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1세

동로마 황제, 법학자, 군사 전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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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19- 03: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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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건하려던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잃어버린 서방 영토를 되찾고 현대 법률의 기틀이 된 《로마법 대전》을 편찬했습니다. 비잔틴 예술의 정점인 아야 소피아를 세우며 38년간 제국에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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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

[시골 농부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의 탄생]

동로마 제국의 다르다니아 타우레시움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직업 군인이었던 삼촌 유스티누스 1세의 여동생이었습니다.

518

[황제 탄생의 조력자, 유스티니아누스]

후사 없이 사망한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 이후 혼란을 틈타 황제가 된 삼촌 유스티누스 1세를 보좌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통치 능력이 부족했기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전적으로 의지했으며, 그는 여러 행정 문제를 처리하며 사실상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519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화합에 기여]

484년부터 이어져 온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아카키우스 분열)을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교황 사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으로 양 교회의 분열이 끝났을 때, 유스티니아누스의 역할이 컸습니다.

524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 테오도라와의 결혼을 위한 법 개정 추진]

서커스 극단 배우 출신인 테오도라와 사랑에 빠졌으나, 당시 귀족은 평민과 결혼할 수 없다는 제국법에 가로막혔습니다.

특히 황후이자 외숙모인 유페미아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유페미아가 세상을 떠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삼촌을 설득해 법을 개정했습니다.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명한 배우였지만, 당시 배우는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녀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커스단 배우로 자랐으며, 한 고관과 살림을 차리다 버림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녀가 25살, 자신이 40살 때 만나 첫눈에 반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귀족 신분도 낮은 계급과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한 후, 테오도라와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525

[스캔들을 넘어선 세기의 결혼]

43세의 유스티니아누스는 28세의 테오도라와 마침내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당시 로마 사회를 뒤흔든 큰 스캔들이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에게 평생 의지하며 제국 통치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527

[로마법의 재탄생, 《로마법 대전》 편찬 시작]

유스티니아누스는 법치의 원칙을 세우고 법을 공평히 집행하기 위해 트레보니아누스를 법무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지휘 아래 로마법 대전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는 52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칙법휘찬》, 《학설휘찬》, 《법학제요》가 발표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로마법 대전》은 고대 로마에서 축적된 번잡하고 모호한 법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재편찬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이 법전은 사회의 모든 분쟁 상황을 법으로 규정했으며, 특히 여성의 권리를 상당 수준으로 끌어올려 남녀 신분 차이에 따른 결혼 제한 철폐, 지참금 강요 금지, 이혼 시 동등한 권리 부여, 성범죄 처벌 강화 등의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남성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습니다.

[황제 유스티누스 1세의 공동 황제 지명]

노쇠한 황제 유스티누스 1세는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며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식화했습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단독 황제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였습니다.

[38년간의 대장정 시작, 동로마 제국 단독 황제 즉위]

공동 황제로 임명된 지 한 달 후 삼촌 유스티누스 1세가 서거하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이후 38년간 제국을 통치하며 많은 업적을 쌓아 '대제'로 불리게 됩니다.

530

[페르시아와의 다라 전투에서 승리]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다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동방 전선에서 우위를 점했습니다.

이는 페르시아와의 오랜 갈등 속에서 중요한 승리였습니다.

531

[유프라테스강가의 칼리니쿰 전투에서 완패]

다라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유프라테스강가의 칼리니쿰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군에게 크게 패배했습니다.

이 패배는 동방 전선에 대한 제국의 전략을 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532

[제위를 뒤흔든 니카의 반란, 테오도라 황후의 결단으로 진압]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민 폭동 '니카의 반란'이 발생하여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위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습니다.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려던 황제에게 테오도라 황후는 "황제는 황제답게 떳떳하게 죽어야 합니다!"라고 일갈하며 도망을 막고, 벨리사리우스 등 장군들을 불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게 했습니다.

이 반란으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불타는 등 수도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반란은 대전차 경주의 팬덤인 청색당과 녹색당의 난투극에서 시작되었으나, 황제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원로원 등 지배 세력이 가담하며 황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폭동은 수도를 장악하고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며 하마터면 유스티니아누스를 폐위시킬 뻔했습니다.

[동방의 안전을 위한 페르시아와의 영구 평화 조약 체결]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패배 후, 보상금으로 1만 1,000파운드의 황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동쪽 변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 수복이라는 대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33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 정복을 위한 원정 시작]

친로마 정책을 폈던 반달 왕국의 힐데리크가 사촌 겔리메르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명분 삼아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북아프리카로 파견하여 반달 왕국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초기 아드 데키미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곧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준비했습니다.

534

[반달 왕국 완전 정복과 지중해 서부 통제 회복]

티카메론 전투에서 반달군을 격파하며 반달 왕국을 완전히 항복시켰습니다.

이어서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제국의 지배로 다시 편입시켰습니다.

이 영토 확장은 제국의 연간 수입을 백만 솔리두스 이상 증가시키며 지중해 서부에 대한 로마의 통제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업적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대표적인 '제국의 복원(Renovatio Imperii)' 계획의 일환으로,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부분적으로 회복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아프리카 수복 기념 주화가 발행될 정도로 대대적인 승리였습니다.

535

[이탈리아 수복을 위한 첫 번째 이탈리아 원정 시작]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에서 왕위 내분이 일어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이탈리아 수복의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벨리사리우스를 이탈리아로 파견하여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게 했습니다.

536

[이탈리아 남부 요충지, 나폴리 회복]

이탈리아 원정 중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재빨리 나폴리를 회복하며 이탈리아 본토 공략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는 로마로 가는 길목의 주요 요충지를 확보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영원한 도시 로마를 제국의 품으로 되찾다]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마침내 영원한 도시 로마를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수복하며, 옛 서로마 제국의 심장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이는 '제국의 복원'이라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숙원 달성에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537

[비잔틴 건축의 정점, 아야 소피아 대성당 완공]

니카의 반란으로 파괴된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여 세계유산이자 비잔틴 건축의 정점인 아야 소피아 대성당을 완공했습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위대한 건축 사업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아야 소피아 외에도 대규모 건축 계획을 수립하여 수로, 교량 건설,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 재건, 중요한 요새 및 방어진지 건설 등 광범위한 토목 공사를 실시했습니다. 또한 수도원, 고아원 등의 건물도 많이 지었습니다.

[로마를 지켜낸 대규모 방어전]

동고트족이 비티게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대군을 모아 로마를 포위 공격했으나, 벨리사리우스는 잘 막아내어 로마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습니다.

이 포위전은 538년 봄까지 이어졌습니다.

538

[교황권 확립의 시발점]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보호 아래 교황 비질리우스가 교황의 보좌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은 로마의 교회 감독이 전 세계 기독교회의 머리이자 교리의 확정자, 이단을 처벌하는 권위자로 부상한 시발점으로 간주됩니다.

540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 점령, 의심받는 명장 벨리사리우스]

벨리사리우스는 동고트 왕국의 수도 라벤나를 점령하며 이탈리아 수복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벨리사리우스의 인기를 시기하고 의심하여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했습니다.

[동방의 위협,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 시작]

유스티니아누스가 이탈리아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우 1세가 이전의 협정을 깨고 메소포타미아, 북부 시리아, 로마령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며 동방 전선에 위협을 가했습니다.

541

[사산조 페르시아, 흑해 연안 라지카 침공]

사산조 페르시아의 호스로우 1세가 흑해 동안의 중요한 요충지인 라지카(콜치스)를 침공했습니다.

이 침공은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긴 전쟁의 시작을 알렸으며, 동방 전선은 더욱 불안정해졌습니다.

542

[죽음의 그림자,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과 황후의 결단]

선페스트로 인한 역병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덮쳐 재무관을 포함한 23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마저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자, 테오도라 황후는 수도의 근위병 통제를 강화하고 황제 사후를 논의하던 벨리사리우스 등 장군들을 숙청하여 모반의 여지를 없앴습니다.

황제는 기적적으로 회복했습니다.

543

[동방 전선을 휩쓴 역병, 로마군 큰 피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전염병이 로마군을 덮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는 전쟁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제국의 자원 소모를 가속화했습니다.

544

[벨리사리우스 이탈리아 재투입 및 종교 갈등 심화]

동부 전선에 있던 벨리사리우스가 다시 이탈리아로 투입되어 동고트족에 맞섰으나, 황제의 병력과 지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동시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칼케돈 공의회와 단성론자 모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삼장서》를 비판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서방교회의 반발과 교황 비질리오와의 충돌을 야기하며 종교적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545

[동방 전선의 일시적 평화, 5년간의 휴전협정]

사산조 페르시아와 5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었습니다.

로마는 5000파운드의 황금을 지불하고,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령을 침공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이는 장기적인 동방 전선의 안정을 위한 일시적인 조치였습니다.

548

[황제의 든든한 조력자, 테오도라 황후의 죽음]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평생 큰 힘이 되었던 테오도라 황후가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죽음 이후 황제는 종교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통치를 소홀히 했고, 유능한 장군들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551

[라지카 분쟁이 남은 페르시아와의 휴전 갱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휴전조약이 갱신되었으나, 페르시아인들이 라지카의 반환을 완강히 거부하여 라지카 지역에서는 계속해서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습니다.

이는 완전한 평화가 아직 요원함을 보여주었습니다.

552

[이탈리아 수복의 숙원 달성, 동고트 왕국 섬멸]

벨리사리우스가 교체된 후 나르세스 장군이 우세한 병력과 지원으로 동고트족을 몰아내고 라벤나를 재탈환하여 동고트 왕국을 섬멸했습니다.

이로써 이탈리아를 수복하려던 유스티니아누스의 오랜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로마 제국 최대 판도 달성, 히스파니아 남부 수복]

로마는 서고트족의 히스파니아를 침공하여 카르타헤나를 비롯한 남부 히스파니아의 몇몇 도시를 회복했습니다.

이 원정으로 중세 로마 제국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며 최대 판도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후 바로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습니다.

557

[라지카 분쟁 해결을 포함한 페르시아와의 휴전 갱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휴전협정이 다시 갱신되었으며, 이번에는 오랜 분쟁 지역이었던 라지카까지 휴전이 적용되었습니다.

이는 동방과의 관계에서 더 큰 안정감을 가져왔습니다.

559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구원한 벨리사리우스]

발칸반도로부터 밀려온 슬라브족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침공해오는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때 다시 투입된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슬라브족을 물리쳐 제국을 구원했습니다.

561

[북방 침략과 페르시아와의 최종 평화 조약]

아바르족이 침공해왔으나 보상금을 받고 물러났습니다.

또한, 사산조 페르시아와 50년간의 휴전협정이 마침내 타결되었습니다.

로마는 연간 3만 솔리디의 공물을 바치고, 페르시아는 북방 침략자를 막아주는 라지카에 대한 모든 권리 주장을 철회했습니다.

564

[말년의 종교 문제 심화, 가현설적 칙령 발표]

재위 말년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는 공적인 일에서 물러나 신학적인 문제에 몰두했으며, 예수의 인성은 신성에 흡수되어 육체가 썩지 않으며 십자가에서는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가현설적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565

[제국의 영광을 꿈꾼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서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서거했습니다.

자식이 없었기에 그의 여동생의 아들이자 테오도라의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한 유스티누스 2세가 다음 제위를 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건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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