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
군주, 왕족
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0:44:43
여섯 번의 결혼과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잉글랜드 교회를 분리시킨 것으로 유명한 잉글랜드 국왕이다.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전제군주제를 확립했으며 사치와 전쟁으로 재정난을 겪기도 했다. 웨일스를 통합하고 아일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말년에는 과체중과 질병으로 인해 편집증적인 폭군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 형 아서 튜더 사망 및 왕위 계승권자 등극
- 잉글랜드 왕립 해군 창설 및 근대화 시작
- 헨리 8세 왕위 계승
- 카탈리나와 결혼
- 성대한 대관식 거행
- 첫 아들 헨리(콘월 공작) 탄생
- 프랑스 침공 및 스퍼스 전투 승리
- 플로든 전투 승리
-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 공인 및 작위 부여
- 카탈리나 폐경, 아들 후계자 문제 부각
- 카탈리나와의 파혼 결심
- 교황 특사 파혼 불허
- 토머스 울지 몰락
-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 수장령 선포 및 교황 파문
- 앤 불린과 공식 결혼
- 엘리자베스 1세 탄생
- 웨일스 법 통과 (잉글랜드 통합)
- 제인 시모어와 약혼 및 결혼
-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 사망
- 마상 토너먼트 낙마 및 앤 불린 유산
- 불린가 남성들 처형 및 앤 불린 결혼 무효 선포
- 앤 불린 처형
- 은총의 순례 운동 발생
- 에드워드 6세 탄생
- 제인 시모어 사망
- 토마스 베켓 성소 파괴
- 클레페 공녀 아나와의 결혼 무효
- 클레페 공녀 아나와 결혼
- 토머스 크롬웰 처형 및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
- 남은 모든 수도원 해체 및 재산 몰수
- 아일랜드 국왕 즉위 선포
- 솔웨이 모스 전투 승리
- 캐서린 하워드 처형
- 캐서린 파와 결혼
- 왕위계승법 개정
- 불로뉴 함락
- 헨리 8세 사망
1491
[헨리 8세 출생]
튜더 왕가 두 번째 국왕 헨리 8세가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형 아서와 누나 마거릿, 동생 메리 튜더가 있었으나, 유아기를 넘겨 살아남은 형제는 이 네 남매뿐이었다.
1493
[어린 시절 명예직 작위 책봉]
두 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의 적자로서 도버 파수경, 육군 원수, 아일랜드 주둔군 부사령관 등 여러 명예직 작위에 책봉되었다.
이 작위들은 실제 권한이 아닌 잉글랜드 왕실의 관례에 따른 명예직이었다. 가장 중요한 작위는 요크 공작으로, 이는 적장자인 아서 튜더에게 내려진 웨일스 공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관례적 작위였다.
1495
[가터 훈장 수여]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작위와 훈장 수여는 연금 지급을 통해 왕족 각 개인에게 독립적인 자금을 수여하는 의미가 있었다.
1501
[형 아서 튜더 결혼식 참석]
형 아서 튜더와 스페인 이사벨 1세의 딸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의 결혼식에 요크 공작으로서 아버지 헨리 7세의 최측근으로 참석했다.
1502
[형 아서 튜더 사망 및 왕위 계승권자 등극]
카탈리나와 결혼한 지 불과 20주 만에 형 아서 튜더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로 인해 차남이었던 헨리 8세는 법정추정상속인인 왕위계승권자가 되었고, 2년 후 콘월 공작 및 웨일스 공의 지위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계승했다.
아서의 죽음은 아버지 헨리 7세에게 큰 충격이었고, 헨리 7세는 헨리 8세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아 정식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았다. 당시 헨리 8세는 '제왕학을 배우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를 계승하게 된' 왕자로 묘사되었다.
1503
[카탈리나와 약혼]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 유지를 위해 형수였던 카탈리나와 약혼했다.
당시 헨리 8세는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양국 군주의 정략 결혼 의지로 진행되었다.
카탈리나는 이사벨 1세 사망 후 스페인 귀국이 어려워지자 헨리 8세와의 재혼을 '신이 주신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헨리 8세는 한때 형수이자 나이 차이가 큰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거부했으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1506
[황금양모 기사 작위 수여]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황금양모 기사 작위를 수여받으며 양국 간의 우호적 관계가 희망되었다.
1509
[두 장관 처형 및 요크가 인사 석방·처형]
대관식 후 아버지 시절 장관이었던 리처드 엠슨과 에먼드 더들리를 반역죄로 처형했다.
이는 헨리 8세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신료를 축출하는 전형적인 지배 전략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엠슨과 더들리는 헨리 7세 시기 형벌 채권을 통해 고위 귀족을 몰락시키는 일을 담당했으나, 이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컸다. 헨리 8세는 이 책임을 두 장관에게 돌려 아버지의 허물을 감추고 불만 귀족들을 달랬으며, 굶주린 늑대 우리에 던져 넣는 잔혹함을 보였다. 한편 장미 전쟁 이후 잠재적 왕위 경쟁자였던 요크가 인물들 다수를 석방하고 사면했으나, 자신에게 충성할 인물들을 선별하여 사면했으며 그렇지 않은 에드워드와 리처드 드라폴 형제는 결국 참수했다.
[잉글랜드 왕립 해군 창설 및 근대화 시작]
잉글랜드 왕립 해군의 창시자로 불리며, 기존 해군을 대포를 장착한 화약 무기 기반의 근대적 해군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전함 건조용 조선소를 설립하여 해군을 상비군화하고, 전술을 중세의 백병전에서 원거리 대포 사격으로 변화시켰다. 메리로즈호와 같은 5백 톤 이상의 대형 군함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그의 해양위원회는 훗날 해군성으로 발전한다.
[카탈리나와 결혼]
즉위식 직후 그리니치의 수도원에서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는 교황청에까지 파혼을 탄원했던 이전의 입장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1510
1511
1512
[프랑스 대상 전쟁 선포]
교황 율리오 2세가 프랑스에 대항하는 '캉브레 신성 동맹'을 결성하자 이에 가담하며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대상 전쟁을 선포했다.
헨리 8세는 백년 전쟁 이후 잃었던 아키텐 영지를 얻어 자신의 야심을 실현할 출발점으로 삼고자 스페인과 함께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은 헨리 8세의 바램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513
[프랑스 침공 및 스퍼스 전투 승리]
프랑스를 침공하여 스퍼스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는 대대적으로 선전되었고, 헨리 8세는 테르완과 투르네를 점령했다.
헨리 8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하며 군사적 위엄을 과시했다. 교황 율리오 2세는 이 업적을 칭송하며 헨리 8세에게 '프랑스의 가장 기독교적인 왕'의 칭호를 약속했다.
[플로든 전투 승리]
국왕 부재 중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스코틀랜드 제임스 4세가 잉글랜드를 공격했으나, 잉글랜드군은 플로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스코틀랜드를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제임스 4세가 사망하여 스코틀랜드는 전쟁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514
[루이 12세와 평화조약 체결]
재정 고갈과 교황 율리오 2세의 사망으로 인한 교황 레오 10세의 화친 제의로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여동생 메리와 루이 12세 결혼]
루이 12세와의 평화조약의 일환으로 여동생 메리와 루이 12세가 결혼했다.
당시 루이 12세는 52세, 메리는 18세였다.
루이 12세는 결혼 3개월 만에 사망했고, 메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와 재혼했다. 루이 12세의 왕위는 아들 프랑수아 1세가 계승했다.
1515
1516
[엘리자베스 블라운트와 정부 관계 시작]
엘리자베스 블라운트와 약 3년 동안 정부 관계를 가졌다.
헨리 8세는 아내 외에 정부를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오히려 정부의 수가 적은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카탈리나는 헨리 8세가 정부를 두는 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딸 메리 1세 출산]
카탈리나가 딸 메리를 낳았다.
연이은 사산으로 소원해졌던 헨리 8세와 카탈리나의 관계가 메리의 출생으로 약간 개선되었다.
1518
[런던 조약 체결]
토머스 울지의 주도 아래 잉글랜드와 프랑스 및 합스부르크가 사이의 상호불가침 조약인 런던 조약이 체결되었다.
1519
1520
[금란의 들판 친선 회동]
프랑스의 칼레에서 멀지 않은 금란의 들판을 찾아 프랑수아 1세와 친선을 도모했다.
이는 일시적인 조치였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근본적인 영토 문제로 갈등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521
1525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 공인 및 작위 부여]
헨리 피츠로이를 자신의 아들로 공인하고 리치몬드 공작 작위를 부여했다.
카탈리나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던 헨리 8세는 만약을 대비하여 리치몬드 공작에게 계승권을 부여하는 왕위계승법 개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리치몬드 공작은 1536년 7월 자녀 없이 25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었다.
[카탈리나 폐경, 아들 후계자 문제 부각]
40세가 된 카탈리나가 폐경을 맞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 아들을 간절히 원하던 헨리 8세에게 후계자 문제가 중대한 위기로 다가왔다.
당시 잉글랜드는 여성이 군주가 된 전례가 거의 없었고, 여왕 즉위 시 튜더가 명맥이 끊길 것을 우려했다. 헨리 8세는 프랑스 왕위계승권도 주장하며 살리카법(여성 왕위계승 부정)을 근거로 아들 후계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파혼하고 젊은 여성과 재혼하는 것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선택했다.
1527
[카탈리나와의 파혼 결심]
카탈리나가 '신이 보시기에 황폐한' 상태로 더 이상 후계자를 낳을 수 없다고 확신하며 파혼을 결심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교황청의 승낙을 얻어 결혼 무효를 선언하고자 했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가 형 아서 튜더와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자신과의 결혼은 무효라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주장은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도 반박되는 논리였다.
1528
[교황 특사 파혼 불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파혼을 단호히 반대하자, 로렌초 캄페지오가 교황 특사로 런던에 파견되어 파혼 심판을 맡았으나, 교황의 의도대로 파혼을 불허했다.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의 이탈리아 패권 경쟁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고,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결별을 의미하는 헨리 8세의 파혼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1529
[토머스 울지 몰락]
로마에서 다시 열린 파혼 심판에서도 교황의 불허 결정이 확고하자, 헨리 8세는 분노하여 추기경이자 총리였던 토머스 울지에게 책임을 물었다.
울지는 '갑작스럽고 총체적인 총애의 철회'에 당혹스러워 했고, 결국 반역죄로 몰려 재판을 기다리다 사망했다. 헨리 8세는 잠시 직접 정부를 이끌다 토머스 모어를 새로운 추밀원 수장으로 선택했다.
1532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위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햄이 사망하자, 헨리 8세는 자신의 파혼 주장을 옹호해온 토머스 크랜머를 교황의 주교 서임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임명했다.
이는 중세부터 반복된 서임권 투쟁의 하나로 보였으며, 헨리 8세와 로마 교황청의 돌이킬 수 없는 대립의 시작을 알렸다.
41세의 헨리 8세는 프랑스의 협조를 확인한 뒤 도버로 돌아와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앤 불린은 임신했다.
1533
[수장령 선포 및 교황 파문]
교황은 그저 로마의 주교일 뿐이며 잉글랜드 교회는 그와 분리된 독자적인 교회라 선언하고, 잉글랜드 군주가 교회의 수장을 겸하는 수장령을 선포했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와 토머스 크랜머를 파문했다. 토머스 모어는 교회의 분리를 반대하다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성공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앤 불린과 공식 결혼]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카탈리나와의 파혼을 공식화하고 런던에서 앤 불린과 공식 결혼식을 올렸다.
[엘리자베스 1세 탄생]
앤 불린이 딸 엘리자베스를 출산했다.
헨리 8세는 실망했으나, 아직 30대 초반인 앤 불린이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접지 않았다.
딸의 이름은 헨리 8세의 어머니를 따라 엘리자베스라 지었다.
1534
[앤 불린 임신 실패 및 파혼 논의]
앤 불린의 임신이 상상임신 혹은 유산으로 끝나자, 헨리 8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와 총리 토머스 크롬웰을 불러 앤 불린과의 파혼 방법을 의논했다.
앤 불린은 결혼 후에도 헨리 8세가 다른 정부를 두는 것에 분노를 표하며 적을 만들었고, 헨리 8세는 점차 염증을 느꼈다.
1535
[웨일스 법 통과 (잉글랜드 통합)]
1535년과 1542년의 웨일스 법을 통해 웨일스를 잉글랜드의 하위 구역으로 완전히 통합했다.
웨일스는 13세기 이후 이미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독자적 영토로 간주되었는데, 이 합병으로 잉글랜드의 일부가 되었다.
1536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 사망]
첫 아내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가 병으로 사망했다.
헨리 8세는 딸 메리의 슬픔과 달리 기쁨을 감추지 않았으며, 다음날 노란색 옷을 입고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
[마상 토너먼트 낙마 및 앤 불린 유산]
마상 토너먼트 중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앤 불린은 심리적 충격으로 유산을 했고, 태아는 남자였다.
이 사건은 앤 불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 사고 이후 헨리 8세는 몸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어 급격히 살이 쪘고, 성격마저 변했다.
[불린가 남성들 처형 및 앤 불린 결혼 무효 선포]
앤 불린의 동생 존 불린을 비롯한 불린가 남성 5명이 앤 불린과의 간통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같은 날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 사이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포했다.
[리치몬드 공작 헨리 피츠로이 사망]
사생아 헨리 피츠로이가 25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사망하며, 헨리 8세가 그를 왕위 계승자로 고려하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은총의 순례 운동 발생]
가톨릭 복귀를 요구하는 '은총의 순례' 운동이 농민을 중심으로 잉글랜드 북부 전역으로 번지며 일부 귀족까지 합세하여 2만~4만 명 규모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헨리 8세는 요구를 숙고하겠다고 약속하여 농민들이 해산하자, 곧바로 주도자들을 체포하여 2백여 명을 처형했다.
1537
[제인 시모어 사망]
아들 에드워드를 출산한 제인 시모어가 산욕열로 사망했다.
헨리 8세는 그녀를 각별하게 여겨 말년에 자신도 옆에 묻어달라 유언했다.
1538
[총리 크롬웰의 유럽 결혼 동맹 협상]
헨리 8세는 새 아내를 유럽에서 찾기로 했고, 총리 토머스 크롬웰이 결혼 동맹을 위해 직접 유럽으로 향했다.
애초 헨리의 두 딸을 유럽 왕가에 보내는 것이 계획이었으나,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가 화친을 맺자 잉글랜드는 잠재적 위협에 직면했다. 헨리 8세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켄트에서 콘월까지 최첨단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데 집착했다.
[토마스 베켓 성소 파괴]
잉글랜드 교회의 개신교적 신앙을 공식화하기 위해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는 토마스 베켓 성소를 파괴했다.
이에 교황 바오로 3세는 다시 한번 헨리 8세를 파문하며 대응했다.
1539
[카를 5세와 비밀 동맹 체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헨리 8세는 대외 관계를 조정할 기회를 잡고 카를 5세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침공하고자 했다.
1540
[클레페 공녀 아나와의 결혼 무효]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아 결혼 무효의 여지가 남아있던 클레페 공녀 아나와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헨리 8세는 아나에게 '국왕의 누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장원과 연금을 제공하여, 아나가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나는 헨리 8세와 연관된 여성들 중 드물게 장수했다.
[클레페 공녀 아나와 결혼]
총리 크롬웰의 제안으로 클레페 공작가와의 결혼 동맹을 위해 클레페 공녀 아나와 결혼식을 치렀다.
헨리 8세는 한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를 보고 결혼을 승인했으나, 실물에 몹시 실망하며 '그림과 실제 인물이 이렇게 다른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불평했다.
[토머스 크롬웰 처형 및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
클레페 공녀 아나와의 결혼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총리 토머스 크롬웰을 처형했다.
같은 날, 헨리 8세는 아나의 시녀였던 노퍽 공작의 조카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했다.
크롬웰의 처형은 급진적인 개신교화 정책의 속도 조절과, 노퍽 공작과의 정치적 대립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젊은 새 왕비를 맞은 헨리 8세는 크롬웰에게 몰수한 재산과 많은 보석을 하워드에게 수여했다.
1542
[남은 모든 수도원 해체 및 재산 몰수]
아직 남아있는 모든 수도원을 해체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여 왕실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수도원 해체에 따라 잉글랜드 의회 상원의 절반을 차지하던 수도원장이 사라지고 주교들만 남게 되었다.
헨리 8세는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면서 스스로 아일랜드의 국왕을 자처하게 되었고, 이후 아일랜드 독립 전쟁까지 잉글랜드 국왕은 자동적으로 아일랜드 국왕을 겸임했다. 켈트족 영주들의 상황을 이용해 영지를 국왕에게 귀속시킨 뒤 충성 서약을 받고 봉토를 하사하는 등 지배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1543년 봉토 재분배 계획을 철회했다.
[솔웨이 모스 전투 승리]
프랑스 침공을 위한 배후 작업으로 스코틀랜드를 먼저 굴복시키기 위해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 여파로 조카였던 스코틀랜드 제임스 5세가 사망했고, 태어난 지 일주일에 불과했던 스코틀랜드 메리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543
[캐서린 하워드 처형]
캐서린 하워드가 결혼 후의 불륜 행각이 발각되어 참수되었다.
앤 불린의 전례에 따라 그녀와의 결혼 역시 무효로 선언되었다.
캐서린은 이미 여러 남성들과 얽혀 있었는데 결혼 후에도 토머스 컬페퍼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결혼 전 약혼했던 프란시스 더러햄을 가신으로 고용했다. 크랜머의 조사로 행적이 발각되었고, 더러햄의 폭로로 결국 셋 모두 처형되었다.
[캐서린 파와 결혼]
마지막 계비인 캐서린 파와 결혼했다.
캐서린 파는 독실한 개신교 신학 신봉자였고, 헨리 8세에게 보다 명확한 개신교 종교 개혁을 요청했다.
[스코틀랜드, 그리니치 조약 수락]
스코틀랜드는 그리니치 조약을 통해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의 메리 결혼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는 훗날 두 왕국의 공통 통치자가 될 후손을 위한 계획이었다.
[스코틀랜드 의회 그리니치 조약 거부]
스코틀랜드 의회가 그리니치 조약을 거부하며 헨리 8세의 에드워드-메리 결혼 계획이 불발되었다.
이후 8년 동안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와 '거친 구애'라 불리는 전쟁을 이어갔다.
1544
[왕위계승법 개정]
왕위계승법을 개정하여 제인 시모어와의 아들 에드워드와 그 후손에게 우선적인 왕위계승권을 부여하고, 후손이 없을 경우 메리와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계승서열을 지니도록 했다.
이로써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사생아가 아닌 적통의 자녀로 인정되었고, 헨리 8세 사망 이후 에드워드 6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차례로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캐서린 파는 이 개정을 위해 헨리 8세의 두 딸과 화해를 권했다.
[프랑스 침공]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이 길어지자 주저하던 프랑스 침공을 마침내 단행, 잉글랜드와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양갈래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전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헨리 8세는 자신이 직접 원정을 지휘했다.
[불로뉴 함락]
헨리 8세가 직접 지휘한 원정 끝에 프랑스 도시 불로뉴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미 재정 고갈로 파리 진격은 실현될 수 없었고, 카를 5세는 프랑스와 단독으로 화친을 맺었다.
1546
[프랑스와 화친 조약 체결]
단독으로 프랑스를 상대해야 할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와 화친 조약을 맺었다.
잉글랜드는 이 전쟁에서 65만 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사용하여 파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1547
[헨리 8세 사망]
화이트홀궁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유언에 따라 윈저성의 제인 시모어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말년에는 허리둘레 54인치에 달하는 고도비만 상태였고, 온몸에 종기가 생기고 고름이 나왔으며 통풍도 앓았다. 1536년 마상 토너먼트 사고 이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며 성격도 변했다. 그의 사인으로는 괴혈병이나 맥레오드 증후군 등이 추정된다. 왕위는 1544년 개정된 왕위계승법에 따라 에드워드 6세가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