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 항쟁
연표
1979
[박정희 대통령 사망, 민주화 기대 증폭]
10·26 사건으로 제4공화국의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곧 민주화 요구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커졌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제4공화국의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새로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의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
전두환 등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하며 민주화 기대를 꺾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을 비롯한 신군부(하나회)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권력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 및 진압]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을 벌였으나, 신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유혈 진압하고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광주 시민들이 민주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시위 규모는 급격히 커졌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유혈 진압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1986
1986년 10월에 발생한 10·28 건국대학교 사건은 학생 운동에 대한 정부의 강경 탄압을 보여주었으며,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1986년 6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하며 전두환 정권의 인권 탄압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졌다. 이는 6월 민주 항쟁의 주요 도화선 중 하나가 되었다.
1986년 5월에 발생한 5·3 인천 사태는 민주화 요구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6월 민주 항쟁의 도화선 중 하나로 꼽힌다.
19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의 물고문 등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사망 원인을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하며 은폐를 시도했으나, 이는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987년 1월 13일 자정 무렵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에게 연행되었다. 그는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경찰의 잔혹한 폭행과 고문을 견디다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허위 사망 원인을 발표했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전국 시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과 도심 시위가 열렸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고,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이 열리고 도심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박종철 49재 및 고문추방 국민대행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49재와 함께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라는 또 다른 대규모 시위가 개최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추모와 고문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되면서,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인 시위가 다시 한번 일어났다.
[서울대 학부모들의 철야 농성]
서울대학교 학부모 130여 명이 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
1987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학부모 130여 명이 건대항쟁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여 자식들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 발표]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다음 대통령을 선출하겠다고 발표하는 '4.13 호헌 조치'를 강행했다. 이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큰 반발을 샀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하며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호헌 조치'를 강행했다. 이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한 것으로,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 등, 4.13 호헌 조치 비판 성명]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4.13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며 정부에 맞섰다.
4.13 호헌 조치 발표 다음 날인 1987년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며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김영삼, 김대중 등이 주도한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폭력배들이 지구당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신한민주당을 탈당한 김영삼, 김대중 등 70여 명의 의원들이 추진하던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여 개 지구당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했으며, 이로 인해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통일민주당 측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 규탄했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황보영국 분신 사망 사건]
노동자 황보영국이 부산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신, 일주일 뒤 사망하여 민주화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1987년 5월 17일, 노동자 황보영국이 부산상고 앞에서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신했고, 일주일 뒤 사망했다. 이는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 의지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비극으로,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 사건 은폐 폭로]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했다. 이 폭로는 국민적 분노를 폭발시켜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를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 중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부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국민들의 극심한 분노를 자아냈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결성 및 6월 10일 대회 결정]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6월 10일에 대규모 규탄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1987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은폐를 규탄하기 위한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6월 10일,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날에 맞춰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며 대규모 항쟁의 서막을 알렸다.
1987년 5월 26일, 전두환 대통령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고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사건의 파장을 수습하려는 시도였으나 국민적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전국의 재야 지도자 2200여 명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했다.
1987년 5월 27일, 전국의 재야 지도자 2200여 명이 한국 기독교 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를 열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이들은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며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발생]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시위 진압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져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의 이목을 끌며 6월 항쟁의 규모를 더욱 커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87년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를 마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져 중상을 입었다(이후 7월 5일 사망). 이 사건은 당시 한 미국인 기자에 의해 보도되어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국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6월 항쟁의 규모를 더욱 커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6월 민주 항쟁의 시작: 전국적인 규탄대회]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며 전국적으로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날 민정당에서는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전국에서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며 6월 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날 잠실체육관에서는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려 노태우가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치안당국의 강경 대응 및 명동성당 시위 지속]
치안당국은 야권의 집회를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로 규정하고 강경 대처 방침을 밝혔다. 명동성당에서는 대학생 등 6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1987년 6월 11일, 치안당국은 전날 있었던 야권의 집회를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라고 지적하며 앞으로 법질서 파괴 행위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대학생 등 6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1주일째 시위를 계속했고, 남대문시장 등 명동 외곽 지대에서조차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명동성당 농성 지속 및 도심 시위 확산]
명동성당 시위 농성자들은 사흘째 시위를 벌였으며, 서울 도심 곳곳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확산되었다. 당국은 명동성당 사태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1987년 6월 12일, 명동성당에 들어간 시위 농성자들은 사흘째 시위를 벌였고, 서울 도심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터졌다. 이에 당국은 명동성당 시위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시위 농성자들은 경찰의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성을 벌였으며, 오후가 되자 시위의 규모는 더욱 커져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기습 시위가 이어졌다.
[정부의 강경 대응 방침 및 명동성당 평화 농성]
명동성당 농성자들이 연행 구속자 전원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지속하였습니다. 6월 13일 정부는 시위 사태에 대한 강력 대응 방침을 결정했습니다. 명동성당 내 농성자들은 전원 석방 시까지 농성을 지속하기로 하였으며 성당 내 미사 등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명동성당 농성 5일째, 김병도 신부 해산 권고]
명동성당 농성 5일째, 학생들은 시국 토론회를 가졌고, 성당 주변에서 2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김병도 주임 신부는 학생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 줄 것을 권고했다.
1987년 6월 14일,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은 오전 한때 성당 입구 밖으로 나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이후 문화관 대강당에서 시국 토론회를 가졌다. 오후에는 명동성당 주변에 모여든 서울시내 대학생 2000여 명이 명동 일대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김병도 명동성당 주임 신부는 성명을 통해 '민주화를 위한 학생들의 노력에 성원을 보내지만, 교회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학생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 그리고 가정으로 돌아가 달라'고 권고했다.
[명동성당 농성 6일 만에 자진 해산]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농성자들이 사제단의 뜻을 받아들여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지역에서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되었다.
1987년 6월 15일 오후 1시 30분,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농성자들은 사제단의 뜻을 받아들여 해산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오후 2시 성당 입구에서 해산식을 가졌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지역에서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되었고, 특히 서울의 경우 명동을 비롯한 시내 일부 대학에서 명동 사태를 지지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고 부산, 대전, 대구 등 일부 지역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전국적 시위 확산, 진주 파출소 화재]
경남 진주에서 파출소 4개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전국적으로 과격 시위가 확산되었다. 치안 본부는 전국 57개 대학 4만여 명의 교내 시위를 집계했다.
1987년 6월 16일, 명동성당 점거 농성 해산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되어 경남 진주에서는 파출소 4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치안 본부에 따르면 당일 전국 57개 대학에서 4만여 명이 교내 시위를 벌였는데 주로 부산과 진주, 대구 지역에서 과격한 시위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되었다. 한편, 정부는 6월 10일 당시 구속되었던 사람들을 석방하겠다고 밝혔으나, 서울교육대학교에는 무기한 휴업령을 내리는 강경책도 병행했다.
[진주 및 마산 시위 격화]
진주 경상대 학생들이 남해고속도로를 점거하고 LP 운반 차량 2대를 탈취하여 폭파 협박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마산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져 노동부 사무소와 파출소가 전소되는 등 시위가 격화되었다.
1987년 6월 17일, 전날에 이어 시위를 이어가던 진주 경상대 학생들이 남해고속도로로 재차 진입, 도로를 점거하고 LP 운반 차량 2대를 탈취하여 폭파 협박을 하며 진주시내 진입을 시도해 정촌파출소를 불태웠다. 이 초유의 사태에 치안당국은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하여 시위대를 겨우 해산시키고 운반 차량을 재탈환했다. 그러나 그날 밤 시위대가 다시 뭉쳐 경전선 철도를 점거하는 바람에 철도 운행이 일시 중단되었다. 마산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이어져 노동부 마산 사무소, 산호 1 파출소가 전소되고 방범초소가 전소되는 등 시위가 격화되었다.
[넥타이 부대 합류, 6월 항쟁 시민 혁명으로 전환]
부산에서 27세 이태춘이 경찰 최루탄에 맞아 추락 후 사망하는 등 전국적으로 파출소, 경찰서, 민정당사 등이 불타며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특히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회사원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며 6월 항쟁이 학생 중심에서 시민 전체의 항쟁으로 전환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는 27세 이태춘이 경찰의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고 다리 아래로 떨어져 중상을 입은 후 24일 사망했다. 이날 파출소 29곳, 경찰서 2곳, 민정당사 4곳이 불타는 등 전국적으로 시위가 격렬해졌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이날 평화대행진에 6월 10일 대회의 3배가 넘는 100만 명이 참여했다고 추산했다. 특히 회사원들, 즉 '넥타이 부대'의 시위 참여로 6월 항쟁은 학생 항쟁에서 시민 항쟁으로 변화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군 투입 지시 유보]
전두환 대통령이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으나, 미국의 반대로 같은 날 오후 군 출동 지시가 유보되었다.
1987년 6월 19일 오전 10시 30분, 전두환 대통령은 시위 진압을 위한 군 투입 준비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같은 날 오후 4시 30분 비상조치 계획과 군 출동 지시는 유보되었으며, 이는 항쟁의 향방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노태우의 6.29 선언 발표]
민정당 대선 후보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 수용을 건의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 등을 포함한 '6.29 선언'을 발표하며 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선제 개헌안 수용을 건의하여 승락을 받아냈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및 구속자 석방, 사면, 감형 등을 비롯하여 야당과 재야 세력이 주장해온 헌법 개헌 등의 한국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8개항의 시국수습방안인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제5공화국의 직선제 개헌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인 정부 이양을 실행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한열 열사의 사망]
6월 9일 시위 중 경찰 최루탄에 피격되었던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결국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국민적 슬픔과 분노를 더욱 고조시켰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이한열 학생이 7월 5일 끝내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6월 항쟁의 상징이 되어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더욱 뜨겁게 달구는 계기가 되었다.
[이한열 열사 추모행진 및 대규모 집회]
故 이한열 열사의 운구행렬을 따라 서울시청 앞까지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추모행진을 벌였고, 광장에서 대규모 추모 집회가 열렸다.
1987년 7월 9일 낮, 故 이한열 군의 운구행렬을 따라 서울시청 앞까지 수십만 명의 학생, 시민들이 추모행진을 벌였다. 낮 1시경부터 시청 앞 광장에서 대규모 대중 집회를 가지며 그의 희생을 기리고 민주화를 향한 염원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국민투표 실시]
6.29 선언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제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는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화의 중요한 결실이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고 직선제 개헌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87년 10월 27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제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16년 만에 대통령 선거를 직접선거로 치를 수 있게 하는 민주화의 중요한 결실이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노태우 당선]
새 헌법에 따른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으나, 민주진영의 김대중, 김영삼 후보가 분열하여 독자 출마하는 바람에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진영의 중심축이었던 김대중 통일민주당 고문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대통령후보 출마를 놓고 분열하여 독자 출마를 강행했다. 결국 민주세력의 통합이 불발되면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