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

국왕, 절대군주, 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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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2- 03: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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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역사상 최장기인 72년 3개월간 왕위에 오른 프랑스의 절대군주이자 스스로 태양왕이라 칭했던 인물입니다.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귀족들을 통제하고 중상주의 정책으로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며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이힐을 최초로 신어 유행시킨 패셔니스타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했지만 동시에 국가 재정을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갔습니다. 예술과 문화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나 개신교 탄압으로 위그노 수십만 명을 해외로 내쫓는 아픈 역사도 남겼습니다. 그의 통치는 위대한 세기로 불리며 근세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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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

[기적의 탄생, 신의 선물]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23년간 후사가 없던 부모에게 '신의 선물'이라 불리며 기적처럼 찾아온 아들이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하느님이 주신 루이'라는 뜻의 '루이-디외돈'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 역사, 수학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지만, 특히 춤과 예술 분야에 큰 소질과 열정을 보였습니다. 7세부터 27세까지 20년간 매일 두 시간씩 춤 연습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643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다]

5세의 어린 나이에 부왕 루이 13세의 사망으로 프랑스 국왕에 즉위했습니다.

루이 13세는 생전 모후 안 도트리슈의 섭정을 금했지만, 모후는 선왕의 유언을 무효화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모후 안 도트리슈는 루이 13세의 유언에 반하여 파리 고등법원에서 자신의 섭정 위원회 폐지 및 유일한 섭정 취임을 관철시켰습니다. 이후 이탈리아 출신 쥘 마자랭 추기경을 중용하며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1648

[30년 전쟁 종결과 프랑스의 약진]

독일 지역의 신·구교 갈등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재상 마자랭의 외교적 활약으로 알자스-로렌 등 라인강 유역의 영토를 획득하며 유럽에서 위상을 높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독일 지역이 분열된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협이 사라져 프랑스의 국가 안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궁정에서는 왕비 안 도트리슈를 중심으로 음모가 끊이지 않았으나, 그녀는 아들 루이 14세의 국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프롱드의 난 발발: 왕권에 도전하는 반란]

베스트팔렌 조약 후에도 계속된 전쟁과 과도한 증세에 대한 불만이 커지자, 파리 고등법원이 왕실의 칙령 등록을 거부하며 법원의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프롱드의 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재상 마자랭이 반발을 주도한 법관 3명을 체포하자 파리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실은 이듬해인 1649년 1월 파리를 탈출해야만 했습니다. 반란은 여러 차례의 진압과 재발을 거듭했습니다.

1652

[프롱드의 난 종결과 왕의 트라우마]

5년에 걸친 혼란스러운 프롱드의 난이 마침내 종결되었습니다.

청소년기의 루이 14세는 이 반란으로 인해 한때 반란세력의 포로가 되는 등 큰 트라우마를 겪었으며, 이는 훗날 그의 강력한 절대주의 정책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왕실은 1649년 8월에야 파리로 돌아올 수 있었고, 반란은 콩데 공의 권세 상승과 마자랭과의 충돌, 그리고 귀족과 법관들의 연합으로 이어지며 복잡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결국 왕당파의 승리로 반란은 종결되었고, 마자랭은 이듬해 귀국하여 왕국의 질서를 회복시켰습니다.

1653

['태양왕'의 탄생: 발레로 신이 되다]

15세의 루이 14세는 장바티스트 륄리가 기획한 발레극 《밤의 발레》에서 태양의 신 아폴론으로 분장하여 '떠오르는 태양' 역할을 맡았습니다.

실추된 왕실 이미지를 회복하고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에게 왕의 권위와 위엄을 각인시키기 위한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담긴 공연이었습니다.

이 공연 이후 그는 '태양왕'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이 공연을 통해 자신이 악의 무리(프롱드의 난을 일으킨 귀족들)를 섬멸하고 백성들의 경배를 받는 신과 같은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13세에 처음 발레에 출연한 이래 1670년까지 19년간 27편 이상의 발레에 참여하며 연극과 무대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습니다.

1659

[피레네 조약: 스페인 왕위 계승을 노리다]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오랜 전쟁이 피레네 조약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부근의 국경을 수정했고,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딸 마리 테레즈의 결혼이 결정되었습니다.

프랑스 재상 마자랭은 스페인 왕가의 후계 단절 가능성을 간파하고 이 결혼을 통해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노리는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장성한 유일한 왕실 상속녀였으며, 스페인은 여성의 왕권 상속 전통이 있었습니다. 마자랭은 당시 전쟁으로 재정난을 겪던 스페인이 결혼 지참금을 완불하지 못할 것을 예상했으며,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친혼으로 인한 남성 직계 혈통 단절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1660

[스페인 공주와의 정략결혼]

피레네 조약에 의거하여 스페인 펠리페 4세의 딸 마리 테레즈와 정략결혼을 올렸습니다.

프랑스는 거액의 지참금(50만 에퀴)을 받는 대가로 스페인 왕위 계승권 포기를 조건으로 걸었으나, 이는 사실상 스페인 왕가의 재정난과 후계 상황을 고려할 때 이행 불가능한 조건이었습니다.

결혼 후 루이 14세는 왕비 마리 테레즈에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미모뿐 아니라 뛰어난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자신과 달리, 마리 테레즈는 인문학 소양이 부족하고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실한 신앙심으로 힘든 왕궁 생활을 견뎌냈다고 합니다.

1661

[왕의 연애: 첫 번째 연인, 제수씨 헨리에타 앤]

왕비 마리 테레즈가 임신하자, 루이 14세는 친동생의 부인이자 잉글랜드 찰스 2세의 여동생인 헨리에타 앤과 밀월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궁중에 소문이 퍼지자 헨리에타는 방패막이로 시녀 루이즈를 내세웠는데, 루이 14세는 루이즈와 사랑에 빠져 헨리에타와는 자연스레 멀어졌습니다.

헨리에타 앤은 동생 필리프의 양성애적인 결혼 생활에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와의 관계가 끝난 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1668년 6월 29일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남편 필리프의 애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부검 결과 콜레라로 발표되었습니다.

[절대왕정의 서막: 친정 체제 돌입]

재상 쥘 마자랭이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국정을 챙기는 실질적인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프롱드의 난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 충직한 관료조직, 막강한 재정 확충을 목표로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귀족과 법관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귀족 출신보다는 중산층 부르주아 출신을 중용했으며, 행정 및 관료 조직을 체계화하고 강화하여 중앙집권을 공고히 했습니다.

1665

[콜베르의 등장: 부국강병의 초석]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재무총감으로 임명하며 본격적인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콜베르는 수출 증대와 수입 억제를 추진하고, 국립 공장 설립, 무역 증진, 식민지 개척, 법률 통일, 세금 징수 제도 개선 등으로 왕실 재정을 정비하고 국부를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콜베르는 '콜베르 주의'라 불리는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국가 수입을 1660년대 4,500만 리브르에서 1억 리브르까지 급증시켰습니다. 또한 외국 기술자 유치, 개간 사업 확대, 관개 시설 확충 등 다방면에서 프랑스의 경제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1667

[상속 전쟁 발발: 저지대 국가를 노리다]

루이 14세의 장인이자 외삼촌인 스페인의 펠리페 4세가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비 마리 테레즈가 스페인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이임을 주장하며 저지대 국가의 일부 영토에 대한 계승권을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루이 14세는 직접 전쟁 캠페인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의 내부 갈등과 잉글랜드의 영란 전쟁 몰두는 루이 14세의 영토 확장 계획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프랑스군은 플랑드르와 프랑슈콩테를 빠르게 정복하며 승기를 잡았습니다.

[공식 정부, 몽테스팡 부인의 등장]

몽테스팡 부인이 27세의 나이로 루이 14세의 공식 정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으며, 루이 14세는 그녀의 남편을 바스티유 감옥에 가두고 그녀를 가까이 두었습니다.

그녀는 국왕과의 사이에서 6명이나 되는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몽테스팡 부인은 상당한 미모와 재치를 겸비하여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질투심이 강해 훗날 '독약사건'에 연루되어 국왕의 사랑을 잃고 몰락하게 됩니다. 그녀의 사생아들은 훗날 적자로 인정받아 왕실의 중요한 가문이 됩니다.

1668

[엑스라샤펠 조약과 동맹국의 견제]

프랑스의 빠른 성공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웨덴이 3국 동맹을 맺고 견제에 나서자, 루이 14세는 평화 조약에 동의했습니다.

엑스라샤펠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릴을 포함한 플랑드르 지역을 유지했으나, 프랑슈콩테는 스페인에 돌려주었습니다.

3국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고, 루이 14세는 이후 영국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어 네덜란드 공화국을 침략할 준비를 했습니다. 프랑스군 육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군의 기율을 바로잡고 진급제를 실시했으며, 상비군을 약 40만 명까지 늘렸습니다.

1672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발발]

찰스 2세와의 도버 밀약으로 잉글랜드를 아군으로 끌어들인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에 전쟁을 선포하며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빠르게 네덜란드 대부분을 점령했으나, 윌리엄 3세가 집권하며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등과 동맹을 맺어 대항했습니다.

이 전쟁은 양측의 외교적, 군사적 반전이 거듭되었지만,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세력에 맞서 찬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히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의 활약으로 알자스 외부와 라인강을 건너 제국군을 격퇴하며 지방을 회복했습니다.

1678

[네이메헌 조약: 프랑스 영향력 확대]

길고 피로한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이 네이메헌 조약으로 끝났습니다.

루이 14세는 포획한 네덜란드 영토를 반환하는 대신,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더 많은 도시와 관련 토지를 얻었으며, 몇 주 만에 포획했던 프랑슈콩테를 유지했습니다.

이 조약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시켰습니다.

네이메헌 조약에도 만족하지 못한 루이 14세는 재결합 회의소라는 사법 절차를 통해 조약의 모호한 성격을 이용하여 영토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알자스의 스트라스부르, 룩셈부르크, 카살레 등의 전략적 요충지를 획득했습니다.

1682

[베르사유 궁전 이전: 귀족 통제의 상징]

부친 루이 13세의 사냥터였던 베르사유를 웅장한 왕궁으로 개조한 후, 궁정 전체를 베르사유로 공식 이전했습니다.

이는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을 통해 지방 대귀족들을 국왕의 곁에 묶어두고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켜 왕권 강화를 이루려는 루이 14세의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이었습니다.

베르사유는 국정의 중심이자 수도와 국민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외국 고위 인사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귀족들은 국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값비싼 사치품의 삶을 살았고, 이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권력을 포기하고 국왕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1683

[왕비 마리 테레즈의 사망]

왕비 마리 테레즈가 사망했습니다.

루이 14세는 그녀의 사망에 대해 그녀가 자신을 고뇌에 빠지게 한 유일한 기회였다고 언급할 만큼 뒤늦게 슬퍼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죽음 후 루이 14세는 맹트농 후작부인과 비밀리에 결혼했습니다.

마리 테레즈의 사망 후 3개월이 지나자 루이 14세는 자신의 서자들을 돌보던 가정교사이자 영향력 있는 조언자였던 맹트농 후작부인과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분 차이로 인해 공식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실질적인 왕궁의 안주인 역할을 하며 루이 14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685

[퐁텐블로 칙령: 위그노 박해의 시작]

앙리 4세가 반포했던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 '낭트 칙령'을 철회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프랑스를 종교적, 문화적으로 통일하여 중앙집권과 절대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칙령에 따라 프랑스 내 개신교 학교와 예배당 시설이 폐쇄 및 철거되었고,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강제로 가톨릭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산업과 경제의 핵심이었던 20만 명 이상의 위그노(개신교인)들이 주변 국가로 망명하는 심각한 인재 유출을 겪었습니다.

1688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발발 (9년 전쟁)]

퐁텐블로 칙령 폐지로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독일 주들, 네덜란드, 스페인, 스웨덴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루이 14세는 팔츠 지역으로 군대를 보내며 '9년 전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 전쟁은 명예혁명으로 잉글랜드가 동맹에 가세하며 '대동맹'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라인강 유역, 이탈리아, 스페인 등 전선에서 스텡케르크 전투, 네르빈던 전투 등 여러 승리를 거두며 우위를 점했습니다.

1697

[레이스베이크 조약과 스페인 왕위 계승의 실마리]

길고 힘든 9년 전쟁이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종결되었습니다.

루이 14세는 룩셈부르크 등 점령지를 반환했으나, 알자스의 전략적 요충지인 스트라스부르는 유지했습니다.

이 조약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 드 프랑스 앙주 백작을 자신의 상속인으로 선언하도록 유도하는 친프랑스 감정을 심는 조항들을 포함했습니다.

프랑스는 또한 아이티의 법률상 소유를 인정받는 등 해외 식민지에서도 이득을 보았습니다. 조약의 관대한 조건들은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에 루이 14세의 손자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만드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700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발발: 마자랭의 큰 그림 실현]

후계자 없이 사망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유언에 따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백작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위(펠리페 5세)를 계승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 왕위까지 차지할 수 있다는 재상 마자랭의 오래된 노림수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섣부른 행동(프랑스에 스페인 식민지 노예 무역 허가, 제임스 프랜시스 스튜어트 지지)은 유럽의 주요 강대국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반발을 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촉발시켰습니다. 유럽의 세력 균형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704

[블레넘 전투 패배: 무적 신화의 균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이 블레넘 전투에서 존 처칠과 외젠 드 사부아카리냥 공자가 이끄는 동맹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이는 한때 무적이라 불리던 프랑스군의 신화가 깨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패배를 시작으로 라미예 전투, 토리노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 등 여러 전선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굴욕적인 패배를 겪으며 방어적인 자세로 전환해야 했습니다. 바이에른은 전쟁에서 축출되었고, 포르투갈과 사보이는 적대국으로 돌아섰습니다.

1712

[드냉 전투 승리: 전세 역전의 발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클로드루이엑토르 드 빌라르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외젠 드 사부아카라냥 공자 휘하의 동맹군에 결정적 승리를 거둔 드냉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승리로 루이 14세는 전쟁의 전세를 유리하게 돌리고 잃었던 영토와 자부심을 상당 부분 회복했습니다.

프랑스는 1709년 말플라크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패했지만, 동맹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드냉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유리한 위치에서 평화 협상을 재개할 수 있게 했습니다.

1713

[위트레흐트 조약: 스페인 왕위 문제 해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영국, 네덜란드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펠리페 5세가 스페인의 국왕으로 인정받았고, 프랑스는 일부 식민지를 영국에 할양했으나,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을 되돌리려던 동맹국의 거창한 계획은 무효화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714년에는 황제와 신성 로마 제국과의 라슈타트 조약, 바덴 조약으로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었습니다. 이로써 루이 14세의 외교적 승리로 스페인 왕위는 마리 테레즈의 손자인 펠리페 5세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1715

[태양왕, 영원히 잠들다]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이끌었던 루이 14세가 향년 76세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잦은 전쟁과 베르사유 궁전 건설 등으로 국가 부채가 20억 리브르에 달하는 등 재정 악화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뒤를 손자인 루이 15세가 이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스페인의 왕좌에 프랑스 왕가의 일원을 앉히며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유럽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끝냈습니다. 그의 다수의 전쟁과 호화스러운 궁전과 성들은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프랑스를 유럽에서 문화적, 언어적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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