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내전
내전, 종족 분쟁, 학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4:38
르완다의 후투족 정부와 투치족 반군 RPF 간에 벌어진 잔혹한 내전. 1990년 시작된 1차 내전은 아루샤 협정으로 잠시 중단되었으나 대통령 암살로 1994년 2차 내전이자 르완다 집단 학살로 비화. 이 내전은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고 주변국 난민 위기와 콩고 전쟁까지 촉발하며 아프리카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됨. 벨기에 식민 지배 시기 심화된 종족 갈등이 폭발한 결과.
1919
[벨기에 식민 지배로 인한 종족 갈등 심화]
벨기에가 르완다를 지배하며 소수 투치족을 우대하고 다수 후투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뿌리 깊은 종족 간 갈등의 씨앗이 심어집니다.
이는 미래 내전의 비극적인 배경이 됩니다.
1919년부터 벨기에의 르완다 지배가 시작되면서, 벨기에는 르완다 인구의 14%에 불과한 투치족을 통해 85%의 후투족을 통치하는 간접 통치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치족에게 특혜를 주고 후투족에게는 차별을 가하면서 종족 간 불평등과 반목이 극대화되었습니다.
1959
[투치족 왕국 붕괴 및 종족 전쟁 발발]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고, 투치족 왕국이 붕괴되며 국왕 므와미 키게리 5세가 망명합니다.
이 사건은 르완다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1959년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갈등이 폭력적인 충돌로 번지면서, 르완다를 지배하던 투치족 왕국이 붕괴하고 투치족 국왕 므와미 키게리 5세가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는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투치족 중심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후투족 중심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1961
[르완다 공화국 선포]
투치족 왕국 붕괴 후, 르완다가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많은 투치족이 이웃 나라로 쫓겨나면서 종족 간 긴장은 더욱 고조됩니다.
투치족 왕국이 붕괴된 후, 르완다는 1961년 1월 공화국 체제를 선포하며 새로운 독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투치족이 추방되거나 피난을 떠나게 되면서, 이웃 국가로 망명한 투치족과 르완다 내 후투족 정부 간의 갈등의 불씨가 됩니다.
1963
[망명 투치족의 공격과 르완다 내 투치족 피해]
이웃 나라 부룬디의 투치족들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자, 이에 대한 복수로 르완다 내 투치족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는 망명 투치족과 후투족 정부 간의 지속적인 긴장을 보여줍니다.
르완다에서 쫓겨난 투치족들이 이웃 나라 부룬디에서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르완다 내 후투족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투치족들을 공격했습니다. 이 사건은 르완다 국내외에 흩어진 투치족들이 겪는 불안정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종족 간 증오의 골을 깊게 만들었습니다.
1973
[투치족 쿠데타 및 후투족 반란]
투치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후투족 지도자들을 살해합니다.
이에 후투족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살아남은 투치족들이 우간다로 피신합니다.
1973년 르완다에서 투치족이 쿠데타를 감행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다수의 후투족 지도자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맞서 후투족 지도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생존한 많은 투치족들이 이웃 나라 우간다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 망명객들은 훗날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주요 구성원이 됩니다.
1990
[르완다 내전 발발 (1차 내전 시작)]
르완다 후투족 정부군과 투치족 반군 르완다 애국전선(RPF) 간의 내전이 시작됩니다.
이 충돌은 르완다를 파국으로 몰고 갈 길고 비극적인 역사의 서막이었습니다.
르완다 내전은 후투족 출신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이끄는 정부군과 투치족 반군 르완다 애국전선(RPF) 사이의 대규모 무력 충돌입니다. 1990년 10월 1일 첫 충돌이 기록되었으며, 이는 르완다의 불안정한 종족 간 갈등의 표출이었습니다.
1993
[아루샤 평화 협정 체결 (1차 내전 종전)]
르완다 후투족 정부와 투치족 반군 RPF가 아루샤 평화 협정을 체결하며 1차 내전이 표면적으로 종전됩니다.
이 협정은 과도 정부 구성을 약속했지만, 불안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체결된 이 평화 협정은 후투족 정부와 르완다 애국전선(RPF)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과도 정부를 수립하여 평화로운 이행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잠시 동안의 휴전일 뿐이었습니다.
1994
[르완다 대통령 암살]
르완다 후투족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 시프리앙 은타랴미라가 탑승한 비행기가 키갈리 근처에서 요격되어 두 대통령 모두 사망합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르완다 집단 학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됩니다.
르완다 대통령 경호대의 소행으로 밝혀진 이 비행기 격추 사건은 이미 심화되어 있던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증오를 폭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2차 내전과 집단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르완다 집단 학살 시작 (2차 내전 발발)]
대통령 암살 다음 날, 아가트 우윌링기이마나 수상 등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이 살해당하고, 군대와 극단적 후투족 민병대가 투치족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을 시작합니다.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르고 잔혹하게 진행된 집단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1994년 4월 7일부터 수개월 동안 최소 50만에서 최대 100만 명에 달하는 투치족 민간인과 온건파 후투족이 극단주의 후투족 민병대(인테라하무웨 등)와 정부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르완다 내전의 가장 어두운 면이자, 인류에게 큰 교훈을 남긴 참사로 기억됩니다. 이 시기는 RPF의 군사적 공세가 재개된 2차 내전 기간과도 겹칩니다.
[르완다 내전 종식 및 대규모 난민 발생]
RPF가 르완다 제2의 도시 부타레와 후투족 최후 거점 기세니까지 진격하자, 300만 명에 달하는 후투족 난민이 주변국으로 대규모 피란을 떠나는 대호수 난민 위기가 시작됩니다.
이 과정에서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 전염병으로 수많은 난민이 사망합니다.
르완다 애국전선(RPF)의 군사적 승리로 내전의 대규모 전투는 종식되었지만, 약 300만 명의 후투족 난민이 콩고민주공화국 등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식량과 위생 부족으로 인해 콜레라 같은 전염병에 시달리며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이는 이후 제1차, 제2차 콩고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RPF, 르완다 수도 키갈리 함락]
투치족 반군 RPF가 수도 키갈리를 함락시키고 외부 통로를 차단합니다.
이에 갇힌 후투족 민간인들이 RPF의 보복을 두려워해 대규모 탈출을 시작합니다.
RPF의 키갈리 함락은 르완다 내전의 주요 전환점이었습니다. 수도가 점령되자, 약 6만 명의 후투족 민간인들이 반군의 보복을 피해 대규모로 피란을 떠나기 시작했으며, 이는 대호수 난민 위기의 서막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