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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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
민주화 운동, 정치사, 대한민국 현대사, 헌법 개정 + 카테고리
1987년 6월 항쟁의 뜨거운 민심이 독재 권력을 굴복시킨 현대 한국 민주주의의 금자탑입니다. 전두환 정권의 호헌 조치에 맞선 시민들의 평화적 저항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의 대통령 직선제 수용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는 제5공화국 군사 통치의 종언과 제6공화국 민주 헌정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 변곡점이며,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민주적 가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는 시대를 연 이 선언은 한국 사회 전반의 자율화와 인권 신장을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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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진실을 숨기기 위해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억지스러운 해명을 내놓았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이 비극은 전두환 정권의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침묵하던 국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향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의 사인 조작 발표]

치안본부는 박종철 군의 사망 원인을 단순 쇼크사로 위장하여 공식 발표했습니다. 고문 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사건을 조기에 종결지으려는 파렴치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부검에 참여했던 의사와 검사의 양심 선언으로 고문 사실이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갔습니다. 언론을 통해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권의 도덕성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고문 추방 대회 개최]

종교계와 재야 단체들이 힘을 합쳐 고문 퇴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며 정권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 추방 민주화 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경찰의 삼엄한 원천 봉쇄 속에서도 시민들은 평화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표현했습니다.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전격 중단하고 기존 헌법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국민의 개헌 열망을 무시한 채 정권 연장을 꾀하려는 독단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이른바 '특별담화'를 통해 평화적 정부 이양을 핑계로 체육관 선거 방식을 고수하겠다는 의중을 비친 것입니다. 이 오만한 결정은 오히려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정권 퇴진 운동을 벌이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고문 은폐의 진실 폭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 사건의 범인이 조작되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감옥 안에서 오간 비밀스러운 메시지가 정권의 추악한 이면을 완전히 들춰냈습니다.
김승훈 신부가 광주 항쟁 7주년 미사에서 고문 가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전국을 뒤흔들었습니다. 국가 기관이 조직적으로 범죄를 은폐했다는 사실에 중립적이던 중산층마저 정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국민운동본부 전격 발족]

야당과 재야 세력을 총망라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민주화 역량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 체계적인 투쟁을 전개할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직선제 개헌과 호헌 조치 철회를 단일 목표로 설정하여 범국민적인 연대를 이끌어냈습니다. 이 조직은 이후 6월 항쟁을 지휘하는 사령탑 역할을 수행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피격]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교문 앞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그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항쟁의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습니다.
최루탄 발사 금지를 부르짖던 평화로운 시위대를 향한 폭력적 진압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였습니다. 그가 쓰러지는 장면을 담은 사진은 항쟁의 시각적 상징이 되어 수많은 시민을 거리로 불러 모았습니다.

[6·10 국민대회 강행]

정권의 후보 지명식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호헌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직장인들까지 점심시간에 거리로 나와 박수를 치며 항쟁에 동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날 민정당은 체육관에서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권력의 잔치에 분노한 시민들은 경적을 울리고 손수건을 흔들며 거대한 저항의 파도를 만들었습니다.

[명동성당 농성 투쟁 시작]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으로 진입하여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성당은 공권력의 침탈을 막아주는 성역이 되어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거점으로 떠올랐습니다.
경찰의 강제 진압 위협 속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나를 밟고 가라'며 시위대를 굳건히 보호했습니다. 시민들은 성당 밖에서 음식을 전달하고 격려하며 항쟁의 동력을 유지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최루탄 추방의 날 시위]

경찰의 무분별한 최루탄 발사에 항의하는 전 국민적인 행동의 날이 선포되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흰 손수건을 들고 거리에 서서 폭력 진압의 중단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수백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며 항쟁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정권은 군 투입을 진지하게 검토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분기점이었습니다.

[무위로 돌아간 영수회담]

전두환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 김영삼이 시국 타개를 위해 만났으나 합의에 실패했습니다. 정권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끝내 거절하며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청와대에서 열린 이 회담은 정권의 시간 벌기용이라는 비판 속에 아무런 성과 없이 종료되었습니다. 대화의 창구가 닫히자 시민들은 이제 마지막 평화적 행진을 통해 정권을 압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국민평화대행진 전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향한 대행진을 벌였습니다. 전국을 뒤덮은 민주화의 함성은 군사 정권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전국 37개 도시에서 수백만 인파가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검토했으나 국제적인 압박과 거대한 민심의 저항 앞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엄령 선포 검토와 철회]

위기를 느낀 군사 정권 내부에서 무력 진압을 위한 계엄령 선포가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내외의 강력한 경고와 군 내부의 회의적인 시각으로 인해 계획은 끝내 무산되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특사를 보내 무력 사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전달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둔 상황에서 유혈 사태를 우려한 정권은 비로소 퇴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노태우의 시국 선언 발표]

여당 대선 후보인 노태우 대표가 국민 앞에 서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8개 항의 시국 선언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항쟁의 함성이 승리의 환호로 바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항복 선언에 가까운 이 조치는 야당 지도자 사면 복권과 언론 자유 보장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습니다. 노태우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고 직선제를 수용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던 시국을 반전시켰습니다.

[대통령 직선제의 수용]

선언의 제1항으로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했습니다. 1971년 이후 중단되었던 국민의 직접 투표권이 16년 만에 다시 부활하는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체육관 선거라는 오명을 썼던 간접 선거 방식을 폐기하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습니다. 이는 시민들이 피 흘려 쟁취한 가장 핵심적인 민주화의 성과물로 평가받습니다.

[김대중의 사면 복권 약속]

정치적 탄압을 받아오던 재야 지도자 김대중의 사면 복권과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선언했습니다. 국민 화합과 민주적 경쟁을 위한 과감한 문호 개방 조치였습니다.
가택 연금과 법적 제약에 묶여있던 반대파 지도자를 해방함으로써 진정한 자유 경합의 장을 열었습니다. 이 조치는 정권이 민주화 요구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였다는 강력한 신호로 해석되었습니다.

[언론 자유의 전격 보장]

정권의 도구로 전락했던 언론에 대한 통제를 폐지하고 자유로운 보도 활동을 보장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회복시키고 권력 비판의 기능을 되살리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악명 높았던 언론기본법 폐지와 보도지침 철폐의 단초가 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이후 한국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핵심 동력이 되었습니다.

[교육 자율화 및 자치제 실시]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여 권력의 분산과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사회 전반의 자율화 바람을 일으키는 제도적 기반을 제시했습니다.
학내 민주화와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시대적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였습니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거주지와 학교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실질적인 자치권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인권 존중과 기본권 신장]

구속이나 감금 시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법적 장치를 강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고문 통치의 종언을 선언하고 법치주의로의 회귀를 명시했습니다.
박종철 군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가 권력의 횡포에 제동을 걸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형사 절차상의 권리 강화는 시민들이 안전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심리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전두환의 공식 수용 선언]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 담화를 통해 노태우 대표의 6·29 선언 내용을 전격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7년여의 철권통치가 민심 앞에 고개를 숙이며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차기 주자의 제안을 받는 형식을 빌려 정권의 체면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국민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이 발표로 인해 거리의 최루탄 연기가 사라지고 본격적인 개헌 정국으로 정세가 급변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항쟁의 도중 숨을 거둔 이한열 열사의 노제가 수백만 명의 눈물 속에 치러졌습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끝까지 지켜낼 것을 다짐했습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부터 연세대학교까지 이어진 거대한 운구 행렬은 민주화의 열기를 마지막까지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6월 항쟁의 완성이라는 숭고한 결실로 승화되어 역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김대중의 법적 복권 완료]

선언의 약속대로 김대중의 특별 사면과 복권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정치적 유배 생활이 끝나고 그는 합법적인 정치 활동의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정부의 공식적인 권리 회복 조치를 통해 그는 대선 가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국 정치사의 거인들이 한자리에서 경쟁하는 이른바 '1노 3김'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여야 개헌 협상 타결]

민정당과 민주당의 대표들이 모여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 초안에 최종 합의했습니다. 거리의 투쟁이 제도권 내의 구체적인 법안으로 결실을 맺는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제한하고 국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등 독재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이 합의안은 현대 한국 정치 시스템의 뼈대가 된 제9차 개정 헌법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개헌안 국회 본회의 통과]

국회가 여야 합의로 마련된 헌법 개정안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했습니다. 헌정 사상 유례없는 여야 합의 개헌을 통해 국민의 뜻을 법적으로 제도화했습니다.
재석 의원 272명 중 254명의 찬성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정치권의 총의를 모았습니다. 이제 공은 최종 결정권자인 국민에게 넘어가며 민주주의를 향한 마지막 절차만을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 확정]

새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압도적인 찬성률로 확정되었습니다.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스스로의 손으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규칙을 승인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투표율 78.2%, 찬성률 93.1%라는 경이로운 수치는 민주화에 대한 전 국민적 합의를 증명했습니다. 이로써 제5공화국의 유산인 체육관 선거 헌법은 역사의 뒤안길로 영영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9차 개정 헌법 공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제6공화국 헌법이 정식으로 공포되었습니다. 인권과 자율, 민주적 절차를 최우선으로 하는 대한민국 법치주의의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헌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담아 항쟁의 가치를 헌법적으로 정립했습니다. 이 헌법은 이후 30년 넘게 한국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지탱하는 최상위 규범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실시]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 속에 16년 만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수많은 인파가 투표소로 몰려들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며 민주주의의 축제를 즐겼습니다.
야권 후보들의 단일화 실패라는 아쉬움 속에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으나, 선거 절차 자체의 공정성과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결과를 떠나 국민이 권력을 직접 결정하는 주권자임을 확인한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실천이었습니다.

1988

[제6공화국의 평화적 출범]

6·29 선언을 통해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며 제6공화국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부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민주 헌정의 길로 진입했습니다.
군사 정권의 수장이었으나 국민의 선택을 거쳐 정통성을 확보한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시대적 아이러니를 안고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한국 사회는 정통 민주 정부로 나아가기 위한 기나긴 이행의 과정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1993

[문민정부의 역사적 계승]

항쟁의 주역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며 진정한 문민 통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6·29 선언이 뿌린 민주화의 씨앗이 마침내 군정 종식이라는 풍성한 결실로 이어진 순간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취임 후 금융실명제 실시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민주적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이는 6·29 선언으로 시작된 민주주의의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징표였습니다.

2017

[선언 30주년과 현대적 성찰]

선언 30주년을 맞아 당시의 정신을 되새기고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끊임없이 가꾸어야 할 과정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6·29 선언이 지닌 전략적 타협의 한계와 성과를 균형 있게 분석하는 학술적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세대 간의 소통을 통해 1987년의 뜨거웠던 열망을 미래의 민주주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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