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보어 전쟁

전쟁, 식민지 분쟁, 남아프리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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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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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식민지 분쟁, 남아프리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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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보어 전쟁은 1899년 시작된 대영제국과 보어인 공화국들의 거대한 충돌입니다. 압도적인 영국군에 맞선 보어인의 끈질긴 게릴라전은 전쟁을 예상보다 길게 끌고 갔고 그 과정에서 초토화 정책과 강제 수용소라는 비극적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영국이 최종 승리하며 남아프리카를 장악했지만 이 전쟁은 제국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대영제국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며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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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세계 최강 대영제국 vs 소규모 보어 공화국, 전쟁 발발!]

황금의 땅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 공화국 연합과 세계 최강 대영제국 간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됩니다.

7만 명의 보어군에 맞서 영국은 45만 명에 달하는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어군의 기습 공격으로 레이디스미스, 킴벌리 등 요충지가 포위당하며 초기 전황은 영국에 불리하게 전개됩니다.

투표권을 둘러싼 오랜 갈등과 대영제국의 남아프리카 지배 야욕이 낳은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위트워터스란드 골드러시로 대규모 영국인 유입이 있었으나, 이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아 케이프 식민지 영국 당국에 항의하는 등 갈등이 고조되었습니다. 1899년 6월 블룸폰테인 회의에서 협상이 실패하자, 10월에 보어의 비정규군과 민병대가 영국 식민지 정착지를 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어군은 레이디스미스, 킴벌리, 마페킹을 포위하고 콜렌소, 매거스폰테인, 스톰버그에서 승리를 거두며 영국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1900

[영국군의 반격: 로버츠와 키치너 경의 등장!]

전세 역전을 위해 영국은 총사령관을 교체하고 로버츠 경과 키치너 경을 필두로 18만 명의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합니다.

이들은 포위된 도시들을 구출하고 보어 공화국 깊숙이 침공하여 수도인 프리토리아와 블룸폰테인을 점령하며 보어 정부를 와해시켰습니다.

압도적인 병력 앞에 보어군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산으로 숨어들어 새로운 전술을 모색합니다.

영국군의 병력이 남아프리카로 증원되었으나 보어에 대한 공격은 초기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총사령관 레드버스 불러 장군이 제1대 로버츠 자작 프레더릭 로버츠와 제1대 키치너 백작 허버트 키치너로 교체되면서 상황이 변했습니다. 18만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1900년 초에 포위된 도시들을 구출하고 보어 공화국을 침공했습니다. 보어군은 이처럼 대규모 군대에 저항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영국군이 양 공화국과 그 수도인 프리토리아와 블룸폰테인을 점령하도록 하면서 전면전을 피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폴 크뤼거를 포함한 보어 정치인들은 도망가거나 숨어버렸고, 대영제국은 1900년에 두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병합했습니다.

[게릴라전의 서막: '비터렌더스'의 투쟁!]

영국의 공식적인 병합에도 불구하고, 보어 전사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비터렌더스'로 불리는 게릴라 부대를 조직, 끈질긴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루이 부어타, 얀 스뮈츠 같은 전설적인 장군들의 지휘 아래 기습 공격과 매복으로 2년간 영국군을 괴롭히며 대영제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예상치 못한 게릴라전은 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영국에서는 솔즈베리 경이 이끄는 보수당 내각이 영국군의 성공을 이용해 1900년 총선을 실시했는데, 당시 관찰자들은 이를 '카키 선거'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보어 전사들은 산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시작했으며, 이들은 '비터렌더스'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루이 부어타, 얀 스뮈츠, 크리스티안 데 베트, 쿠스 데 라 레이와 같은 장군들이 이끄는 보어 게릴라군은 2년 동안 기습 공격과 매복을 통해 영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습니다.

[잔혹한 '초토화 정책'과 죽음의 강제 수용소]

게릴라전을 진압하지 못하자 영국군은 충격적인 '초토화 정책'을 펼칩니다.

보어 민간인 지원을 끊기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농지를 파괴했으며, 10만 명이 넘는 보어 여성과 아이들을 강제 수용소에 가둡니다.

이 중 26,000명 이상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흑인 아프리카인 수용소에서도 20,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여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게릴라 전술에 익숙하지 않았고 민간인들 사이에서 게릴라에 대한 광범위한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게릴라 전쟁을 제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게릴라를 제압하는 데 실패하자, 영국 고위 지휘부는 대규모 다각적 반란 진압 작전의 일환으로 초토화 정책을 명령했습니다. 점령된 공화국들을 사실상 분할하는 그물망, 요새, 방어 지점, 철조망 네트워크가 건설되었습니다. 10만 명 이상의 보어 민간인, 주로 여성과 아이들이 강제로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이 중 26,000명이 주로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흑인 아프리카인들도 보어군에 물자를 공급하지 못하도록 강제 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이 중 20,000명이 사망했습니다.

1901

[영국군 전쟁 범죄, 재판대에 오르다]

전쟁의 잔혹성이 심화되면서, 1901년 1월 영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및 전쟁 포로 처우에 대한 전쟁 범죄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대영제국의 도덕적 명예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전쟁의 어두운 이면을 세상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01년 1월에는 민간인과 전쟁 포로 학살 등 전쟁 중 영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비난을 초래하며 대영제국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또한 전쟁이 예기치 않게 장기화되었고 영국이 예상치 못한 손실을 겪었기 때문에 대영제국의 세계적 지배력이 불가침하다는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관점도 강화했습니다.

1902

[베르니이헝 조약 체결, 전쟁의 종결]

2년 넘게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키치너 경이 제시한 관대한 항복 조건을 보어 지휘관들이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1902년 5월 31일 베르니이헝 조약이 체결되며, 보어 공화국들은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병합되었습니다.

이로써 남아프리카는 영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지만, 전쟁의 상흔은 깊게 남았습니다.

영국 기병은 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배치되었고,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양측의 전투원 중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사상자는 질병으로 사망했습니다. 키치너는 남은 보어 지도자들에게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해 갈등을 끝내려 했고, 강제 수용소에 있는 동료 보어인들의 석방을 보장받기 위해 대부분의 보어 지휘관들은 영국의 조건을 받아들여 1902년 5월 베르니이헝 조약을 통해 항복했습니다. 이전의 공화국들은 트란스발 식민지와 오렌지강 식민지로 대체되었고, 1910년 이들은 나탈 식민지 및 케이프 식민지와 통합되어 자치령인 남아프리카 연방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국제적으로 보어인들에게 동정적이었고 영국에 적대적이었으며, 대영제국 내에서도 전쟁에 대한 상당한 반대가 있었습니다. 독일, 미국, 러시아 등 중립국과 호주, 아일랜드 등 대영제국 내 일부 지역에서도 수천 명의 자원병이 보어인들을 위해 참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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