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전쟁, 영토 분쟁, 군사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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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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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영토 분쟁, 군사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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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며 시작된 군사 분쟁입니다. - 아르헨티나 군부의 국내 문제 회피 목적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 약 2개월 만에 영국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며 종결되었습니다. - 전쟁 패배 후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 정권이 실각하며 민주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 현재까지도 국제사회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 주장이 엇갈리는 논쟁적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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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

[포클랜드 제도에 첫 영국인 상륙]

영국인 존 스트롱이 포클랜드 제도에 처음으로 상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훗날 복잡한 영유권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1764

[프랑스, 포클랜드 제도에 첫 정착민 유입]

프랑스의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이 포클랜드 제도에 유럽인 정착민을 처음으로 데려와 살게 했습니다.

이로써 유럽 국가들의 본격적인 섬 점유가 시작됩니다.

1766

[복잡해지는 포클랜드 제도의 주인: 프랑스-스페인 거래와 영국 정착촌 건설]

프랑스 정착민들은 섬의 통치 권리를 스페인에 매각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영국인들은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른 채 새로운 영국 정착촌을 세우면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1771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 전쟁 직전까지 고조]

프랑스로부터 정착촌을 넘겨받은 스페인과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두고 전쟁 직전의 위기까지 가는 심각한 대립을 겪었습니다.

1774

[경제적 이유로 영국군 포클랜드 제도 철수]

영국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포클랜드 제도에서 병력을 철수했습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섬의 불안정한 지위를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1811

[스페인 철수, 포클랜드 제도는 다시 무인도로]

스페인 역시 경제적인 이유로 포클랜드 제도에서 철수하면서, 섬은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영유권 주장과 갈등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1816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 영유권 주장 시작]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헨티나는 과거 스페인 영토였던 포클랜드 제도 역시 자신들에게 승계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포클랜드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됩니다.

1826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 영유권 공식 선언]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이 아르헨티나에 귀속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섬에 대한 주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1828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 관리에 독일 상인 파견]

아르헨티나는 독일인 상인을 대리인으로 파견하여 포클랜드 제도를 관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상인은 불법적으로 어선을 나포하고 해적질을 벌여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합니다.

1833

[영국,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력으로 재점유]

해적질 소식에 영국은 주변 해역의 안전 보장을 명분으로 전함을 보내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력으로 점유했습니다.

이는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영유권 분쟁을 본격적으로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 됩니다.

이전 아르헨티나가 파견했던 독일 상인이 해적질을 벌여 미국 어선이 피해를 입자, 미국 해군 함선 렉싱턴 호가 독일 상인의 기지를 포격하여 파괴했습니다. 이를 빌미로 영국은 '해적 행위'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전함을 파견하여 섬을 장악했으며, 당시 아르헨티나 이주자들을 내쫓았다는 아르헨티나의 주장과 달리 영국 측 자료에는 오히려 이주자에게 잔류를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946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 영유권 다시 주장]

영국의 지배가 100년 넘게 이어진 후, 아르헨티나 정부는 1946년에 다시 한번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65

[유엔,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의 평화적 해결 촉구]

유엔총회는 식민지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를 채택하며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포클랜드 영토 분쟁에 대해 합의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아르헨티나 지배에 반대했습니다.

영국 외무·영연방부는 포클랜드 제도를 남아메리카 무역의 골칫거리로 여겨 아르헨티나에 섬들을 양도할 준비까지 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973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재주장과 영-아 협상 개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유엔의 평화적 해결 권고에 따라 영국과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협상은 제대로 진전되지 못했습니다.

1982

[마라도나와 켐페스의 '진실 폭로', 아르헨티나 군정 종식의 결정타!]

전쟁 패배 후 아르헨티나 군부는 언론을 통제하며 국민들에게 승리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러나 1982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던 마리오 켐페스, 디에고 마라도나 등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스페인에서 귀국 후 기자회견을 열어 영국의 승리라는 진실을 폭로했습니다.

이 충격적인 폭로로 인해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은 신뢰를 잃고 레이날도 비그노네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종식되었습니다.

군부의 거짓말을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이 직접 밝혀내 군정을 무너뜨린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아르헨티나, 영토 문제 해결의 '다른 방법' 선언]

영국과의 협상이 진척을 보이지 않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영토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공식 선언하며, 영국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 전격 침공하며 전쟁 발발!]

아르헨티나가 '수복'을 선언하며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했고, 짧은 시간 내에 점령에 성공하며 포클랜드 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 침공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국내 문제 회피 목적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이 침공은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이 인플레이션, 실업, 정치 혼란,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 등 내부 불만을 잠재우고 자신들의 업적을 만들기 위한 고전적인 정치 수단으로 해석됩니다. 또한, 당시 포클랜드 주둔 영국군이 해병대 코만도 수십 명에 불과했기에 영국이 무력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아르헨티나의 오판도 작용했습니다.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지율을 위해 전쟁을 승인하며 레오폴도 갈티에리와 정치 생명을 건 대결에 나섰습니다.

[포클랜드 전쟁,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종결!]

침공 두 달여 만에 아르헨티나군이 영국군에 항복하면서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지형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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