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쟁쿠르 전투
전투, 군사 역사, 백년전쟁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4:45
아쟁쿠르 전투는 백년전쟁의 판도를 바꾼 잉글랜드의 결정적인 승리입니다. 헨리 5세가 이끈 잉글랜드군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프랑스군을 진흙투성이의 좁은 전장에서 뛰어난 장궁병 전술로 격파하며 불리한 상황을 뒤집는 역사적인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1415
[프랑스 침공 결정]
잉글랜드 헨리 5세는 프랑스와의 왕위 계승권 및 영토 문제에 대한 협상이 결렬되자, 의회의 승인을 얻어 프랑스 침공을 결정했습니다.
잉글랜드 헨리 5세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3세로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와 협상에 나섰습니다. 아키텐, 노르망디 등 광대한 영토와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프랑스는 터무니없는 조건이라며 거부했습니다. 이에 헨리 5세는 1414년 12월 의회를 설득해 전쟁 자금을 확보하고, 1415년 4월 19일 최종적으로 프랑스 침공을 위한 의회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프랑스 상륙 및 칼레 진군]
헨리 5세는 약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프랑스에 상륙, 하르플뢰르 항구를 공략했습니다.
한 달이 넘는 공성전 끝에 9월 22일 항복을 받아냈으나, 병력 손실이 커 겨울나기 위해 칼레로 이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415년 8월 13일, 잉글랜드 헨리 5세의 군대가 프랑스 북부에 상륙하여 전략적 요충지 하르플뢰르를 포위했습니다. 한 달이 넘는 공성전 끝에 9월 22일 하르플뢰르를 함락시켰으나, 전염병 등으로 많은 병사를 잃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헨리 5세는 병력을 보전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거점인 칼레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약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군은 솜강에서 잉글랜드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추격에 나섰습니다.
[아쟁쿠르 대치]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은 아쟁쿠르 근교에서 대치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병력을 더 모으려 전투를 피했지만, 헨리 5세는 지쳐있던 병사들을 이끌고 프랑스군에게 진군하여 전투를 강요했습니다.
칼레로 향하던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은 아쟁쿠르 근교에서 프랑스군과 마주했습니다. 프랑스군은 더 많은 병력을 모으기 위해 전투를 회피하며 대치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잉글랜드군은 오랜 행군과 질병으로 지쳐있었고 식량도 부족했지만, 헨리 5세는 더 지체하면 프랑스군에게 증원군이 합류할 것을 우려해 다음날 아침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 발발]
백년전쟁의 핵심 전투인 아쟁쿠르 전투가 성 크리스핀의 날, 프랑스 아쟁쿠르에서 벌어졌습니다.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이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좁고 진흙투성이인 지형과 잉글랜드 장궁병의 활약이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1415년 10월 25일, 프랑스 아쟁쿠르에서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이 격돌했습니다. 잉글랜드군은 약 6천 명으로, 프랑스군의 2만~3만 6천 명에 비해 최대 6배나 적은 수였습니다. 전투는 좁고 진흙투성이인 지형에서 진행되었고, 잉글랜드의 강력한 장궁병들은 프랑스 기사들이 진흙 속에서 효과적인 돌격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두꺼운 갑옷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화살 세례와 진흙 때문에 지쳐 백병전에서 무력화되었고, 결국 수많은 귀족과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며 프랑스의 결정적인 패배로 끝났습니다. 이 전투는 잉글랜드 장궁병의 위력을 다시 한번 입증한 전투로 기록됩니다.
[프랑스 포로 학살 명령]
전투 중, 헨리 5세는 수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 포로들을 학살하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지친 잉글랜드군이 재무장한 포로들에게 역습당할 것을 우려한 결정이었습니다.
잉글랜드군의 초반 승리 후, 후방의 보급 마차가 공격받고 프랑스군 후방 부대의 재집결 움직임이 보이자, 헨리 5세는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미 수많은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이들이 흩어진 무기를 주워 다시 공격할 경우 지친 잉글랜드군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에 몇몇 고위 귀족을 제외한 수천 명의 프랑스 포로 전원을 학살하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고, 이는 프랑스 연대기에서도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 당시 전황이 절박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학살은 프랑스 후방 부대가 전장을 이탈하는 계기가 되어 전투 종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420
[트루아 조약 체결]
아쟁쿠르 전투의 승리로 잉글랜드 헨리 5세는 트루아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 계승권과 섭정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과 결혼하며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아쟁쿠르 전투는 프랑스에게 수많은 병력 손실뿐만 아니라, 사령관, 공작, 백작 등 최고위 귀족들의 사망으로 정치적, 군사적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이 결정적 승리를 바탕으로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왕위 계승권과 섭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프랑스와 결혼함으로써 그 권리를 더욱 확고히 했습니다. 이 전투는 백년전쟁의 흐름을 잉글랜드에 유리하게 이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