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왕족, 프랑스 왕비, 프랑스 혁명, 역사적 인물
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3:57:33
사치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 운명을 맞은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오스트리아 공주로 태어나 프랑스 왕가에 시집왔지만 혁명의 불길 속에서 적자부인으로 비난받으며 단두대에 올랐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거짓 소문과 함께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의 냉혹함과 대중의 오해를 보여줍니다.
1755
[오스트리아 여대공의 탄생]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15번째 자녀이자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릴 적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했습니다.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음악, 댄스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지만, 특히 프랑스어 학습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1762
[어린 모차르트의 즉석 청혼]
12살 소녀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엔나 궁정 음악회에서 넘어진 여섯 살 모차르트를 일으켜 주었고, 이에 모차르트가 그녀에게 즉석에서 청혼하는 귀여운 일화가 있었습니다.
1769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화해를 위한 약혼]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 강화를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6세와의 정략결혼을 추진했습니다.
6월, 루이 15세가 보낸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달되며 미래의 왕비 교육을 위한 프랑스 주교가 파견되었습니다.
1770
[14세 소녀, 프랑스 왕세손비가 되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 왕세손 루이 오귀스트(후일 루이 16세)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프랑스의 왕세손비가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찬가'가 불려질 정도로 성대하게 축복받은 행사였습니다.
1774
[왕비의 개인적인 낙원, 프티 트리아농]
루이 16세로부터 베르사유 정원 안의 작은 궁전, 프티 트리아농을 선물 받았습니다.
루소의 자연주의에 공감했던 왕비는 이곳을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여 답답한 궁정 생활의 소외감과 외로움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은 악성 소문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새로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남편 루이 오귀스트가 루이 16세로 즉위하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의 시선은 냉담했습니다.
1778
[왕실의 첫 자녀 탄생]
결혼 7년 만에 첫 딸 마리 테레즈가 태어났습니다.
이는 남편 루이 16세의 신체적 문제로 인한 동침 부재 루머를 잠재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781
[왕위 계승자, 루이 조제프의 탄생]
왕위 계승자인 아들 루이 조제프가 태어났습니다.
루이 16세는 간단한 수술 후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다른 왕들과 달리 첩을 두지 않았습니다.
1785
[프랑스 왕실을 뒤흔든 목걸이 스캔들]
왕비가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하려 했다는 희대의 사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재판 결과 왕비의 결백이 밝혀졌지만, 파리 시민들은 왕비가 누명을 씌웠다고 믿으며 그녀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폭발적으로 커지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왕정 위기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1786
1787
1789
[차기 왕위 계승자, 루이 조제프의 요절]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루이 조제프가 7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의 서막이 열리다]
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 해산을 시도하려 하자, 파리 시민들이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무기를 탈취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분노한 파리 여인들의 베르사유 행진]
전년도 흉작으로 치솟은 빵값과 왕실의 호화로운 연회 소식에 분노한 파리의 7천여 명의 여인들이 '빵을 달라' 외치며 베르사유 궁전으로 행진했습니다.
이들은 국왕 일가를 파리로 귀환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왕실은 파리 튀틀리 궁에 감금되다시피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1791
[왕실의 국외 도피 시도, 바렌 사건]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도로 왕실 일가가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시도했습니다.
대형 마차에 짐을 가득 싣고 몰래 파리를 빠져나왔으나, 느린 진행 속도와 소문으로 인해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다시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왕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습니다.
루이 16세는 국외 도피를 주저했으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메르시 대사를 통해 본국과 비밀리에 연락하며 망명을 계획했습니다. 페르센 백작의 도움으로 위조 여권을 손에 넣었지만, 너무 많은 짐과 인원(남편, 아이들, 시녀, 미용사까지) 동반으로 탈출이 곧 발각되었습니다. 왕실이 파리로 끌려온 후, 파리 코뮌은 루이 16세가 반혁명 측에 있다는 인식을 퍼뜨렸습니다.
[국민방위대에 의한 민중 시위 진압]
바렌 사건 이후 왕권 복위에 반발하여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민중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시위는 국민방위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수십 명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샹 드 마르스의 학살'이 발생했습니다.
[프랑스의 입헌군주제 시작]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었습니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 중심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려는 시도였습니다.
1792
[혁명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전쟁 선포]
프랑스 혁명 정부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대(對)프랑스 동맹 및 망명 귀족들의 반혁명 활동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20여 년간 지속될 프랑스 혁명 전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국왕 거부권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의 습격]
루이 16세가 입법의회의 개혁 법령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롱드파 대신들을 해임하자, 파리 시민들은 국왕에게 패전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며 왕궁인 튀틀리 궁을 습격했습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루이 16세는 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프랑스, 프로이센에도 전쟁 선포]
오스트리아에 이어 프로이센에도 선전포고를 하며 프랑스 혁명 전쟁의 전선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귀족 출신 장교들의 비협조로 프랑스군은 초기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습니다.
[군주제 몰락을 알린 튀틀리 궁 공격]
프로이센군의 프랑스 침공 위협과 왕실의 내통 의심에 분노한 파리 시민들과 의용군이 튀틀리 궁을 재차 공격했습니다.
격렬한 전투 끝에 루이 16세는 의회로 피신했고, 군중의 압박 속에 왕권이 중지되고 국왕 일가는 탕플 탑에 유폐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 군주제는 사실상 몰락했습니다.
[피로 물든 파리의 감옥, 9월 학살]
프로이센군 점령 위협과 반혁명주의자들의 감옥 탈출 소문에 파리 시민들이 감옥을 습격하여 죄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구였던 랑발르 공작 부인도 비참하게 살해당했으며, 그녀의 머리가 왕비에게 보여지는 충격적인 시위도 벌어졌습니다.
[프랑스 제1공화국 시대의 개막]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치러진 선거를 통해 국민공회가 소집되었고, 군주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다음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1791년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기되었습니다.
1793
[프랑스 국왕, 단두대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다]
혁명 재판소는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고, 그는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참수당했습니다.
이는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혁명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왕위 계승자, 어머니로부터 강제 분리]
왕위 계승자인 루이 샤를(루이 17세)이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 고모에게서 강제로 분리되었습니다.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왕비의 마지막 감옥, 콩세르쥬리로 이감]
루이 16세의 처형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악명 높은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되었습니다.
이곳은 그녀의 최종 재판과 처형을 기다리는 마지막 장소가 되었습니다.
[왕비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
공화주의에 물든 혁명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적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던 재판이었으며,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낙인 속에서 그녀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베르사유의 장미, 단두대에서 지다]
남편 루이 16세의 뒤를 따라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했습니다.
거름통 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갔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795
[비운의 왕위 계승자, 루이 17세의 죽음]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된 지 약 1년 반 후, 탕플 탑에 유폐되어 있던 루이 17세가 10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기의 또 다른 비극으로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