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격
군사 공격,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역사적 사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4:42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기습 공격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미국의 고립주의 여론을 단번에 뒤집어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전포고가 늦게 전달되어 ‘기습 공격’ 논란을 낳았으며 이는 미국 본토의 전쟁 준비 및 일본계 시민 강제 수용 등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미국의 항공모함 등 핵심 전력은 피해를 면해 미국의 빠른 전력 복구와 태평양 전쟁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7
[중일전쟁 발발]
일본이 만주 점령 이후 중국과의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며 동아시아 정세가 격화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일본의 대미 관계 악화와 태평양 전쟁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지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 중일전쟁은 일본의 동남아시아 진출을 가속화하며 미국과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1940
[맥컬럼 메모 작성]
미 해군 본부 직원이 일본을 자극하여 전쟁으로 이끌 수 있는 도발 가능성을 담은 메모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이 문서는 1994년에야 기밀 해제되었습니다.
1940년에 맥컬럼 메모가 작성되었습니다. 이 메모는 미 해군 본부 스태프 장교가 상부에게 일본을 도발하여 전쟁으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들을 제시한 것으로,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음모론의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이 문서는 1994년에 기밀 해제되었습니다.
1941
[미영의 대일 경제 제재 강화]
미국과 영국이 일본에 대한 무기 제조용 고철, 석유 수출 금지, 재산 동결 등의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습니다. 이는 중국 내에서의 군사 행동을 위축시키기 위한 조치였으며, 일본이 최후의 선택으로 충돌 확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1년, 일본과 미국 사이의 오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중국 내 군사 행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하고, 석유 수출을 중단했으며, 미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유전이 없어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석유 봉쇄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이에 일본 지도부는 중국 철수, 군사력 약화 대기, 동남아시아 자원 획득을 위한 충돌 확대 중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됩니다.
[주일 미국 대사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 입수]
주일 미국 대사 조셉 그류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하여 본국에 보고했으나, 미국 정부는 유럽 전쟁 문제에 몰두하여 이를 묵살했습니다.
1941년 1월, 주일 미국 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본국에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 내 전쟁 문제에 집중하던 미국 정부는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묵살했습니다. 이는 진주만 기습의 배경에 대한 논란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헐 노트 전달 및 일본 연합함대 진주만 출정]
미국이 일본에게 중국 철수 등을 요구하는 '헐 노트'를 전달하며 외교적 노력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고, 일본은 이를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날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하며 기습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1941년 11월 26일, 미국은 일본에 중국에서의 철수 등을 요구하는 '헐 노트'를 전달하며 외교적 노력을 절정에 달하게 했습니다. 도조 히데키 일본 수상은 각료들에게 이를 최후통첩으로 설명했습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는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고, 일본은 충돌 확대를 선택했습니다. 같은 날, 일본의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했습니다. 일본은 헐 노트 내용과 상관없이 이미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왔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치욕의 날' 선포]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며 일본의 기습 공격을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이는 미국의 참전 여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발생하자,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며 국민들에게 일본의 행위를 강력히 비난하고 미국의 결연한 대응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이는 다소 고립주의적이던 미국 여론을 일치단결시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지지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개시]
일본 해군이 하와이 오아후 섬 진주만에 주둔한 미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이 공격으로 미 해군 함선 12척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하고, 항공기 188대가 격추되거나 손상되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은 단 55명의 사망자를 기록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제국 해군이 미합중국 하와이주 오아후섬의 진주만 기지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이 계획하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한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단 55명의 사망자를 내었습니다. 다행히 당시 항구에 없었던 미국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4척과 유류 보관소, 병기창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아 미국은 단기간 내에 전력을 원상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대국민 담화문 발표]
일본 제국정부는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의 의미를 담은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다음날 미국 정부에 전달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저녁(미국 시간으로는 12월 7일 늦게), 일본은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라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일본의 선전포고를 대내외에 알리는 것이었으나, 공식적인 외교 채널을 통한 통보는 공격 이후에 이뤄졌습니다.
[미국의 일본 선전포고 및 태평양 전쟁 발발]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다음날인 12월 8일 오후, 미국 의회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결의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다음날인 12월 8일 오후, 미국 의회는 압도적인 지지로 일본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습니다. 이전까지 다소 고립주의적 입장을 취해오던 미국 여론은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급변하여 참전을 강력히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선전포고문 전달 지연]
일본은 진주만 공격 직전 미국에 선전포고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5,000자에 달하는 암호문 해독 및 타이핑 지연, 내용의 모호함 등으로 인해 공격이 시작된 후에야 미 국무장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기습 공격'이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진주만 공격은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미국에 선전포고하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전에 약 5,000자 가량의 암호문이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에 전달되었는데,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공습 직전인 오후 1시에 이를 발표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암호문 해독과 고위 관료의 직접 타이핑 작업에 시간이 오래 소모되어, 노무라 대사는 공격이 시작된 지 한참 후인 오후 2시에야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선전포고문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일본 대사관 직원들조차 전쟁 시작을 해독 완료 시점에야 알게 된 복합적인 실수였으며,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를 우연과 실수로 인한 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1999년 이구치 다케오 교수는 일본 정부 내에서 선전포고 통보 방식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기만적인 외교'를 언급한 기록을 근거로 의도적인 지연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영국의 일본 선전포고]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보다 9시간 앞서 영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발표하며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참전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진주만 공격과 같은 날, 미국보다 9시간 먼저 영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는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공동 대응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및 이탈리아의 미국 선전포고]
삼국 동맹 조약에 따라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명실상부한 세계 대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11일, 추축국 동맹의 일원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빌미로 미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양쪽 전선에서 제2차 세계 대전에 전면적으로 뛰어들게 되었고, 전쟁은 명실상부한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942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구축함 DD-373 쇼호는 미국 본토에서 수리를 마친 후 1942년 가을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쇼호는 진주만 공격 당시 폭발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남겨져 상징적인 장면이 되기도 했습니다.
[경순양함 호놀룰루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경순양함 CL-48 호놀룰루호가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경순양함 CL-48 호놀룰루호는 1942년 1월 2일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빠르게 전열에 복귀하여 연합군의 전쟁 수행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경순양함 헬레나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경순양함 CL-50 헬레나호가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경순양함 CL-50 헬레나호는 1942년 1월 5일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빠르게 전열에 복귀하여 연합군의 전쟁 수행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공작함 베스탈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공작함 AR-4 베스탈호가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공작함 AR-4 베스탈호는 1942년 2월 말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공작함은 해군 함정의 수리 및 정비를 담당하는 함선으로,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경순양함 롤리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경순양함 CL-7 롤리호가 미국 본토로 이동하여 수리 후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경순양함 CL-7 롤리호는 1942년 2월, 미국 본토로 이동하여 수리를 마친 후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이는 전쟁 초기에 부족했던 미 해군 전력을 보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전함 네바다 인양 및 복귀]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전함 BB-36 네바다호가 인양되어 수리 후 1942년 12월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전함 BB-36 네바다호는 1942년 2월 12일 성공적으로 인양되었습니다. 수리 과정을 거쳐 같은 해 12월에 다시 전열에 복귀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습니다.
[전함 캘리포니아 인양 및 복귀]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했던 미 해군 전함 BB-44 캘리포니아호가 인양되어 수리 후 1943년 10월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침몰했던 미 해군 전함 BB-44 캘리포니아호는 1942년 3월 24일 인양되었습니다. 이후 수리 및 개장을 거쳐 1943년 10월에 전열에 복귀하며 연합군의 해군력에 다시 합류했습니다.
[한인 동양인 대대 '맹호군' 창설 및 인가]
진주만 공격 후 미국 내 애국심이 고조되자, 한인들은 미 육군 부대 훈련을 요청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의 협조로 18세부터 64세까지의 한인 및 중국인, 필리핀인으로 구성된 '맹호군' 대대가 정식으로 인가되고 대대기가 수여되었습니다.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내 여론이 격변하며 애국심이 고조되자, 미국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 부대 훈련을 요청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 방위군 휴스 대령의 협조로 18세부터 64세까지의 한인 50명과 중국인, 필리핀인들이 가세하여 '맹호군'이라는 동양인 대대가 조직되었습니다. 맹호군은 1942년 4월 26일 정식 인가를 받고 대대기가 수여되었습니다.
[수상기 모함 커티스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수상기 모함 AV-4 커티스호가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수상기 모함 AV-4 커티스호는 1942년 5월 말 진주만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이는 해군 항공 전력의 복구에 기여했습니다.
[전함 메릴랜드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전함 BB-46 메릴랜드호가 미국 본토에서 수리 후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전함 BB-46 메릴랜드호는 1942년 6월, 미국 본토에서 수리를 완료하고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메릴랜드호는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전함 웨스트버지니아 인양 및 복귀]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했던 미 해군 전함 BB-48 웨스트버지니아호가 인양되어 수리 후 1944년 7월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침몰했던 미 해군 전함 BB-48 웨스트버지니아호는 1942년 6월 8일 인양되었습니다. 이 전함은 광범위한 수리 및 현대화 작업을 거쳐 1944년 7월에 전열에 복귀하여 필리핀 해방 작전 등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기뢰 부설함 오글라라 인양 및 복귀]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했던 미 해군 기뢰 부설함 CM-4 오글라라호가 인양되어 수리 후 1944년 2월 28일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침몰했던 미 해군 기뢰 부설함 CM-4 오글라라호는 1942년 7월 3일 인양되었습니다. 이후 수리 과정을 거쳐 1944년 2월 28일에 전열에 복귀하여 해상 작전에 다시 투입되었습니다.
[전함 펜실베이니아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전함 BB-38 펜실베이니아호가 진주만에서 수리 후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전함 BB-38 펜실베이니아호는 진주만에서 수리를 마친 후 1942년 8월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이는 전쟁 초기의 전력 손실을 메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43
[구축함 다운스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구축함 DD-375 다운스호가 미국 본토에서 수리를 마친 후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구축함 DD-375 다운스호는 미국 본토에서 수리를 마친 후 1943년 11월부터 전열에 복귀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전함 오클라호마 인양]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했던 미 해군 전함 BB-37 오클라호마호가 인양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리되어 재투입되지 못하고 1946년 해체를 위해 이동 중 침몰하여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침몰했던 미 해군 전함 BB-37 오클라호마호는 1943년 12월 28일 인양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리 후 전력 재투입이 아닌 해체 결정을 받아, 1946년 12월 해체를 위해 본토로 이동하던 중 1947년 5월 17일 태풍으로 침몰하여 최종적으로 상실되었습니다. 이는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한 전함 중 유일하게 전열에 복귀하지 못한 사례입니다.
1944
[구축함 캐신 수리 완료]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구축함 DD-372 캐신호가 미국 본토에서 수리를 마친 후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구축함 DD-372 캐신호는 미국 본토에서 수리를 마친 후 1944년 2월 전열에 복귀하여 태평양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전함 테네시 현대식 개장 및 복귀]
진주만 공격으로 파손되었던 미 해군 전함 BB-43 테네시호가 진주만에서 수리 후 미국 본토에서 현대식으로 개장되어 전열에 복귀했습니다.
진주만 공격 당시 피해를 입었던 미 해군 전함 BB-43 테네시호는 진주만에서 수리를 거쳐 미국 본토에서 대대적인 현대식 개장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후 1944년 2월에 전열에 복귀하여 태평양 전쟁의 후반기 주요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1958
[애리조나호 기념관 착공]
진주만 공격으로 침몰한 USS 애리조나호의 잔해 위에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착공되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알프레드 프레이스에 의해 설계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진주만 공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침몰한 전함 USS 애리조나호의 잔해 위에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이 1958년에 착공되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알프레드 프레이스가 설계했습니다.
1961
[애리조나호 기념관 완공]
진주만 공격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USS 애리조나 기념관이 완공되어, 당시 공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애리조나호의 선체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은 총 인명 피해의 절반 이상이 발생한 곳입니다.
1958년에 착공된 USS 애리조나 기념관은 3년 후인 1961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진주만 공격 당시 불과 9분 만에 침몰하여 총 인명 피해 2,403명 중 1,17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던 애리조나호의 선체를 옮기지 않고 그 위에 건설되었으며, 전쟁의 비극과 희생자들을 기리는 중요한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1999
[진주만 기습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 발표]
이구치 다케오 교수가 일본 정부 내에서 미국과의 협상 중단 통보 방식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며, "우리의 기만적인 외교는 성공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일본이 선전포고를 의도적으로 지연했음을 시사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오랜 기간 진주만 공격 전 일본의 선전포고문 전달 지연이 우연과 실수로 인한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으나, 1999년 도쿄 국제기독교대학의 이구치 다케오 교수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일본 제국정부 내에서 미국과의 협상을 일체 중단하고 전쟁을 일으킨다는 의사를 '어떻게 통보할 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기록을 발견했으며, 12월 7일 전쟁 기록에 "우리의 기만적인 외교는 성공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라고 적혀 있던 것을 근거로 일본이 선전포고나 협상 종료에 대한 사전 통지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려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연구는 진주만 공격의 '기습'적 성격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