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
연표
1960
[충무장 결의, 5.16 정변의 시작]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등 육사 8기생 9명이 '충무장 결의'를 통해 민주당 세력 제거 및 군정 수립을 목표로 5.16 군사정변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들은 군 장성들과 주요 부대를 비밀리에 포섭해 나갔습니다.
1961
[미 CIA, 쿠데타 정보 입수와 정부의 안일한 대응]
미국 CIA 극동과가 서울 지부로부터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쿠데타 모의 정보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체포를 미루었으며, 장면 총리 또한 소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검찰총장의 박정희 체포 촉구, 군부의 미온적 대응]
검찰총장 이태희가 박정희 장군 체포를 강력히 촉구했으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추가 조사를 이유로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군 수뇌부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30예비사단장 감금과 계획 누설]
정변 계획의 핵심인 30예비사단 사단장이 감금되고, 새벽 2시 쿠데타 병력 출동 계획이 30사단 사단장에게 누설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행팀을 붙였습니다.
[박정희, 정변 계획 위기 상황 보고받다]
자택을 나서던 박정희 소장에게 거사 본부인 6관구 사령부의 참모장이 30사단 밀고, 33사단 출동 불능, 육군본부 헌병대의 6관구 사령부 배치 등 긴급 상황을 전화로 보고했습니다.
[진압군 출동 개시, 수사대 현장 도착]
15범죄수사대장은 반란군 즉각 사살 명령을 받고, 30사단장과 동행하여 비상소집된 헌병 병력으로 30사단에 반란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동시에 6관구 사령부에는 육군본부 수사대가 도착했지만, 이후 격리되었습니다.
[6관구 사령부, 반란군에 완벽히 장악되다]
반란군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은 육군본부 헌병대를 영내 창고에 대기시키고, 6관구 사령부 출입문을 완전히 봉쇄하여 수사대의 활동을 무력화했습니다.
이로써 6관구 사령부는 반란군의 지휘소가 됩니다.
[박정희, 6관구 사령부 도착 및 지휘 시작]
자택을 떠나 술자리를 가졌던 박정희 소장이 마침내 6관구 사령부 정문을 통과하여 참모장실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 반란군 측 장교 20여 명이 모여 향후 작전을 지휘하게 됩니다.
[공수단 출동 지연, 박정희의 직접 독려]
공수단 출동이 지연되자 박정희 소장이 직접 공수단 독려를 위해 6관구 사령부를 떠났습니다.
한편, 6관구 참모장은 육군참모총장에게 상황이 진정되었다는 허위 보고를 전달했습니다.
[한강 인도교, 치열한 총성으로 뒤덮이다]
새벽 3시 20분경, 중화기 없이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7헌병 중대 50명이 한강 인도교에서 해병대 병력의 돌파를 강력히 저지하며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용산경찰서는 처음엔 단순 오발 사고로 오인할 정도였습니다.
[반란군, 육군본부 전격 접수 성공]
해병대와 공수단이 한강인도교 남단에서 교전 중인 시각, 제6군단 4개 포병대는 아무런 제지 없이 육군본부를 전격 접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반란군의 핵심 목표 중 하나였습니다.
[반란군, 한강 인도교 방어선 돌파 성공]
새벽 4시 15분, 공수단과 해병대가 병력을 재편성하여 한강 인도교의 헌병 방어선을 최종적으로 격파했습니다.
이 교전으로 헌병 3명, 해병 6명이 부상했습니다.
[장면 총리 체포 시도 중 발포 발생]
장면 총리의 숙소인 반도호텔에서 박정희 2야전군 부사령관의 부관이 이끌던 공수단 체포조가 총리를 체포하려다 발포가 일어났습니다.
총리는 이 상황에서 피신했습니다.
[박정희, 남산 KBS에 직접 나타나다]
새벽 4시 30분, 박정희 소장이 남산KBS에 직접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원래 30사단이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계획이 지체되었고, 박정희가 직접 현장을 지휘하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박정희, 라디오 통해 '혁명공약' 발표 및 계엄령 선포]
새벽 5시, 박정희 2야전군 부사령관은 K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반공, 미국과의 동맹강화, 구악일소, 경제재건 등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장면 내각을 위협하고 정변의 공식화를 알렸습니다.
[1야전군 사령관, 진압 명령 하달하며 반란군에 저항]
오전 9시, 1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중장은 부재중이던 6군단 작전 참모를 해임하고 휘하 6군단장에게 반란군에 가담한 포병부대의 철수와 6군단 전 부대 비상령 하달을 명령하며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쿠데타 진압 요청 거부하다]
오전 11시 30분, 윤보선 대통령은 매그루더 미 8군 사령관과 마샬 그린 대리 대사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쿠데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 허가를 요청했으나, 윤보선 대통령은 '우리 군끼리 유혈 사태는 안 된다'며 이를 거부했습니다.
[8사단, 진압 작전 출동 준비 태세 돌입]
오후 4시, 1야전군 사령부의 비상령에 따라 6군단장 작전 명령 제186호를 하달받은 8사단은 부대 상황을 점검하고 21연대에 출동 준비 명령을 내렸습니다.
[8사단, 출동 대기 완료 후 진압 포기]
밤 9시, 8사단의 비상 출동 준비가 완료되었고, 상부로부터의 최종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명령은 결국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군부, '위험인물' 검속 계획 착수]
군사혁명위원회 부의장 박정희 소장은 육군방첩부대장 이철희 준장에게 군 수사기관을 동원해 '용공분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위험인물 예비검속계획'이 입안되어 승인되었습니다.
[장면 총리 하야 및 육사생도 시가행진으로 쿠데타 기세 장악]
가르멜 수도원에 피신해 있던 장면 총리가 나와 내각 총사퇴 및 하야를 선언하며 군사정변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와 함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서울 시내 시가 행진을 벌여 쿠데타가 군부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이 퍼레이드는 쿠데타 후반에 저명한 군인이 아니었던 박정희가 대표자로 나타났다는 이유 등으로 군부로부터 거의 저지를 당했던 상황에서, 쿠데타가 군부에 충분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1군사령부 예하 진압군 출동 명령서 쪽지를 전달하던 경향신문사장 한창우씨는 총리를 만났을 때, 자신의 역할과 다르게 육사생도 행진을 근거로 들면서 진압이 아닌 투항을 강하게 회유했습니다. 이한림 1야전군 사령관은 박정희 친위조직 공수단 GD팀에 연행되어 덕수궁에 감금되었습니다. 야전군도 혁명을 지지한다며 5사단 병력도 서울에 진주하여 혁명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계엄사령관, 반국가단체 체포 구금 포고령 발표]
장도영 계엄사령관은 '위험인물 예비검속계획'에 이어 포고령 18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군과 경찰이 반국가단체에 찬양, 동조가 우려되는 대상자들을 체포하여 구금하는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및 중앙정보부 설립]
장도영이 내각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며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했습니다.
또한 중앙정보연구위원회를 폐지하고 그 산하에 '중앙정보부'를 설립, 김종필이 초대 정보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중앙정보부는 강력한 권력 기구로 등장했습니다.
[정당·사회단체 해산, 정치 활동 전면 금지]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에 따라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가 해산되었고, 정치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군정 체제의 기반을 다지는 조치였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유엔군사령부로부터 헌병대 지원받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유엔군사령부와의 합의를 통해 전방으로부터 5개 헌병 중대를 배속받으며 군사 통치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수도사단, 수도방위사령부로 재편]
수도사단이 수도방위사령부로 개편되며 서울 방위 체제가 재편되었습니다.
이는 군정 체제 하에서 수도 방어의 중요성이 부각된 결과였습니다.
[출입국 관리 권한, 법무부로 이관]
출국과 입국 관리 기관의 직제가 외무부에서 법무부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는 출입국 관리에 대한 군정의 통제력 강화를 의미했습니다.
1962
[박정희, 독립운동가 사면·복권 및 대규모 포상]
박정희는 독립운동가 김학규를 사면·복권시키고, 3.1절과 8.15 광복절에 걸쳐 독립운동가 2천여 명에 대한 정부 포상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군정의 명분 확보를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하야 선언]
윤보선 대통령이 오후 8시 30분 방송을 통해 하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군사정변의 성공적인 수습과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등장을 이유로 물러나겠다고 밝혔습니다.
군정 측은 그의 사퇴를 만류하는 시늉을 했으나, 박정희는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을 내심 반겼습니다. 이 사임 번복 일화는 후일 그가 군사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내각수반 직 겸임하며 권한 강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내각수반 직을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군정 체제 내에서 박정희의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박정희, 이승만에게 비밀 자금 전달]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에게 이승만에게 거금 2만 달러를 직접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박정희가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는 기존 통설과 상반되는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1963
[박정희,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의장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현직 대통령 윤보선을 물리치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이는 그의 군사 통치가 대통령직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해체 및 제3공화국 수립]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했던 최고 통치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되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로써 군정 통치기가 막을 내리고 민정 이양의 형식적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