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의 발견과 구조 기능 규명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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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 유전, DNA + 카테고리

멘델의 유전법칙이 발견되고 과학자들은 생명체 내의 어떤 물질이 유전에 관여하는지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거대 분자들 즉, 단백질, 지질, 탄수화물, 핵산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멘델의 유전 법칙이 처음 공개된 1865년 무렵에는 핵산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이 연대기를 통해 4개의 염기로만 구성되어 있는 DNA가 수 많은 정보를 담아 후세에 전달하는 유전의 기능을 담당하는 지를 밝히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이루어 가는 과학 탐구의 길을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위대한 과학자도 실수를 할 수 있고 DNA 이중나선을 밝히는 데 제일 큰 지분을 갖고 있는 과학자는 여성과학자인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란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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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69

[핵산의 최초발견:뉴클레인]

1869년 스위스 과학자 프리드리히 미셔(Friedrich Miescher)가 세포 내에서 단백질과 구별되는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병원의 붕대에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던 백혈구(고름)를 연구 대상으로 선택했다. 그는 세포의 핵으로부터 인(Phosphorus)이 풍부하고 산성인 물질을 분리해냈으며, 이를 "뉴클레인(nuclein)"이라고 명명했다. 미셔는 이후 연어 정자와 같은 다른 유형의 세포에서도 뉴클레인을 발견하여, 이 물질이 생명체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임을 시사했다.

이 발견은 DNA를 세포 내의 독립적인 화학 물질로 확립했지만, 당시에는 그 생물학적 기능, 특히 유전 정보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00

[핵산 구성 성분의 규명]

20세기 초, 유기 화학자 포부스 레빈(Phoebus Levene)은 핵산의 구성 성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수행했다. 레빈은 핵산이 인산기(phosphate group), 디옥시리보스(deoxyribose) 당, 그리고 네 가지 질소 염기(아데닌, 구아닌, 티민, 시토신)로 구성되어 있음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DNA와 RNA라는 두 가지 형태의 핵산을 구별하는 데 기여했다.


1909

[테트라뉴클레오티드 가설의 그림자]

그러나 레빈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 중 하나는 동시에 과학적 이해를 수십 년간 지연시킨 원인이기도 했다. 레빈은 1909년경부터 시작하여 이후 30년 동안 이 네 개의 뉴클레오타이드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A-G-C-T 패턴으로 연결된 구조를 가질 것이라는 '테트라뉴클레오티드 가설(Tetranucleotide Hypothesis)'을 확립하고 다듬었다. 이러한 구조적 단순화에 대한 주장은 DNA가 복잡한 생물학적 다양성을 암호화할 수 없다는 인식을 학계에 심어주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단백질이 20여 종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DNA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레빈의 가설은 DNA가 단순한 지지대 역할만 수행하는 반면, 단백질이 유전 물질일 것이라는 편견을 강화하는 결정적인 역사적 장애물로 작용했으며, 이후 DNA의 기능적 중요성을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초기 학계에서 충분히 수용되지 못하는 배경을 제공했다.

1928

[그리피스의 형질 전환 실험]

1928년 프레더릭 그리피스(Frederick Griffith)는 폐렴쌍구균(Pneumococci)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형질 전환 원리(Transforming Principle)"의 존재를 처음으로 입증했다. 그리피스는 살아있는 비병원성 R형 박테리아가, 열처리로 죽은 병원성 S형 박테리아의 어떤 물질을 흡수하여 생존 가능한 병원성 S형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실험은 유전 정보가 세포 간에 안정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실체—비록 그 화학적 정체는 미상이었지만—가 있음을 명확히 증명했다.

열처리로 죽은 병원성 S형 박테리아의 어떤 물질을 흡수하여 생존 가능한 병원성 S형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실험을 통해 유전 물질이 최소한 단백질이 아님은 증명한 셈이다(단백질은 열에 의해 변성되기 때문이다).

1944

[그리피스의 실험 완전 증명]

그리피스의 실험이 있은 지 16년 후, 오스왈드 에이버리(Oswald Avery), 콜린 맥클라우드(Colin MacLeod), 그리고 매클린 매카티(Maclyn McCarty)는 형질 전환 원리의 화학적 정체를 밝혀냈다. 이들은 효소 처리와 생화학적 정제 과정을 통해 형질 전환을 유도하는 물질이 단백질이 아닌 DNA라는 것을 증명했다. DNA 분해 효소(DNase)를 처리했을 때만 형질 전환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는 DNA가 유전자의 화학적 본질임을 명확히 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실험은 당시 주류 과학계를 지배하던 단백질 중심의 유전학 가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방법론적으로 매우 정교하고 중요한 증거를 제시했다.

1950

[샤가프의 등가 법칙]

구조 해명의 마지막 퍼즐 조각은 화학적인 분석에서 나왔다. 1950년 어윈 샤가프(Erwin Chargaff)는 DNA 염기 비율에 대한 중요한 관찰을 발표했다. 그는 DNA 이중 나선을 구성하는 아데닌(A), 시토신(C), 구아닌(G), 티민(T)의 양이 대칭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데닌의 수(A)는 티민의 수(T)와 같고, 시토신의 수(C)는 구아닌의 수(G)와 같다는 '샤가프의 제1법칙(Chargaff's first parity rule)'을 확립했다. 이 대칭성은 DNA 염기들이 무작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특정 쌍을 이룬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했으며, 이는 이중 나선 구조 발견(1953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2

[허시-체이스 실험: 논란 종결]

Avery 팀의 1944년 발견은 당시 학계에서 회의론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52년 알프레드 허시(Alfred Hershey)와 마사 체이스(Martha Chase)의 실험은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결론을 확고하게 재확인했다. 이들은 박테리아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T2 박테리오파지 를 사용하여 실험을 수행했다. 허시와 체이스는 파지가 단백질 껍질과 내부의 DNA로 구성되어 있으며, 감염 시 유전 물질을 숙주 박테리아로 전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단백질에만 존재하는 황(Sulfur) 원소와 DNA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인(Phosphorus) 원소의 화학적 차이를 활용했다.


실험1에서 방사성이 표지된 박테리오파이지의 단백질은 박테리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용액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단백질은 유전물질일 수가 없다.

실험2에서 방사성이 표지된 박테리오파아지의 DNA는 박테리아 안으로 들어가서 원심분리하면 침전물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유전물질은 DNA이다.


[Photo 51의 획득과 헬릭스 증거]

프랭클린은 DNA 섬유의 수화 정도를 정밀하게 제어하여, 건조한 A형(A-Form)과 습윤한 B형(B-Form)을 분리하여 분석했다. 1952년, 그녀는 DNA 섬유에 총 62시간 동안 X선을 노출한 끝에, B형 DNA의 선명하고 결정적인 회절 패턴을 얻어냈다. 이것이 바로 DNA 구조 해명의 상징이 된 "사진 51(Photo 51)"이다


Photo 51은 B형 DNA가 나선형 구조(helical structure)를 가지고 있다는 명확하고 부인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했다. 이 사진의 가장자리에는 특징적인 X자형 또는 왜곡된 마름모 형태가 나타났는데, 이는 나선 구조의 시그니처였다.


By Raymond Gosling/King's College London, 공정 이용, https://ko.wikipedia.org/w/index.php?curid=1373985

1953

[라이너스 폴링의 뼈아픈 구조 해석 실]

DNA 구조를 둘러싼 경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당시 세계 최고의 화학자 중 한 명이자 이미 단백질의 alpha 나선 구조를 성공적으로 예측했던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이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1953년 초, 폴링은 로버트 코리(Robert Corey)와 함께 DNA 구조 모델을 제안했지만, 이는 부정확한 3중 나선 구조로 판명되었다.


폴링의 실패 원인은 불충분한 데이터에 의존한 점과 문헌 검토를 소홀히 한 데 기인했다. 특히, 제임스 왓슨(James Watson)은 폴링이 유전자는 상보성으로 복제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이전 논문 내용조차 망각하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가 구조 해명을 위한 기초적인 데이터 검토나 동료와의 대화를 소홀히 했음을 비판했다. 이 사건은 아무리 천재적인 과학자라도 기본적인 화학적 환경(용액 화학 및 이온화 상태)에 대한 지식과 필수적인 실험 데이터를 무시할 경우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폴링의 이 뼈아픈 실수는 경쟁자였던 왓슨과 크릭(Watson and Crick)에게 구조 경쟁에서 승리할 시간과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당시 폴링은  반핵연설을 계속하였다. 그 때문에 FBI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미 정부로부터 여권발급을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여권은 1954년 그의 첫 노벨상 수상에 앞서 잠시 재발급되었다. 따라서 그가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면 그의 동료인 로베르트 코레이 대신 프랭클린의 연구소에 방문해서 그 유명한 그녀의 DNA의 X선 회절사진을 봤을 가능성이 있었고 DNA 구조를 제대로 풀어 세계 최초로 노벨상을 3개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실수를 한 폴링 박사는 그래서 너무나 인간적이고 사랑스럽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DNA 이중나선 구조 발표]

1953년 4월 25일,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J. D. Watson and F. H. C. Crick)은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디옥시리보 핵산의 구조(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라는 제목의 간결한 논문을 발표하며 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를 공식화했다.

이들의 모델은 샤가프의 법칙과 프랭클린의 결정학적 데이터를 완벽하게 통합했다.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의 데이터를 통해 인산-당 백본이 바깥쪽에 위치하며 역평행(antiparallel)을 이룬다는 것을 확정했고, 샤가프의 A=T, C=G 비율을 충족시키기 위해 염기들이 분자 내부에서 특정 쌍(A-T, G-C)을 형성하여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왓슨과 크릭이 제안한 이중 나선 구조는 단순한 분자 모델을 넘어섰다. 그들은 이 구조가 "상당한 생물학적 관심"을 갖는 "새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했으며, 염기들의 상보적인 쌍 결합은 유전 정보의 보관뿐만 아니라, 세포 분열 시 정보가 오류 없이 복제되는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설명해주었다. 구조 그 자체에 유전 정보의 전달 및 복제 원리가 내포되어 있었으며, 이는 분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프랭클린 데이터의 결정적 역할과 논란]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실험적 성과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최종 모델 구축에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했다. 그녀의 데이터는 다음 세 가지 핵심 정보를 제공하며 이론적 모델에 구조적 제약을 가했다.

1.    DNA는 이중 나선 형태이다.

2.    설탕-인산 백본은 분자 외부에 놓여야 한다.

3.    두 백본은 역평행(antiparallel) 방향으로 배열되어 있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이 최종 구조를 발표할 당시, 프랭클린은 이 결정적인 결정학적 증거(Photo 51 포함)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동료 모리스 윌킨스(Maurice Wilkins)와 막스 페루츠(Max Perutz)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는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녀의 실험적 공헌이 발견에 결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왓슨과 크릭의 논문에서는 그녀에게 "빈약한 인정(scant acknowledgment)"만이 주어졌다. 왓슨이 이후 저서 '이중 나선(The Double Helix)'에서 보인 그녀에 대한 태도는 당대 과학계에 만연했던 성별에 대한 차별적 관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비판받았으며, 이는 과학사에서 실험 데이터의 소유권과 공정한 인정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윤리적 쟁점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왓슨과 크릭의 1953년 《네이처》 논문("Molecular structure of nucleic acids; a structure for deoxyribose nucleic acid")에는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E. Franklin)은 저자로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포함되어야 마땅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치졸함을 보였습니다.   

  왓슨과 크릭 논문의 감사(Acknowledgement) 문구

왓슨과 크릭은 논문의 마지막 문단에서 모리스 윌킨스 박사(Dr. M. H. F. Wilkins)와 로절린드 프랭클린 박사(Dr. H. E. Franklin)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We have also been stimulated by a knowledge of the general nature of the unpublished experimental results and ideas of Dr. M. H. F. Wilkins, Dr. H. E. Franklin and their co-workers at King's College, London."

(번역) "저희는 또한 런던 킹스 칼리지의 M.H.F. 윌킨스 박사, R.E. 프랭클린 박사 및 그 동료들의 미발표된 실험 결과와 아이디어의 전반적인 내용을 인지함으로써 자극(영감)을 받았습니다."

이 문구는 그들의 연구가 왓슨과 크릭의 DNA 모델 제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아닌 '미발표 결과를 제공한 연구자'로서 감사의 말에 포함되었습니다.

현재 우리 연구 윤리 잣대로 판결을 내리자면 저 위대한 논문은 철회되고 다시 저자가 보강되고 바뀌어서 재출간되어야 마땅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 왓슨 박사는 불명예스럽게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만 로잘린드 프랭클린 박사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왓슨박사의 이름 대신에.....

[DNA 구조 해명의 역사적 유산]

DNA가 유전 물질이라는 사실과 그 구조가 밝혀진 과정은 1869년 뉴클레인의 단순한 화학적 분리에서 시작하여 1953년 이중 나선 모델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약 84년간 지속된 과학적 대장정이었다.

프리드리히 미셔의 DNA 분리, 포부스 레빈의 구성 성분 규명과 테트라뉴클레오티드 가설이라는 구조적 오해, 그리고 그리피스, 에이버리-맥클라우드-매카티, 허시-체이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획기적인 실험들을 통해 DNA는 비로소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적 핵심 물질로 확립되었다.

이후 어윈 샤가프의 화학적 제약과 당대 최고의 석학 라이너스 폴링의 구조적 실패라는 경쟁적 배경 속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업적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가 획득한 "사진 51"은 이중 헬릭스의 형태, 정확한 치수, 그리고 인산기의 외부 위치를 제공하여, 폴링의 오류를 배제하고 왓슨과 크릭이 정확한 이중 나선 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 필수적인 실험적 토대를 제공했다. 프랭클린의 실험적 통찰력 없이는 이중 나선 구조의 해명이 지연되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DNA 이중 나선 구조의 발견은 유전학, 의학, 생명공학 분야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구조는 유전 암호의 작동 방식과 유전병의 분자적 근거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었으며, 생명과학 전체를 분자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중대한 기여와 그에 대한 지연된 인정은 과학적 공로의 평가 및 과학적 윤리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후대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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