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4세
러시아 군주, 차르, 모스크바 대공
최근 수정 시각 : 2025-10-24- 04:11:34
러시아 최초의 차르이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한 군주. 카잔 아스트라한 칸국을 병합하고 시베리아 진출의 길을 열어 세계 최대 규모의 영토 확장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이후 광기와 편집증에 사로잡혀 무자비한 공포정치(오프리치니나)와 대학살을 자행 뇌제라 불렸다. 말년에는 아들마저 살해하는 비극을 겪고 의문 속에 생을 마감했다.
1530
[이반 4세 탄생]
러시아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았던 군주 중 한 명이자, 훗날 '뇌제'라 불릴 이반 4세가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의 적장자로 태어나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을 알린다.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 엘레나 글린스카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1533
[3세의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 즉위]
아버지 바실리 3세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3세의 어린 나이에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하지만, 실권은 어머니 엘레나의 섭정에게 넘어간다.
이후 어머니마저 독살당하는 등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보낸다.
부친 바실리 3세가 다리에 생긴 종기의 염증으로 패혈증으로 사망하자, 이반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가 5년간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하였으나, 1538년 그녀 역시 의문의 독살을 당했다. 이후 이반은 자신을 구박하고 무시하는 보야르 귀족들에 의해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43
[첫 번째 복수: 귀족 처형으로 공포정치 예고]
어린 시절 자신을 학대하고 무시했던 유력 귀족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맹견에게 물어뜯겨 죽이도록 명령하며, 훗날 '뇌제'라 불리게 될 그의 잔혹하고 복수심 강한 성정을 드러낸다.
이 사건으로 귀족들은 이반을 두려워하고 경계하게 된다.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 두마 회의가 끝나자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하여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보내 맹견에게 물어뜯겨 죽게 했다. 이 일로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에게 친정을 청하기에 이른다.
1547
[러시아 '최초' 차르 칭호 사용, 차르국 시대 개막]
모스크바 대공에서 벗어나 비잔티움 황제의 대관식을 본떠 '차르(황제)'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통치자가 되어 러시아 차르국을 탄생시킨다.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서막이었다.
친정에 임하여 공식적으로 '최초'로 차르를 칭하고, 이후 러시아 군주의 공식 호칭이 되었다. 이후부터의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차르국'이라고 부른다. 이반은 동로마 제국의 계승자임을 선언하고 차르로서 가진 대관식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모델로 하여 거행했다.
1550
[러시아 '최초' 법전 편찬 및 중앙집권화 개혁]
러시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고 군대 개선, 지방 통치기관 재조직 등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을 단행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한다.
이반은 치세 초기 개혁에 착수하여 새로운 법전을 공포하고 군대를 개선한 뒤 지방통치기관을 재조직했다. 1547년 의회 제도를 도입하고 시민 대표자가 국정에 참여하거나 비평할 수 있게 하여 보야르와 드보랸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1553
[러시아 '최초' 인쇄소 설립 및 영국과의 통상 시작]
모스크바 크렘린에 러시아 '최초'의 인쇄소를 설립하여 성경 및 교리서적을 대량 발간하며 문맹 퇴치를 독려한다.
또한 영국과 백해를 통한 통상 관계를 개설하며 서방 세계와 교류를 시작한다.
이반 4세의 명령에 의해 모스크바 크렘린에 인쇄소가 설립되고, 독일에서 들여온 인쇄기가 '최초'로 모스크바에 소개되었다. 이후 성서와 동방 정교회의 교리서적 등이 대량으로 발간되었다. 1553년 리처드 챈슬러가 북동항로를 항해해 백해에 도착해 모스크바에 상륙했고, 이를 계기로 영국과 통상관계를 맺었다.
1558
[볼가강 지배권 획득 및 영토 확장 기틀 마련]
카잔 칸국(1552)과 아스트라한 칸국(1556)을 병합하며 볼가강 유역의 지배권을 확립, 동방 교역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는 훗날 러시아가 '세계 최대' 영토를 확장하는 기틀이 된다.
1552년 카잔 한국, 1556년 아스트라한 한국을 합병하며 볼가강의 지배권을 품어 동방 및 동남방 교역의 거점을 획득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는 다민족, 다종교의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560
[아내 아나스타샤 사망 후 광기 폭발]
가장 사랑했던 아내 아나스타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귀족들의 독살로 믿고 극심한 편집증과 광기에 사로잡힌다.
이는 대규모 숙청과 공포 정치의 시작점이 된다.
아내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사망하자, 이반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자신의 측근들에게 아내를 죽인 '사악한 간신들'에게 분개하며 자제심을 잃어갔다. 이후 반대 귀족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스탈린 시대에 아나스타샤의 관곽을 발굴한 결과 평균치 이상의 수은과 비소량이 검출되기도 했다.
1565
['오프리치니나' 체제 도입, 피의 숙청 시작]
자신의 사적 영지인 '오프리치니나'를 설정하고, 검은 제복을 입은 직속 친위대 '오프리치니크'를 창설하여 대귀족과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한다.
이로써 러시아에 공포의 10년을 몰고 온다.
국가를 그의 사적 영지 오프리치니나와 공적 국토 젬시치니나의 2개로 분할하고, 이반은 자신의 직속령에 모스크바에서 가장 풍부한 지역을 편입시켰다. 이반의 분노는 보야르, 왕족, 제후에까지 향해져 무자비한 처형과 재산 몰수가 이어졌다. 오프리치니크는 검은 제복을 착용하여 '흑위병', '검은 기사'로 불렸다.
1570
[노브고로드 대학살로 공포정치 절정]
자신에게 적대적이던 도시 노브고로드를 습격하여, 외국의 적과 내통한다는 명목으로 일주일간 6만 명에 달하는 주민을 온갖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한다.
이는 이반 뇌제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크 부대에게 명령하여 노브고로드 시민들을 엄벌하라고 지시했다. 모스크바 지역에 안 좋은 감정을 가졌고 이반 4세에게도 악감정을 가진 보야르들이 많이 살던 노브고로드에 불시에 습격, 1500여 명의 보야르와 그 가족들이 한꺼번에 사형을 당했다. 대공족, 성직자, 젠트리를 합한 6만 명을 항문에 말뚝을 박거나, 끓는 물에 던지거나, 기름을 넣은 큰 가마솥에 튀겨 죽이는 등 블라드 체페슈의 고문 사형 자료를 참고하여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1581
[아들 이반 살해, 지울 수 없는 오점]
임신한 며느리를 폭행하여 유산시킨 일로 격분한 아들 이반 왕자를 부지깽이로 때려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저지른다.
이 비극은 뇌제의 광기와 패륜의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임신한 며느리 엘레나가 얇은 옷을 입자 복장이 경박하다고 마구 때려 며느리는 유산되었다. 그러자 아들 이반 왕자는 왕손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것 때문에 분노하여 아버지를 저주했다. 이에 화가 난 차르는 부지깽이(또는 쇠꼬챙이)로 아들을 사정없이 패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된 아들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들은 결국 3일 뒤 죽었다.
1584
[이반 뇌제의 의문의 죽음]
체스 도중 쓰러져 사망했다는 설, 측근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 등 의문투성이 속에서 러시아 최초의 차르, 이반 뇌제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막을 내린다.
그의 죽음과 함께 류리크 왕조는 종말을 고한다.
이반 4세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가 죽기 전에 체스를 두다가 일어서던 중 갑자기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져서 그대로 사망했다는 설과, 시종 무관 이반 벨스키의 여동생을 겁탈하려다가 울면서 뛰쳐나오는 벨스키의 여동생을 본 벨스키와 보리스 고두노프가 이반 4세를 목 졸라 죽였다는 설이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표도르 1세가 요절하고 막내아들 드미트리가 살해당하며 류리크 왕조는 종말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