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F 피오렌티나
ACF 피오렌티나는 1926년 창단된 이탈리아 피렌체에 연고지를 둔 축구 클럽입니다. 상징적인 보라색 유니폼 때문에 '비올라'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피렌체 시의 상징인 백합 문장에서 비롯된 '질리아티'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에 A 2회, 코파 이탈리아 6회, UEFA 컵위너스컵 1회 우승 등 다수의 국내외 대회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았습니다. 2002년 재정 위기로 파산 후 재창단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델라 발레 가문의 인수와 투자로 재건에 성공했습니다. 로베르토 바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등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이 거쳐간 유서 깊은 클럽으로, 이탈리아 축구 강호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연표
1926
[ACF 피오렌티나 창단]
지역 귀족 루이지 리돌피에 의해 피렌체의 오래된 축구팀인 PG 리베르타스와 CS 피렌체를 병합하여 창설되었다. 이는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북서부 이탈리아 지역에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
AC 피오렌티나(Associazione Calcio Fiorentina)는 1926년 가을, 지역 귀족이자 국가 파시스트당의 일원이었던 루이지 리돌피에 의해 피렌체의 오래된 축구팀 PG 리베르타스와 CS 피렌체를 병합하여 창설되었다. 이 합병은 당시 이탈리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라이벌인 북서부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피렌체에 강력한 축구 클럽을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이는 메디치 가문의 문화적 부흥과 현대 축구의 조상 격인 칼초 피오렌티노의 재발견에 영향을 받았다.
1928
[보라색 유니폼 채택 및 '비올라' 별명 유래]
상징적인 보라색 유니폼을 채택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La Viola'('보라색 팀')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1928년에 더욱 알려지고 눈에 띄는 보라색 유니폼이 채택되어 이래로 쭉 사용되며, 'La Viola'('보라색 팀')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보라색 유니폼은 오래된 하얀색과 붉은색 유니폼을 강에서 세탁하던 도중 우연한 실수로 인해 탄생했다고 한다.
1931
[세리에 A 승격 및 조반니 베르타 경기장 개장]
어려운 시작에도 불구하고 1931년에 세리에 A로 승격했고, 같은 해에 유명한 파시스트의 이름을 딴 조반니 베르타(현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 경기장을 개장했다.
힘든 시작과 세 시즌을 하부 리그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피오렌티나는 1931년 세리에 A에 도달하였다. 같은 해에 유명한 파시스트의 이름을 딴 조반니 베르타(Giovanni Berta)라고 이름 붙여진 새 경기장을 개장하였다. 이 경기장은 오늘날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라고 알려져 있다. 이 당시에 경기장은 공학의 걸작이어서 개장 자체가 기념적이었다.
1941
피오렌티나는 1941년에 첫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다른 문제들로 40년대의 성공을 이어나가지 못하였다.
1956
[첫 세리에 A 우승(스쿠데토) 달성]
1955-56 시즌, AC 밀란을 12점 차이로 따돌리고 클럽 역사상 첫 스쿠데토(세리에 A 우승)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시작했다.
1950년, 피오렌티나는 정규 리그에서 변함이 없던 톱 파이브 자리를 차지했다. 선수단에는 잘 알려진 골키퍼 줄리아노 사르티, 세르조 체르바토, 프란체스코 로셀라, 구이도 그라톤, 주세페 키아펠라, 알도 스카라무치 그리고 무엇보다 공격형 미드필더 듀오 브라질 출신의 줄리우와 아르헨티나 출신 미겔 몬투오리가 있었다. 팀은 2위 AC 밀란에게서 12점을 앞서며 1955-56 시즌 첫 스쿠데토를 차지하였다.
1957
[이탈리아 팀 최초 유러피언 컵 결승 진출]
이탈리아 팀 최초로 유러피언 컵(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으나, 레알 마드리드에 패배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AC 밀란은 다음해에 피오렌티나를 1위 자리에서 밀어냈으나, 피오렌티나는 이탈리아 팀 처음으로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 올랐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에게 논란이 된 페널티킥을 얻어 맞으며 0-2로 패했다. 피오렌티나는 세 시즌 뒤에 다시 준우승을 하였다.
1961
[코파 이탈리아 및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960-61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 레인저스를 꺾고 유럽 대항전에서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1960-61 시즌 클럽은 다시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였고 UEFA 컵위너스컵에서 레인저스FC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하며 유럽 대항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1969
[두 번째 세리에 A 우승(스쿠데토) 달성]
1968-69 시즌, 밀란과 칼리아리를 제치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클럽 역사상 두 번째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다.
1968-69 시즌을 밀란과 나란히 선두로 시작하였지만 7라운드에서 볼로냐에게 패배하였고, 루이지 리바의 칼리아리 칼초에게 추월당하였다. 인상 깊지 않은 시작을 한 후,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A 꼭대기를 향해 나아갔지만, 시즌 전반기를 바레세에게 2-2 무승부로 덜미가 잡히며 칼리아리를 명백한 리그 선두로 놔주게 된다. 시즌 후반기에 리그 타이틀을 두고 밀란, 피오렌티나, 칼리아리 세 팀이 다투는 삼파전이었다. 밀란은 유러피언컵에 노력을 집중하면서 떨어져나가게 됐고 칼리아리가 리그 1위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칼리아리가 유벤투스FC에게 패배한 후 피오렌티나가 리그 선두를 차지하였다. 피오렌티나는 시즌 마지막에서 두 번째 경기인 유벤투스의 토리노 원정경기에서도 이기면서, 남은 리그 경기를 모두 이겼고 마지막 리그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다음해 유러피언컵에서 키예프를 상대로 소련에서 승리를 하는 등 좋은 결과를 거뒀지만 마침내 8강전에서 셀틱FC를 상대로 글래스고에서 3-0으로 패하면서 탈락했다.
1980
[플라비오 폰텔로 시대 개막]
부유한 가문의 플라비오 폰텔로에게 클럽이 매각되며 새 시대가 열렸으나, 팀의 노래와 로고 변경으로 일부 팬들의 불만을 샀다.
1980년, 피오렌티나는 부유한 가문의 출신인 플라비오 폰텔로(Flavio Pontello)에게 매각되었다. 그는 재빨리 팀의 노래와 로고를 바꿔 일부 팬들의 불만이 생겨났지만, 그는 토리노FC에서 프란체스코 그라치아니, 에랄도 페치를, 세비야FC에서 다니엘 베르토니를, 몬차에서 다니엘로 마사로를, 삼프도리아에서 젊은 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 같은 뛰어난 선수들을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1990
[로베르토 바조 유벤투스 이적 및 팬 폭동]
UEFA 컵 결승전에서 유벤투스에 패한 후, 떠오르는 스타 로베르토 바조가 라이벌 팀 유벤투스로 이적하며 피렌체 거리에서 심각한 폭동이 발생했다.
1990년 시즌 마지막 날까지 강등을 피하기 위한 사투를 벌였고 UEFA 컵에서는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유벤투스를 만나게 되었다. 토리노 팀이 우승 트로피를 가져가면서, 피오렌티나의 티포시들은 결승전 2차전을 아벨리노의 많은 유벤투스 팬들과 함께 아벨리노 (피오렌티나의 홈구장은 사용 불가였다)에서 열렸고 떠오르는 스타선수 로베르토 바조를 결승전 날에 라이벌팀에게 팔아버리면서 다시 한번 엄청난 불만을 터트렸다.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폰텔로는 모든 선수들을 팔아버렸고 피렌체의 거리에서 일어난 심각한 폭동이후에 팀을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 클럽은 유명한 영화제작자 마리오 체키 고리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1993
[비토리오 체키 고리 시대 시작 및 세리에 B 강등]
마리오 체키 고리 회장의 사망 후 아들 비토리오 체키 고리가 회장직을 이어받았으나, 그 해 세리에 A에서 부진한 성적으로 강등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맞았다.
체키 고리 소유의 첫 시즌은 새 회장이 브리안 라우드루프, 슈테판 에펜베르크, 프란체스코 바이아노 같은 좋은 선수들과 무엇보다 1990년대 팀의 아이콘이었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를 영입하기 시작하는 등 안정화 과정이었다. 하지만 1993년에 체키 고리가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비토리오 체키 고리가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시즌에서 좋은 시작을 보였음에도, 체키 고리는 아탈란타BC에게 패한 후, 루이지 라디체를 경질시키고 알도 아그로피를 그 자리에 대신시켰다. 결과는 순위가 중하위권으로 떨어졌고 시즌 마지막 날에 강등당하는 등 처참하였다.
1996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후, AC 밀란을 2-1로 꺾고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우승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마무리했다.
클럽은 코파 이탈리아에서 아탈란타를 상대로 우승컵을 거머쥐며 컵대회에서 다시 한번 강점을 보였고 세리에 A를 3위로 마감하였다. 여름에 피오렌티나는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우승멤버가 없이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산 시로)에서 AC 밀란을 2-1로 이기며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우승하였다.
2001
[여섯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파티흐 테림 감독이 도중에 사임하고 로베르토 만치니가 부임하는 혼란 속에서도 여섯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A 2000-01 시즌을 잘 운영했고 파티흐 테림이 도중에 사임하고 로베르토 만치니가 새로 부임하였지만 시즌 전반기에 1위를 유지하였다. 또한 그들은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하였다.
2002
[클럽 파산 및 세리에 B 강등 거부]
2001년에 5천만 달러의 빚이 드러나며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고, 2002년 6월 재판에 의해 행정 관리가 되며 세리에 B 참가마저 거부되어 사실상 존재 자체가 부정되었다.
2001년에는 클럽의 위험한 재정 상태가 노출되며 피오렌티나에게 커다란 변화가 예고되었다. 그들은 임금을 지불할 수 없었고 5천만 달러의 빚이 있었다. 클럽의 구단주인, 비토리오 체키 고리는 조금 더 자본을 투입할 수 있었으나, 이는 곧 클럽을 유지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클럽은 세리에 A 2001-02 시즌을 끝으로 강등되었고 2002년 6월에 재판에 의하여 행정관리가 되었다. 이 파산의 형태가 의미하는 것은 2002-03 시즌에 세리에 B에 있는 것이 거부당하였고 결과적으로 사실상 존재 자체가 거부당하게 되었다.
[디에고 델라 발레에 의한 재창단]
신발 및 가죽 사업가 디에고 델라 발레가 새 구단주로 부임하여 'ACF 피오렌티아 비올라'라는 이름으로 2002년 8월 재창단되었고, 이탈리아 4부 리그인 세리에 C2에 참가했다.
클럽은 신발과 가죽 사업가인 디에고 델라 발레(Diego Della Valle)가 새 구단주로 부임하여 ACF 피오렌티아 비올라(Associazione Calcio Fiorentina e Florentia Viola)라는 이름으로 2002년 8월에 즉시 재창단되었고 이탈리아 4부리그에 속하는 세리에 C2에 참가했다. 재창단한 클럽에 남았던 선수는 오직 안젤로 디 리비오뿐이었다. 디 리비오와 30골을 넣은 크리스티안 리가노 덕분에, 상당히 쉽게 세리에 C2를 우승하였고 세리에 C1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2003
[세리에 B 승격 및 'ACF 피오렌티나' 명칭 복구]
특이한 '카소 카타니아' 사건으로 세리에 C1을 건너뛰고 세리에 B에 참가하게 되었고, 구단 명칭과 유니폼 권리를 되찾아 'ACF 피오렌티나'로 재개명했다.
특이한 칼초 카타니아(카타니아 케이스) 덕에 피오렌티아는 세리에 C1을 건너뛰어서 세리에 B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경우는 이탈리아 축구 협회가 카타니아 사태를 풀기 위하여 세리에 B의 참가팀을 20개에서 24개로 늘린 덕분에 가능했다. 2003년 오프 시즌에, 클럽은 피오렌티나 명칭과 유니폼 디자인에 대한 권리를 다시 사왔고 ACF 피오렌티나(ACF Fiorentina)로 다시 재개명하였다.
2004
클럽은 2003-04 시즌에 6위로 마감하였고,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페루자 칼초를 이기며 1부 리그로 돌아왔다.
2005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 및 루카 토니 영입]
델라 발레 구단주가 판탈레오 코르비노를 단장으로, 체사레 프란델리를 감독으로 임명하고, 여름 이적 시장에서 루카 토니와 세바스티앵 프레이를 영입하며 팀을 강화했다.
하지만, 세리에 A로 돌아온 첫 시즌에, 클럽은 강등을 피하기가 어려웠고, 시즌 마지막 날까지 볼로냐FC 1909 그리고 파르마FC와 강등권 싸움을 벌였다. 2005년에, 델라 발레는 판탈레오 코르비노를 새 단장으로 임명하였고 다음에는 체사레 프란델리를 다음 시즌 감독으로 내정하였다. 클럽은 여름 이적 시장에 루카 토니와 세바스티앵 프레이를 영입하게 된다.
2006
[2006년 축구 스캔들 연루 및 강등 위기]
2006년 이탈리아 축구 스캔들에 연루되어 세리에 B로 강등되고 승점 12점을 감점당했으나, 항소 끝에 세리에 A로 복귀하고 승점 감점이 19점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5점으로 다시 감소)
이 과감한 행동으로 승점 74점을 기록하며 리그 4위와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얻게 된다. 토니는 38경기에서 31골을 넣으며, 1958-59 시즌 안토니오 발렌틴 안젤릴로 이후 30골 이상을 넣은 선수가 되었으며,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였다. 하지만 2006년 7월 14일에, 피오렌티나는 2006년 이탈리아 축구 스캔들로 인하여 세리에 B로 강등하였고 승점 12점을 감점당하였다. 피오렌티나는 항소를 통하여 세리에 A로 복귀하였지만, 2006-07 시즌에 승점을 19점이나 감점을 당했다. 또한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취소를 당하였다. 시즌이 시작하고 나서, 피오렌티나의 징계는 이탈리아 법원에서 항소를 하여 -19점에서 -15점으로 감소하였다.
2009
[안드레아 델라 발레 회장직 사임]
안드레아 델라 발레가 피오렌티나 회장직을 사임하고 마리오 코니니 부회장이 임시로 업무를 이행하게 되었다.
2009년 9월 24일, 안드레아 델라 발레는 피오렌티나 회장직을 사임하였고 그 가진 업무들은 부회장 마리오 코니니(Mario Cognini)가 임시로 이행될 것이라고 알렸다.
2010
[프란델리 감독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부임]
오랜 기간 팀을 이끌었던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이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게 되면서 팀을 떠났고, 시니샤 미하일로비치가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2010년 6월, 피오렌티나는 오랜 기간 팀의 감독을 맡았던 프란델리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게 되면서 작별을 고했다. 칼초 카타니아의 젊은 감독 시니샤 미하일로비치가 그를 대신하여 선임되었다.
2012
[빈첸초 몬텔라 감독 부임 및 대규모 리빌딩]
재정 상태가 좋아진 델라 발레 가문은 2012년 여름 막대한 투자를 통해 빈첸초 몬텔라 감독을 선임하고, 선수단 26명 중 17명을 교체하는 대규모 개편을 단행했다.
재정상태가 좋아진 델라 발레 가문은 2012년 여름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코르비노의 후임자로 일찍이 다니엘레 프라데를 단장으로 임명하여, 선수단을 차례대로 점검하였다. 특히 주목할만한 이적으로는 새 감독 빈첸초 몬텔라, 골키퍼 에밀리아노 비비아노, 플레이메이커 4인방 마티아스 페르난데스, 보르하 발레로, 알베르토 아퀼라니 그리고 다비드 피사로가 있다. 팀의 선수단 개편의 규모는 엄청났는데, 1군팀 26명중에서 17명은 새로운 얼굴들이었고 나머지 9명은 지난 시즌 베스트 11 선수들이었다. 여름 이적 시장이 끝나고, 2009년 챔피언스 리그 출전 선수들중에서 마누엘 파스콸과 스테반 요베티치 단 두명의 선수만이 남게 되었다.
[델리오 로시 감독 선수 폭행 및 경질]
노바라와의 홈경기에서 선수를 폭행한 델리오 로시 감독이 경질되었다. 이는 팀의 강등권 싸움과 겹쳐 최악의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시즌 중에 가장 최악의 순간은 노바라 칼초와의 홈경기였는데, 경기 시작 30분만에 0-2로 끌려나가자, 감독 델리오 로시는 미드필더 아뎀 랴이치를 일찌감치 교체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랴이치가 교체에 대한 불만으로 로시 감독을 향해 비꼬는 박수를 치자, 로시는 폭행을 통하여 그에게 보복하였다. 몬톨리보의 후반 두 골로 2-2 동점을 만들어, 팀은 필요한 승점 1점을 얻어 남은 두 경기 상관없이 잔류를 확정지었다. 분명한 범죄로 인하여, 팀 상황이 좋지 못함에도 로시 감독을 해고를 하였다.
2015
[16년 만에 세리에 A 리그 1위 달성]
2015-16 시즌 초반, 인터 밀란을 4-1로 격침시키며 16년 만에 세리에 A 리그 1위로 올라서는 엄청난 행보를 보였다.
피오렌티나는 초반 엄청난 행보를 보이며 6라운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까지 4-1로 격침시키며 리그 순위 1위로 순위를 끌어 올리게 되는데 이는 매우 뛰어난 행보이며 1999년 1위를 기록하고 나서 16년 만에 기록하게 되었다. 참고로 잠시 1위를 달성했던 98-99시즌 피오렌티나의 최종순위는 3위였는데 2000년도 이후로는 아직까지 리그 3위 안에 든 적이 없던 것으로 보아 15-16시즌 팀의 최종순위 경신을 기록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참고로 최종순위가 2위였던 것은 81-82시즌이다.
[빈첸초 몬텔라 감독 경질]
유로파 리그 참가 수준에 불만을 표출하고 구단 수뇌부와의 불화가 심화되면서, 2015년 6월 9일 빈첸초 몬텔라 감독이 공식적으로 경질되었다.
팀을 침체기에서 그래도 나름 중상위권인 순위인 4위로 끌어올린 빈첸초 몬텔라 감독이었지만, 세리에a의 리그 포인트 하락으로 인해서 UEFA 유로파리그 매번 유로파 리그에 참가한 것은 팀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또한, 몬텔라 감독 본인이 더 이상 피오렌티나에서의 흥미를 못 느낀다는 것이었다. 이에 몬텔라 감독은 구단에 불만을 표시를 하였고, 구단 수뇌부와의 불화가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불만이 쌓여가던 2015년 6월 9일 피오렌티나는 정식으로 몬텔라 감독을 경질 하였다.
[파울루 소자 감독 선임 및 선수단 리빌딩]
빈첸초 몬텔라 감독 경질 후, 2015년 6월 21일 바젤 FC의 파울루 소자 감독이 새로 부임했으며, 그는 팀의 노쇠화된 스쿼드를 대대적으로 리빌딩했다.
그 후 바젤 FC에 있던 포르투갈 출신의 감독 파울루 소자 감독을 2015년 6월 21일 새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파울루 소자 감독은 팀을 빠르게 안정화를 시켰고, 팀의 전체적인 노쇠화된 스쿼드의 리빌딩을 강행 하였다. 우선 팀의 불만이 많았던 선수인 네투, 마이카 리차즈를 떠나 보냈고 첼시FC에서 임대 영입되어 에이스 노릇까지 하면서도 AS 로마가 접근하여 법정 싸움까지 가게 한 무함마드 살라흐 또한 팀에서 떠났다. 임대 이적을 했던 레전드 출신의 노장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알레산드로 디아만티를 원소속팀으로 복귀 시켰으며, 팀에 있던 주축인 노장 선수들 후안 마누엘 바르가스, 다비드 피사로, 알베르토 아퀼라니, 크리스티아노 루파텔리, 안드레아 라차리, 무니르 엘 함다우이 임대 보낸 호세 마리아 바산타, 마리오 고메스 등을 보내면서 주급에 숨통이 트이고 팀의 수비의 핵심인 스테판 사비치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보내면서 1200만유로와 팀의 중원을 강화시켜줄 마리오 수아레스를 얻어 이득을 얻었다. 그리고선 니콜라 칼리니치와 유망주 지우베르투를 영입하였으며 야쿠프 브와슈치코프스키, 루이지 세페, 다비데 아스토리 3명의 선수를 임대로 영입하였다. 무엇보다, 팀의 유망주 기용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는데, 페데리코 베르나르데스키, 안테 레비치, 쿠마 바바카르을 본격적으로 1군에 기용함으로써 지난시즌보다 대략 2~3세 정도의 평균연령을 낮추게 되었다.
2023
[UEFA 유로파컨퍼런스리그 2회 연속 준우승]
2022-23 시즌과 2023-24 시즌에 연이어 UEFA 유로파컨퍼런스리그 결승에 진출했으나 아쉽게 두 번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ACF 피오렌티나는 UEFA 유로파컨퍼런스리그 2022-23 시즌과 2023-24 시즌에 걸쳐 두 번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했으나, 아쉽게도 두 번 모두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는 못하고 준우승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