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전쟁, 역사, 유럽사, 왕위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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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1: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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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부터 1714년까지 약 13년간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입니다.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프랑스 부르봉 가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대립했습니다.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들이 합세해 유럽의 힘의 균형 유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의 스페인 왕위 계승은 인정되나 프랑스 왕위와의 합병은 저지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유럽 내 세력 판도가 재편되고 영국이 해상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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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 부상과 새로운 후보 등장]

스페인의 병약한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것이 확실해지자, 막강한 영토를 물려받을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두고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경쟁합니다.

이때, 두 강대국과 합병될 가능성이 없어 영국과 네덜란드가 선호하는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새로운 계승 후보로 등장합니다.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어릴 적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약해 후계자를 낳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에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 아메리카를 아우르는 스페인의 광대한 영토가 누구에게 계승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됩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자신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통해 부르봉 왕가의 계승을 주장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리를 내세웠습니다. 두 왕가 모두 스페인 왕위를 차지할 경우 유럽의 힘의 균형이 깨질 우려가 있어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이때 등장한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이었지만, 비텔스바흐 왕가 소속이었기에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합병될 위험이 없어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1697

[유럽 강대국의 스페인 왕위 '강제 분할' 조약 체결]

대동맹 전쟁이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 해결을 위해 '제1차 분할 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는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이탈리아와 저지대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나누는 것으로 합의되지만, 스페인의 의견을 무시한 채 체결된 이 조약은 스페인의 반발을 샀습니다.

전투에 지친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의 왕위를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계승하고, 이탈리아와 저지대의 스페인 영토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분할한다는 '제1차 분할 조약'(1698년)에 합의합니다. 하지만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이러한 결정에 격렬히 저항하며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전 스페인 제국을 계승하도록 인정합니다.

1699

[예상치 못한 계승자 사망과 두 번째 왕위 분할 조약]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었던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 공작이 갑작스럽게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다시 혼란에 빠집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카를 대공에게 스페인 왕권을 넘기고, 이탈리아 영토를 프랑스가 차지하는 '제2차 분할 조약'을 다시 체결합니다.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분할 조약'(1700년)을 통해 카를 대공을 스페인 왕으로, 프랑스가 이탈리아 영토를 갖는 방안에 합의합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모든 스페인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조약에 불쾌감을 드러냈고, 스페인 내부에서도 분할 자체에 대한 반대가 강했습니다.

1700

[스페인 국왕의 유언과 프랑스의 왕위 계승 선언]

스페인 카를로스 2세가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모든 영토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긴 뒤 사망합니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합병을 막기 위해 프랑스 왕위 계승 시 스페인 왕위는 동생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루이 14세는 앙주 공작을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 선언합니다.

1700년 10월,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그의 영토를 프랑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 앙주 공작에게 물려주기로 동의합니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앙주 공작이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할 경우 스페인의 왕위는 앙주 공작의 동생 베리 공작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카를로스 2세가 11월 1일 사망하자, 11월 24일 루이 14세는 앙주 공작을 스페인의 왕으로 선언합니다. 새로운 왕 펠리페 5세는 제2차 분할 조약의 규정에 반대하여 전 스페인 제국의 지배자로 선언합니다.

1701

[영국 왕위 계승 문제와 전쟁 서막]

영국의 전 국왕 제임스 2세가 프랑스에서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그의 아들을 정당한 영국 왕위 계승자로 인정합니다.

이는 영국 정계를 더욱 자극하여 윌리엄 3세가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제공합니다.

한편, 외젠 드 사부아 공자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의 밀라노 공국을 침범하며 무장 교전이 서서히 시작됩니다.

덴 하그 조약 체결 직후, 영국의 전 국왕 제임스 2세가 프랑스에서 사망합니다. 루이 14세는 리스비크 조약에서 윌리엄을 영국의 왕으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란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새삼스럽게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는 영국의 정계를 더욱 프랑스와 소원하게 하여 윌리엄 3세에게 전쟁을 일으킬 기반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이탈리아에 있는 스페인의 영토 중 하나인 밀라노 공국을 침범한 때부터 무장 교전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네덜란드, 대부분의 독일 국가들은 오스트리아 편에 붙었으나 바이에른, 쾰른, 포르투갈, 사보이아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지지했습니다. 1702년 윌리엄 3세가 죽은 후에도 그의 계승자인 앤 여왕은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프랑스의 독점 시도에 맞선 '덴 하그 조약' 체결]

프랑스 루이 14세가 스페인과의 교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배제하자, 이에 대한 상업적 이익 침해에 분노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 하그 조약'을 체결하며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습니다.

이 조약은 펠리페 5세를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이탈리아의 스페인 영토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오스트리아에 할양하고 프랑스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로 합의합니다.

루이 14세가 유럽에서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확고히 하려는 노력을 더 공세적으로 취하기 시작하며 스페인과의 교역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를 배제하자, 양국은 심각한 상업적 이익 침해를 받습니다. 이에 영국의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와 함께 '덴 하그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합의는 펠리페 5세를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하나 오스트리아에게 그들이 가장 열망하던 영토인 이탈리아의 스페인 영토를 할양하고, 또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오스트리아 군대를 받아들이게 하여 이곳에서 프랑스의 세력 확대를 막게 하였습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러는 동안 스페인에 대한 그들의 상업적 권리를 탈환하기로 하였습니다.

1702

[해전의 대승, '비고 만 해전'으로 스페인 보물선 침몰]

영국 제독 조지 루크가 비고 만 해전에서 스페인의 보물선을 완벽하게 파괴하고 수백만 파운드의 은을 획득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는 동맹군에게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사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영국의 제독 조지 루크는 중요한 해전인 비고 만 해전에서 승리하여 스페인의 보물 운송선을 완벽히 파괴하고, 많은 은을 획득했습니다. 이는 스페인 식민지에서 걷어들인 은을 운반하던 중요한 보물선이었습니다.

[외젠 공작의 이탈리아 전역 초기 승리]

이탈리아 크레모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외젠 공작이 프랑스군을 이끄는 빌레루아 공작을 격파하고 사로잡는 승리를 거둡니다.

이어 8월에는 방돔 공작과 루차라 전투에서 비록 대등한 승부를 벌였지만, 외젠 공작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외젠 공작은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빌레루아 공작을 2월 1일 크레모나 전투에서 패배시키고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빌레루아를 대신해 방돔 공작이 지휘를 맡아 8월 루차라 전투에서 대등한 승부를 벌이고, 상당한 수적우위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젠 공작을 이탈리아에서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1704

[말버러-외젠 연합군의 빛나는 승리, '블레넘 전투']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점령하려 하자,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네덜란드군을 독일로 남하시켜 외젠 공작의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합니다.

이 연합군은 블레넘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말버러와 외젠 공작의 군사적 명성을 드높이고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킵니다.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 수도 빈 점령이라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자,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에 병력을 묶어두려는 네덜란드 정부의 바람을 무시한 채 영국과 네덜란드군을 독일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동시에 외젠 공작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두 군세가 합류합니다. 이 연합군은 탈라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블레넘 전투에서 맞붙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의 공적을 널리 알렸으며,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습니다. 같은 해, 영국은 카를 대공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의 핵심 요충지인 지브롤터를 점령하는 또 다른 중요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706

[전선의 대전환: 라미예, 투린 전투로 프랑스군 대패]

말버러 공작이 '라미예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앤트워프와 됭케르크를 연달아 점령하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냅니다.

동시에 이탈리아에서는 외젠 공작이 '투린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고 이들을 이탈리아에서 축출하며 동맹군의 승기를 굳건히 합니다.

1706년, 말버러 공작은 5월 라미예 전투에서 빌레루아 휘하의 프랑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잇달아 앤트워프와 됭케르크를 점령함으로써,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었습니다. 외젠 공작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9월, 방돔이 라미예 전투 이후 궤주당한 네덜란드의 프랑스군을 집합시키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나자 그와 사보이아 공작은 오를레앙과 마르생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투린의 전투에서 격파하여 심각한 피해를 주고 그해 말, 이들을 이탈리아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이제 프랑스군은 독일, 저지대, 이탈리아에서 격퇴 당하였고, 다음해에 스페인이 전쟁의 중심지역이 되었습니다.

1707

['알만사 전투'로 스페인 전선 안정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절정에 달하며, 베릭 공작이 '알만사 전투'에서 동맹군을 완전히 격멸하고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를 지켜냅니다.

이 승리로 스페인 내 대규모 전투는 종결되고, 이후 소규모 교전들만 이어집니다.

1706년 포르투갈군이 스페인을 침략하여 마드리드를 점령하려 했으나, 그해 말 마드리드는 국왕 펠리페 5세와 베릭 공작에 의해 재점령됩니다. 골웨이 백작은 1707년 다시 마드리드를 점령하려 했으나, 베릭 공작은 4월 25일 알만사 전투에서 그를 완전히 격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더 이상 대규모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고, 결정적이지 않은 소규모 교전들만이 계속되었습니다.

1709

[굴욕적 협상 거부와 피로스의 승리 '말플라크 전투']

프랑스가 파국에 직면하며 루이 14세는 협상을 시도하지만, 동맹군은 루이 14세에게 프랑스군을 투입해 그의 손자를 폐위하라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루이 14세는 이를 거부하고 국민에게 호소해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며 전쟁 의지를 다집니다.

이후 벌어진 '말플라크 전투'에서 동맹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했지만, 동맹군 역시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승리를 이어가지 못해 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됩니다.

오우데나르데와 릴에서의 재난은 프랑스를 파국에 직면하게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외무장관 투르시 후작을 보내 헤이그에서 동맹군의 사령관들을 만나게 했습니다.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영토를 동맹에게 양도하고, 스페인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펠리페 5세를 지원할 자금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동맹군은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루이 14세에게 프랑스군을 투입해 그의 손자를 폐위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고 루이 14세는 끝까지 싸울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수천의 새로운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프랑스의 국민들에게 간청했습니다. 1709년,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작이 파리를 향해 출진시킨 군대는 빌라르 공작 휘하의 프랑스군과 말플라크 전투에서 마주쳤습니다. 비록 동맹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지만, 그들은 프랑스군이 겨우 1만 정도의 피해를 입었음에 반해 2만이 넘는 병사를 잃었습니다. 동맹군은 몽스를 점령하였으나, 그들의 승리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으로 여겨집니다. 동맹군은 비록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상자로 인해 프랑스를 계속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1711

[카를 대공의 황제 즉위, 힘의 균형 재조정 요구]

스페인의 왕위를 주장하던 카를 대공이 형 요제프 1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합니다.

이는 오스트리아의 힘이 비대해져 또 다른 유럽의 세력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아, 동맹국의 전반적인 전략과 평화 협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711년 카를 대공이 그의 형 요제프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따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즉위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의 결정적인 승리는 프랑스의 승리가 그러하듯, 유럽의 힘의 균형을 뒤엎어버릴 우려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영국 내에서는 말버러 공작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들고 전쟁을 지지하던 휘그당이 정권을 잃고 토리당이 평화 절차를 밟기 시작합니다.

1713

[유럽 평화의 서막, '위트레흐트 조약' 체결]

영국과 네덜란드가 프랑스와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을 멈춥니다.

이 조약으로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좌를 지키지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박탈되어 두 왕국이 합쳐질 위험이 사라집니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 영토를 확보하고, 영국은 지브롤터와 메노르카섬을 얻으며 독점적 노예 무역권을 확보합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위트레흐트 조약이 1713년에 체결되자 프랑스와 싸우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위트레흐트 조약 아래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로 즉위하였으나, 그의 가문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위가 한 명에게 계승되는 위협은 사라졌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해외 영토를 획득했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를 오스트리아에게 양도하고, 시칠리아와 밀라노의 일부를 사보이아에게, 그리고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영국에게 주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30년간 소위 아시엔토라 불린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의 독점적인 노예 무역권을 영국에게 양도해야만 했습니다.

171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최종 종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가 지지하던 바르셀로나가 오랜 공성전 끝에 9월 11일 최종적으로 항복하며 스페인 내의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라슈타트 조약'과 '바덴 조약'을 체결하여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합니다.

이는 13년간의 대규모 전쟁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1705년부터 스페인의 왕위를 주장하던 카를 대공과 동맹군의 지원을 받던 바르셀로나는 1714년 9월 11일 긴 공성전 끝에 최종적으로 항복하여 스페인에서의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날자는 카탈루냐의 국경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적대관계는 라슈타트 조약과 바덴 조약이 체결된 1714년까지 계속되었고, 이 조약이 체결되어 두 나라의 적대행위가 종결되자, 비로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종결되었습니다. 스페인은 좀 더 늦게 평화조약을 조인했는데, 오스트리아와의 싸움은 4국 동맹 전쟁에서 열강들에게 패한 후 1720년에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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