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
프랑스 국왕, 군주, 혁명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4:08:38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마지막 국왕 루이 16세는 온화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함으로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만성적인 재정난을 해결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불만 속에 프랑스 대혁명을 맞이하며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마지막 루이라는 쓸쓸한 별명으로 역사에 남았다.
-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난 왕세손
- 왕세손으로 책봉되다
-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정략결혼
- 프랑스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다
- 미국 독립혁명 지원, 재정난 심화의 불씨
- 재정 위기 타개를 위한 명사회 소집
- 대흉작과 삼부회 소집 결정
- 프랑스, 국가 지불 정지 선언
- 175년 만에 삼부회 개최, 혁명의 서막
- 국민의회 결성, 평민의 반격
- 테니스 코트의 서약, 헌법 제정의 불굴의 의지
- 바스티유 습격, 프랑스 대혁명의 불꽃
- 봉건제 폐지, 새로운 사회의 시작
- 프랑스 인권 선언 발표, 혁명의 이념을 세우다
- 베르사유 여성 행진, 왕실의 파리 귀환
- 성직자 기본법 제정, 교회의 국가 공무원화
- 바렌 사건, 왕실 망명 시도와 국왕의 추락
- 샹 드 마르스의 학살, 공화정 요구 진압
- 입헌군주제 헌법 공포, 새로운 정치 체제
-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 혁명 전쟁 발발
- 브라운슈바이크 선언, 왕실 내통 의심 확산
- 8월 10일 사건, 군주제의 종말
- 9월 학살, 공포 정치의 서막
- 발미 전투 승리, 혁명 프랑스의 기적
- 국민공회, 군주제 폐지 및 공화정 선포
- 국가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된 루이 16세
- 국민공회, 루이 16세 유죄 판결
- 루이 16세, 단두대 사형 선고
- 루이 16세,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 처형
1754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난 왕세손]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의 셋째 아들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왕자 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 역사, 지리 등 다양한 학문을 습득했다.
특히 자물쇠 만들기를 즐겨 했다는 의외의 취미가 있었다.
1761
[형의 죽음, 왕위 계승의 그림자]
부활절 즈음, 루이 16세의 형인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가 암으로 사망하며 루이 16세는 왕위 계승 서열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1765
[왕세손으로 책봉되다]
11살의 나이에 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루이 16세는 할아버지 루이 15세의 뒤를 이을 왕세손에 봉해지며 어린 나이부터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1767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 마리아 요제파 폰 작센 공녀도 결핵으로 사망하며 루이 16세는 어린 나이에 연이은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1770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정략결혼]
오랜 적대 관계였던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간의 화해를 위한 정략결혼으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프랑스가 유럽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려는 시도였다.
결혼 후 7년간 자녀가 없어 외설적인 소문과 비난에 시달렸으며, 왕비는 '적자부인'이라 불릴 정도로 사치스럽다는 오해를 받았다. 1785년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왕비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혔으나 결백은 입증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의 왕비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1774
[프랑스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다]
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서거하자, 루이 16세는 만 19세의 나이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부터 선대부터 이어진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려야 했다.
1775
[미국 독립혁명 지원, 재정난 심화의 불씨]
프랑스는 영국 견제를 위해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는 프랑스에 승리보다는 막대한 전비 지출만을 안겨주며 국가 재정을 파탄 직전으로 내몰았다.
당시 프랑스는 이미 루이 14세 말기부터 시작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다]
루이 16세는 즉위 이듬해인 1775년, 프랑스 왕실의 전통에 따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1787
[재정 위기 타개를 위한 명사회 소집]
재정 파탄이 절망적인 수준에 이르자, 루이 16세는 160년 만에 144명의 귀족과 성직자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하여 세제 개혁을 논의했다.
그러나 특권층의 반대로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재무부 장관 칼론은 인지세와 토지세 인상, 특권 계급 과세를 제안했으나 명사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결국 칼론은 해임되고 새로운 채권 발행, 곡물 거래 자유화 등만 승인한 채 명사회는 5월에 해산되었다.
1788
[대흉작과 삼부회 소집 결정]
기후 악화로 인한 대흉작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재정난과 신분제 불만이 극에 달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삼부회 소집을 허락하며 위기 타개를 모색했다.
[프랑스, 국가 지불 정지 선언]
국고가 완전히 바닥나 프랑스 정부는 국가 지불 정지를 선언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재무부 장관 네케르 재기용]
약탈과 폭동이 빈번해지자 루이 16세는 브리엔을 해임하고 자크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여 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1789
[175년 만에 삼부회 개최, 혁명의 서막]
프랑스의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들이 베르사유 궁전에 모여 175년 만에 삼부회를 열었다.
그러나 초반부터 신분별 표결 방식을 놓고 의견이 충돌하며 난항이 거듭되었다.
[국민의회 결성, 평민의 반격]
삼부회의 파행이 장기화되자 제3신분 평민 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의 98%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별도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 헌법 제정의 불굴의 의지]
국민의회 해산을 명한 루이 16세에 맞서 평민 대표들은 베르사유 궁전 근처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다.
[국민의회, 제헌의회로 거듭나다]
평민 대표들은 '국민의회'를 스스로 '제헌의회'라고 선언하고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하며 혁명의 방향을 제시했다.
[시민 지지받던 네케르 해임, 민심 동요]
루이 16세가 시민들의 지지를 받던 네케르 재무부 장관을 해임하자, 파리 시민들은 크게 동요하며 제헌의회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바스티유 습격, 프랑스 대혁명의 불꽃]
절대 군주제와 구체제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파리 시민들에 의해 습격당했다.
이 사건은 본격적인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봉건제 폐지, 새로운 사회의 시작]
제헌의회는 전국적인 농민 반란과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봉건제 폐지를 선언했다.
이는 영주제, 농노제 폐지, 소득 비례 세금 납부 등을 골자로 하는 역사적인 개혁이었다.
[프랑스 인권 선언 발표, 혁명의 이념을 세우다]
제헌의회는 주권재민, 사상의 자유, 법 앞의 평등 등 새로운 사회 질서의 원칙을 제시하는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의 독립 혁명의 영향을 받아 혁명의 정의와 이념을 확고히 했다.
[플랑드르 연회 사건, 민중의 분노 폭발]
파리의 극심한 빵값 폭등과 서민들의 궁핍 속에서 베르사유에서는 플랑드르 군대를 위한 호화로운 연회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파리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베르사유 여성 행진, 왕실의 파리 귀환]
빵값 폭등에 분노한 7천여 명의 파리 여성들이 '빵을 달라' 외치며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했다.
이들의 요구에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재가하고 다음날 왕실 일가는 군중과 함께 파리로 이동, 튀틀리궁에 거주하며 시민들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교회 재산 국유화, 재정 위기 타개책]
국민의회는 심각한 재정 적자와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와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이를 담보로 공채인 아시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790
[성직자 기본법 제정, 교회의 국가 공무원화]
국민의회는 성직자 기본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하고 월급을 지급하는 등 교회를 국가 통제 하에 두려 했다.
교황 비오 6세는 이를 비난하며 일부 성직자들은 반혁명 운동에 가담했다.
1791
[바렌 사건, 왕실 망명 시도와 국왕의 추락]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국경 근처 바렌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이송,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이 사건은 파리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며 공화정 주장을 확산시켰다.
[샹 드 마르스의 학살, 공화정 요구 진압]
루이 16세의 왕권 복위에 반발하여 공화정을 주장하는 시위가 파리 샹 드 마르스에서 벌어졌으나, 국민방위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수십 명이 사망했다.
[필니츠 선언, 외국의 압박과 혁명의 역효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는 프랑스 왕실의 신변 안전을 돕기 위해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필니츠 선언을 통해 국민의회를 압박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파리 시민들의 반발을 사 루이 16세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
[입헌군주제 헌법 공포, 새로운 정치 체제]
능동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는 재산제한 선거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헌법이 공포되며 프랑스는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전환되었다.
[입법의회 구성, 혁명 세력의 분열]
새로운 헌법을 바탕으로 선출된 의원들로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중도파, 입헌군주제 지지 온건파(푀양파), 공화제 주장 급진파(자코뱅파) 등으로 나뉘며 정치적 스펙트럼이 형성되었다.
이때 푀양파가 우측에, 자코뱅파가 좌측에 앉으면서 온건 세력을 우파, 급진 세력을 좌파로 부르는 관행이 생겨났다.
179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동맹, 혁명 정부 압박]
프랑스 혁명 사상 전파를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대(對)프랑스 동맹을 체결하며 혁명 정부를 압박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 혁명 전쟁 발발]
루이 16세의 제의에 따라 입법의회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다.
각 계파의 이해관계 속에 시작된 이 전쟁은 프랑스 혁명의 방향을 크게 바꾸게 된다.
[루이 16세의 거부권 행사, 왕궁 습격의 빌미]
루이 16세가 입법의회의 법령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롱드파 대신들을 해임하자, 시민들은 패전의 원인이 왕실에 있다고 생각하며 반발했다.
[튀틀리 궁 1차 습격, 왕실의 권위 추락]
파리 시민들이 국왕의 거부권 행사에 반발하며 왕궁인 튀틀리 궁을 습격했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는 심한 모욕을 당하며 왕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선언, 왕실 내통 의심 확산]
프로이센군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파리 시민들에게 부르봉 왕실 모욕 시 파리를 무자비하게 응징하겠다고 협박성 선언을 했다.
이 선언은 오히려 왕실이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파리 시민들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며 분노를 극대화했다.
[8월 10일 사건, 군주제의 종말]
파리 시민과 의용군이 왕궁인 튀틀리 궁을 재차 공격했다.
루이 16세는 의회로 피신했으나 군중의 압박 속에 왕권이 중지되고, 국왕 일가는 탕플 탑에 유폐되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 군주제가 몰락하고 공화정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9월 학살, 공포 정치의 서막]
프로이센군 침입과 반혁명주의자들의 탈옥 풍문 속에 파리에서는 '9월 학살'이 벌어졌다.
감옥에 수감된 반혁명 용의자들이 즉결심판을 거쳐 잔인하게 학살당하며 공포 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발미 전투 승리, 혁명 프랑스의 기적]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한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 의용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혁명 프랑스의 사기를 드높이고, 공화정의 출발에 큰 힘이 되었다.
[국민공회, 군주제 폐지 및 공화정 선포]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소집되어 군주제를 폐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로써 루이 16세의 통치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국가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된 루이 16세]
프랑스 제1공화국 정부는 폐위된 국왕 루이 16세를 국가반역죄로 기소하며 재판을 시작했다.
그의 운명이 국민공회의 손에 달려 있었다.
1793
[국민공회, 루이 16세 유죄 판결]
국민공회 투표 결과, 루이 16세는 압도적인 표차로 국가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루이 16세, 단두대 사형 선고]
유죄 판결 직후 진행된 형량 결정 투표에서 루이 16세는 즉각적인 사형이 다수로 확정되었다.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는 국왕 처형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루이 16세,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 처형]
프랑스 혁명 정부에 의해 국가반역자로 선고받은 루이 16세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며 결백을 주장했고, '내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써 프랑스의 절대 군주 시대는 막을 내렸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참수되다]
루이 16세에 이어 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혁명 정부에 의해 참수당하며 프랑스 왕실의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