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군주, 여제, 계몽주의 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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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2: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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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군주, 여제, 계몽주의 시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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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독일 출신이나 러시아의 대여제로 불리며 역사를 바꾼 인물입니다. 무능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러시아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행정 및 문화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을 지지했으나 농노제 심화와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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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9

[예카테리나 2세의 탄생]

프로이센 슈테틴에서 귀족의 딸로 태어나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훗날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며 '예카테리나'라는 세례명을 얻게 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로이센군 소장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공작, 어머니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의 요한나 엘리자베트였습니다. 비록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교양과 체면을 중요시했던 어머니 덕분에 2살 때부터 프랑스어 가정교사에게 배우며 유창하게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합리적인 소녀로 성장했습니다.

1745

[표트르 3세와의 결혼]

러시아 제국의 제위 계승권자인 대공 카를 울리히(후일 표트르 3세)와 결혼하여 러시아의 황태자비이자 핀란드의 왕비라는 직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략결혼은 대부분 그러하듯 순탄치 못했습니다.

본래 황후 후보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어머니 요한나의 오빠가 옐리자베타 여제의 약혼자였던 인연으로 러시아 황태자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문화에 서툴렀음에도 러시아어 학습과 정교회 개종 등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반면, 지적 장애가 있었다고 여겨지는 남편 표트르는 독일풍을 고집하며 주위의 반감을 샀고, 두 사람은 각자 정부를 두며 18년간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1761

[표트르 3세의 황제 즉위]

옐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자, 그녀의 남편인 카를 울리히가 표트르 3세로 등극하여 러시아의 새 황제가 되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 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많은 국민의 감동을 샀습니다.

이 시기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고,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의 통치 능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귀족, 백성, 군부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힘썼습니다. 또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과 자주 만나 자신의 측근이자 지지자로 끌어들였습니다. 이는 훗날 정변의 기반이 됩니다.

1762

[예카테리나 2세, 쿠데타로 러시아 여제에 즉위]

황실 근위대의 힘을 빌려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하며 제위에 올랐습니다.

군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를 장악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 병영으로 가 연대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의 도움으로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습니다. 이어 대성당으로 향하면서 여러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합류했습니다. 일설에는 군복으로 남장하고 어전회의에 난입했다고도 전해집니다. 표트르 3세는 결국 유폐되었습니다.

[폐위된 표트르 3세의 암살]

제위에서 물러나 유폐되었던 전 황제 표트르 3세가 예카테리나 2세의 정부인 그레고리 오를로프의 손에 암살당했습니다.

이는 예카테리나의 정변 이후 8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표트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예카테리나의 황위 계승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의 공식 대관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하며 공식적으로 러시아 차르 예카테리나 2세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는 그녀의 통치력을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대관식에 이르자 대주교는 그녀의 즉위를 축복해주었습니다. 제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는 계몽 전제 군주를 자처하며 러시아를 유럽 정치 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녀는 예카테리나 1세가 지은 예카테리나 궁전이 지나치게 꾸밈이 많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총애하던 건축가 찰스 카메론을 불러 건물을 새로이 단장하고 '마노의 방'을 짓게 했습니다.

1767

[계몽주의 기반의 입법회의 소집과 실패]

자신의 이상에 맞는 개혁을 추진하고자 '입법회의'를 소집하고, 사회 각층 대표들을 위원으로 선임했습니다.

계몽주의 철학을 정치에 도입하려는 새로운 정치 원리를 해설하며 계몽군주로서의 평판을 얻었습니다.

이 회의는 성직자와 농노를 제외한 564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몽테스키외와 베카리아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참고했습니다. 그러나 권력 행사의 제약 요건인 3권 분립 이론은 받아들이지 않아 전제군주주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또한, 지주 계급이 농노에 대한 권한 제한 의도에 필사적으로 반발하면서 입법회의는 2년도 채 안 되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녀는 지배 계층과의 투쟁보다 그들의 요구에 순응하며, 몰수했던 교회 영지와 황실 영지 중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농노와 함께 신하들에게 분배했고, 농노제가 실시되지 않던 지역에도 농민들의 이동을 금지했습니다.

1768

[제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 발발]

동방정교회 민족 거주 지역을 확보하고 러시아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표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러시아의 영토 확장 정책의 중요한 시작점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1774년까지 이어졌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대외 정치에서 국내 문제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으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러시아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상업적 이득을 취했습니다.

1772

[제1차 폴란드 분할 참여]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제안으로 제1차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여 폴란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러시아의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 승리와 더불어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예카테리나의 재위 말기에는 러시아가 20만 평방 마일 이상의 영토를 넓히며 유럽의 대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1773

[푸카초프의 농민 반란 발발]

오랜 시간 누적된 농노제에 대한 불만이 푸카초프를 중심으로 폭발하여 대규모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농노제에 대항한 역사상 가장 큰 봉기 중 하나였습니다.

푸카초프는 자신이 폐위된 표트르 3세라고 주장하며 러시아 각지의 농민들과 타타르족, 마리족 등 소수 민족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반란군은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오렌부르크를 포위하는 등 러시아 전역에 위협적인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습니다.

1774

[러시아-투르크 전쟁 승리와 영토 확장]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제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성당을 재건하고 오스만 제국 지배하의 정교도들을 보호·관리하는 권리를 획득했습니다.

상업을 목적으로 보스포루스 및 다르다넬스 해협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권한도 얻었습니다.

이 승리는 러시아가 오랜 숙원이었던 남부 유럽으로의 진출 기반을 확보하는 데 큰 발판이 되었습니다. 또한 폴란드 분할 등으로 러시아는 서쪽과 남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20만 평방 마일 이상의 영토를 추가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확장된 영토의 직접 통치와 효과적인 지방 관리를 위해 29개 주를 재조직하는 행정 개혁도 추진했습니다.

[푸카초프 반란군에 대한 부분적 승리]

푸카초프 반란군을 부분적으로 격파하고 주력 부대를 우랄 지방으로 퇴각시켰습니다.

그러나 타타르족, 마리족 등이 합세한 바시키르 기병대가 다시 공격 태세를 갖춰 격렬한 접전이 이어졌습니다.

정부군이 급파되어 푸카초프 군대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는 과정에서 반란군은 수천 명의 병사를 잃고 결국 패배하여 우랄 연방관구 지역 너머로 도주했습니다. 이 봉기는 예카테리나 2세가 신봉하던 계몽 사상과 러시아의 현실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1775

[지방 행정 개혁 실시]

입법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지방 행정 개혁을 위한 '행정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이는 영국의 행정 시스템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러시아 내에 진보적인 성격의 집단 형성을 촉진했습니다.

이 개혁은 장 자크 루소나 볼테르 같은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을 선호하는 지식인들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책을 통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서유럽에 비해 뒤처진 러시아를 문명 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해 문학, 예술, 과학을 장려하고 대규모 예산을 교육에 투자하여 수많은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00개가 넘는 새 도시가 건설되거나 확장되었으며, 무역과 교통도 활발하게 발전했습니다.

1785

[귀족 특권 강화 및 법치주의 도입]

귀족 특권 인가장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도입하며 귀족들과의 협력 체제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귀족들의 납세 및 군사적 의무를 사실상 면제에 가깝게 만들었으며, 그 대가로 농민들에게 부담이 가중되어 농노제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농노들은 더욱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고, 특히 성격 파탄의 귀족들 휘하에서는 성적·폭력적 학대까지 감수해야 했으며, 도박장에서 돈 대신 거래되는 등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는 푸카초프 반란과 같은 농민 봉기의 근본 원인이 되었습니다.

1793

[프랑스 혁명 발발에 따른 사상 탄압]

프랑스 루이 16세의 처형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을 받고 젊은 시절의 자유주의 이념에서 등을 돌려 자유 사상을 강력하게 탄압했습니다.

또한 유럽 군주들에게 프랑스에 군주제를 부활시키자고 호소했습니다.

푸카초프의 반란에서 나타난 잔인성에 크게 충격을 받았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초기 계몽군주로서의 면모를 버리고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변모했습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지배층은 당황했고, 예카테리나 2세의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는 프랑스와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하며 강경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1796

[예카테리나 2세 서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차르스코예 셀로의 별궁에서 요양 중 67세의 나이로 서거했습니다.

그녀의 사망으로 러시아 '대여제'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예카테리나는 정신이 불안정하던 아들 파벨 1세 대신 총명한 손자 알렉산드르에게 계몽주의 교육을 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알렉산드르의 거절로 실패했습니다. 그녀가 편애했던 황손 알렉산드르가 바로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격퇴한 알렉산드르 1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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