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1866년 10월부터 마인강 이북의 영방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연방 조직을 형성했습니다. 이에 따라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 쿠어헤센, 나사우 등을 포함한 22개 영방으로 구성된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습니다. 북독일 연방은 단순한 국가연맹체였던 독일 연방과는 달리 중앙 권력을 갖춘 연방 국가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연방 의장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차지했으며, 그에게는 국제법상 연방을 대표하고 전쟁과 평화를 선포하고 체결할 수 있는 권한, 연방군 최고 지휘권, 법률안 선포권, 연방 수상 임명권 등 여러 권한이 부여되었습니다. 연방 각 정부 대표로 구성된 연방참의원과 보통, 평등 선거에 의해 선출된 제국의회(라이히스타크)는 입법권을 장악했습니다. 따라서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권력 행사가 가능했습니다. 마인강 이남 지역에서는 정치적 통합이 실현되지 않았으나, 비스마르크는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등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 공수동맹을 맺고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야심에 대비했습니다. 1867년 개편된 관세동맹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에 결속시킬 수 있었고, 이는 관세 및 통상에 국한된 통합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남부 독일 대표들을 참여시킨 확대된 북독일 연방 및 프로이센이 군림하는 전 독일적 연방 국가의 원형이 창출되었습니다.
1870
[철혈 외교의 정점, 엠스 전보 사건]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로 프랑스와 프로이센 간 긴장이 고조되자, 비스마르크는 의도적으로 '엠스 전보 사건'을 조작하여 프랑스를 자극했습니다.
이는 보불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전에 남부 독일 국가들과 공수동맹을 맺고, 러시아 등 유럽 국가들로부터 중립을 약속받는 등 치밀한 외교 전략을 펼쳤습니다.
북독일 연방 결성 당시 독일권 상황 변화에 대해 프랑스는 강력한 통일 국가 등장에 부정적이었습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휴전을 주선하며 반대급부로 라인강 좌안 지역을 요구했습니다. 1866년 8월 프라하 조약 체결 당시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의 라인강 좌안지대 할양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네덜란드 지배하에 있던 룩셈부르크에 대한 프랑스의 야욕을 묵인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1867년 9월 네덜란드로부터 룩셈부르크를 매입하려 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용인하려 했음에도 북독일 연방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여론은 나폴레옹 3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영국의 중재로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으로서의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비스마르크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프랑스와 프로이센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 통합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1868년 스페인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가 쫓겨나자,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 계승을 제안했습니다.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전쟁의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고 판단,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여 1870년 6월 21일 수락 발표를 강행했습니다. 프랑스는 이에 반발하여 프로이센인의 스페인 왕위 계승 철회를 요구하는 문서를 보냈습니다. 7월 12일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레오폴드 공은 스페인의 왕이 되지 못했고, 스페인에서는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870년 7월 12일,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엠스 온천'에 머무르던 빌헬름 1세에게 '호헨촐레른 가문이 향후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받으려 했습니다.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대사의 무례한 행동을 즉시 비스마르크에게 알렸고, 비스마르크는 이를 왜곡시켜 발표했습니다. 즉, 프랑스 대사가 빌헬름 1세를 모욕했으므로 빌헬름 1세도 이에 맞대응하겠다는 내용으로 발표한 것인데, 이것이 유명한 '엠스 전보 사건'입니다. 이로써 양국 대립은 첨예화되었고 결국 보불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일찍부터 개전을 예견했던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에 따라 군사적 지원을 받았고,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전에 중립을 약속받았습니다.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명령한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습니다. 전쟁 시작 2개월도 채 안 된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이듬해 1871년 1월 29일 프랑스 수도 파리시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중립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가능한 빨리 전쟁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알자스-로렌 지방 할양 및 50억 프랑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종결시켰습니다.
1871
[평화 유지를 위한 치밀한 외교 전략]
통일 후에는 평화 애호가로 변모하여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삼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삼국 동맹 등 복잡한 동맹과 협상 관계를 체결하여 프랑스의 고립을 꾀하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 회의를 주재하며 '공정한 중재자'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있으면서 통일 독일의 내부를 통합시키려 했습니다. 통일 이후에는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노련한 외교 정책을 펼쳐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유럽의 세력 균형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삼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삼국 동맹, 이중보장조약 등 동맹과 협상 관계를 체결하여 숙적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히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터키 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 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가 아니면 유지하기 힘든 어려운 정책이었고, 비스마르크 사임 후 독일 제국은 그만한 역량을 갖춘 수상을 가지지 못해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 정책이 하나씩 허물어지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독일-오스트리아 동맹이 도화선이었습니다).
[최초의 통일 독일, 독일 제국 탄생!]
보불전쟁 승리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하며 '독일 제2제국'이 성립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초대 제국수상으로 임명되어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지는 강력한 권한으로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통일 독일은 4개의 왕국, 18개의 공국, 3개의 자유시 등 25개 국가와 2개의 제국령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습니다.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2제국'이라 불리는 독일제국이 성립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1871년 독일제국 제국수상이 되었고, 프로이센 수상도 겸임했습니다. 그는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행정적 책임을 졌기 때문에 황제와 더불어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북독일 연방 창설 이후 비스마르크를 지속적으로 지지해온 국민자유당은 제국 창건과 더불어 당세를 비약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의 절대적 지지를 토대로 경제 정책과 법률 정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871년 마르크를 통화 단위로 채택하고, 다음 해에는 은본위 제도를 금본위 제도로 전환시켰으며, 1875년에는 제국은행도 설립했습니다. 또한 각 지방마다 달랐던 도량형도 미터법으로 단일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법제적 통일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채택했습니다.
1872
[카톨릭 탄압 '문화투쟁' 선포]
남부 독일 중심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였습니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 영향력이 큰 프로이센에 대해 종교를 이유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국내에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특히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가톨릭 중앙당과 로마 가톨릭교회에 공격을 가했습니다. 1872년 이후 벌어진 이 투쟁을 '문화투쟁'(Kulturkampf)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투쟁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영향력이 큰 프로이센에 대해 종교를 이유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응해 수많은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원을 폐쇄하고 주교와 수사들을 구속했으며, 가톨릭 수도공동체인 예수회를 추방했습니다. 이에 맞서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교회를 지키려고 가톨릭 중앙당을 중심으로 뭉쳐서 저항했습니다. 이러한 가톨릭 교회 탄압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더욱이 독일 의회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에 맞서기 위해 보수정당인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가 필요해진 비스마르크는 교황 레오 13세와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문화투쟁에 대해 개신교 일부에서도 반대가 있었습니다.
1878
[채찍과 당근: 사회주의 탄압과 복지국가 기틀]
사회주의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는 한편, 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세계 최초로 건강보험(1883), 산업재해보험(1884), 노령연금·장애인연금보험(1889) 등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며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사회주의 곧 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민주주의자 탄압법(1878년)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정년제도 등의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증가했으며, 독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금지하는 법의 틈을 이용하여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탄압을 극복했습니다. 또한 보수당 일부에서도 비스마르크의 사회민주주의 탄압에 대해 반대가 있었습니다. 결국 사회민주주의 운동 탄압은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지만,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는 현대 독일 정부에서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기 전까지 그 원칙만큼은 사용되었습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80년대에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함으로써 독일이 정부가 시민의 복지를 책임지는 복지국가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가 시행한 사회보장제도는 건강보험(1883년), 산업재해보험(1884년), 노령연금, 장애인연금보험(1889년)이 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한 이유는 수입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국가에 불만을 갖지 않게 하여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보수정치가인 비스마르크가 사회 안정을 위해 복지국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복지국가를 좌파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얼마나 근거 없는지를 말해줍니다.
1884
[아프리카에 독일 식민지 개척]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 카메룬(1884), 독일령 동아프리카(1885, 현재 탄자니아), 독일령 남양 제도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재 나미비아) 등을 경영했습니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습니다.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카메룬(1884), 독일령 동아프리카(1885, 현재 탄자니아), 독일령 남양 제도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재 나미비아) 등을 경영했습니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으며, 비스마르크 시대 말기에는 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는 식민주의자가 늘어나 그를 중상하기도 했습니다. 독일령 동아프리카는 1918년에 영국, 프랑스, 벨기에에 할양되었고, 독일령 남양 제도는 미국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에 할양되었습니다.
1888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기반 흔들림]
91세의 빌헬름 1세 황제가 사망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황제와의 돈독한 관계가 효율적인 통치에 기여했다고 추모사를 낭독하며 정치적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888년 3월 9일 빌헬름 1세가 91세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같은 날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라이히스타크)에서 자신과 빌헬름 1세 사이 돈독한 연대감 때문에 제국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는 내용의 추모사를 낭독했습니다. 빌헬름 1세에 이어 독일 제국 황제로 등극한 프리드리히 3세는 후두암에 걸린 중환자였기 때문에 그의 시대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56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길지 않을 자신의 재위 기간을 고려하여 내정 및 외정에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인 빅토리아가 비스마르크와 불편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와 결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제국의 운영을 비스마르크에게 전적으로 위임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후두암으로 중병에 시달렸던 프리드리히 3세는 재위 99일만인 1888년 9월 15일에 사망했고, 29세의 혈기 왕성한 빌헬름 2세가 새로 제위에 즉위했습니다.
1890
[젊은 황제와의 충돌, '철의 재상' 정계 은퇴]
새로운 황제 빌헬름 2세와의 정책 갈등으로 사직하며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물러나면서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암시하는 발언으로 회자됩니다.
29세의 혈기 왕성한 빌헬름 2세가 새로 제위에 즉위하면서 평화주의자로서 전쟁과 폭력에 반대했던 비스마르크는 곧 황제와 충돌했습니다. 결국 1890년 3월 20일에 사직하며 정계 은퇴를 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물러나면서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1894
[말년의 비스마르크, 아내의 죽음과 회고록]
정계 은퇴 후 함부르크 인근 프리드리히스루에서 지내며 회고록 집필에 주력했습니다.
수많은 방문객들이 그를 '게르만의 영웅'으로 칭송했습니다.
부인 요하나 폰 푸트카머의 사망은 비스마르크에게 큰 충격과 건강 악화를 가져왔습니다.
정계 은퇴 이후 비스마르크는 바르친과 함부르크 인근의 프리드리히스루에서 지냈습니다. 이 시기 프리드리히스루를 찾은 수많은 방문객들이 비스마르크를 찾아가 경의를 표하며 그를 '게르만의 영웅'으로 간주했습니다. 1895년 4월 비스마르크가 80회 생일을 맞았을 때 이러한 찬사는 절정을 이루어, 450개 이상의 도시들이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고 수많은 전보와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연회에서 축하를 받았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다시 공직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개인 자격으로 정치 문제에 대해 언급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며 신문 사설 등을 통해 간헐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나타냈습니다. 1890년 10월부터 약 2년간 회고록 집필에 주력했습니다. 해임되고 정계 은퇴한 비스마르크는 이후에도 자신과 빌헬름 1세와의 돈독했던 관계를 강조하며 그 시대를 회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빌헬름 2세에 대한 개인적 비판은 자제했습니다. 1894년 12월 27일 비스마르크의 부인 요하나 폰 푸트카머가 바르친에서 사망했고, 부인의 죽음은 비스마르크에게 큰 충격이었고 건강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퇴임 이후에도 비스마르크는 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는데, 1896년 10월 24일자 함부르크 지역신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 체제 구축' 옹호와 '빌헬름 2세가 러시아와 맺은 재보장조약을 연장하지 않은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내용 등으로 사설을 게재했습니다.
1898
[독일 통일의 아버지, 영면에 들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83세의 나이로 영면했습니다.
빌헬름 2세가 국장을 제안했으나, 비스마르크 가족들은 그의 희망에 따라 정중히 거절하고 집 근처에 묻혔습니다.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과 달리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896년 접어들면서 건강이 악화되었고, 1898년 7월 30일 오후 11시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했습니다. 비스마르크가 임종을 맞았을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북해에 있었습니다. 북해에서 비스마르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빌헬름 2세는 급히 함부르크 인근의 작은 도시 프리드리히스루에 와서 비스마르크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가족에게 장례식을 국장으로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가족들은 그러한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비스마르크의 시신은 그의 희망에 따라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묻혔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비스마르크가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하고 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합니다. 수백 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 사회보장제도 기틀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반면, 자신의 정책 실현 과정에서 여론의 공감대를 얻으려 노력하지 않고 여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보였다는 점, 훗날 빌헬름 2세와의 갈등에서 대중이나 정당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철혈 재상'이라는 인상이 지나치게 강조된 측면이 있으며, 통일 후에는 평화주의적 정책으로 전환해 평화 유지에 힘썼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풍부한 감상적인 성향도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