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연표
1960
[4·19 관련 주요 사건 재판 및 처벌]
4·19 혁명 관련 사건들에 대한 대규모 재판이 서울지방법원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발포명령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 배후 사건, 정치깡패 사건, 선거사범 사건, 민주당·제3세력 전복 음모사건 등 다양한 유형의 범죄에 연루된 48명의 피고인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재판 결과, 최인규 내무장관, 유충렬 서울시경 국장, 곽영주 경무대 경호실임자 등 발포 명령 사건 피고인들에게는 살인교사 및 살인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임흥순 서울시장, 이익흥 내무장관, 김종원 치안국장 등 장면 부통령 저격 배후 사건 피고인들에게도 살인미수 등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 등 정치깡패들과 최응복 서울시 부시장, 최헌길 경기도지사 등 선거사범들에게도 각각 징역형이 선고되며 혁명의 부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이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졌습니다.
[2·28 대구 학생의거 발발]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외치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는 4·19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3·15 부정선거 실시 및 전국 최초 유혈 시위 (광주)]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광주에서는 낮 12시 45분부터 '민주주의 장송 데모'가 발생, 이는 전국 최초의 유혈 시위로 기록됩니다.
이후 마산에서도 오후 3시 30분 대규모 규탄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투표함 바꿔치기, 4할 사전 투표 등 전례 없는 부정 선거를 자행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광주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 45분부터 상복을 입고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마산 시위보다 3시간 앞선 전국 최초의 유혈 봉기로 그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이후 마산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나, 최인규 내무부장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마산 시위 책임자 사임]
마산에서 발생한 격렬한 시위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최인규 내무부장관과 이가학 치안국장이 사임했습니다.
홍진기가 새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며 정국 수습을 시도했습니다.
[김주열 학생 시신 발견으로 분노 폭발]
3·15 마산 의거 당시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시신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혀 있는 충격적인 모습이 보도되자 국민적 분노가 폭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행방불명된 지 27일 만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검시 결과 발표가 지연되자 시민들이 병원에 들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부산일보 허종 기자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4·19 혁명의 불길을 지폈습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를 파괴하고 수류탄을 탈취하는 등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시국 선언 후 시위를 벌이고 귀교하던 중, 정치깡패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피습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 학생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했으며, 이는 학생 시위의 주역을 지방 고교생에서 서울 대학생으로 바꾸고 시위 목적을 독재 타도로 전환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후 12시 50분, 고려대 전교생은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임을 선언하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마친 후 평화롭게 귀교하던 중, 종로 4가에서 쇠갈고리, 쇠사슬, 쇠망치 등으로 무장한 폭력배 50~60명에게 습격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상철 학생이 사망하고 50여 명이 부상했으며, 현장 취재 기자들도 폭행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튿날 4·19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19 혁명 발발 및 유혈 진압]
전날 고려대 학생 피습에 격분한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이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독재 퇴진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와 이기붕 자택으로 몰려갔습니다.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정부는 오후 3시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하루 동안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이날 전국의 대학생들이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하고 대규모 시위에 나섰으며, 중고등학생들까지 가세하여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이기붕 자택으로 향했습니다.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은 곡사포까지 동원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무력화되었습니다. 경무대 정문 돌파 시도 시 군인들이 발포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오후 3시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도 확대했습니다. 시위대는 경찰 무기를 탈취하여 총격전을 벌였고, 동대문 경찰서 앞에서 최초의 총격전이 발생했습니다. 이 날 하루에만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하는 엄청난 유혈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연세대학교 김병철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이 최전선에서 시위에 참여하며 민주주의 수호를 외쳤습니다.
[장면 부통령 사퇴 선언]
대한민국 부통령 장면이 '3·15 부정선거와 청소년들의 희생에 비통함을 느낀다'며 부통령직 사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는 이승만 정부에 대한 압박이자, 이승만 하야 시 권력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결단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장면 부통령은 잔여 임기가 4개월가량 남았음에도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퇴문을 통해 국민의 울분과 청소년들의 피 흘린 항쟁을 이유로 들며, 이승만 정부에 경종을 울리고 자유 민주 정신을 소생시키기 위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하야할 경우 자신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통해 하야를 유도하고, 나아가 내각책임제에서 총리직을 노리려 했다는 정략적 해석도 있었습니다.
[대학교수단 시국선언 및 데모]
전국 27개 대학 교수 258명이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교수들은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의 책임을 물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책임자의 사퇴와 재선거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이승만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후 3시, 400여 명의 교수들은 '4·19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령 하에서도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하며 서울시가를 행진했습니다. 이 교수단 데모는 잠시 주춤했던 시민·학생들의 궐기를 다시 촉발시켰고, 이튿날 대규모 시위로 이어져 이승만 하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
전 국민적 저항과 군 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 교수단의 시국선언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이 오후 1시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 하야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히며, 이로써 12년간 이어온 자유당 정권이 마침내 종식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연설에서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부정선거 재실시와 이기붕의 공직 완전 물러남을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불의를 보고 국민이 좌시한다면 희망이 없다고 평가하며 학생들의 궐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국회, 이승만 하야 결의 및 허정 과도정부 출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 직후, 오후 2시 국회는 이승만의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했습니다.
다음 날인 4월 27일 오후 3시에는 이 대통령의 사임서가 국회에서 공식 수리되었고,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 국무위원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습니다.
[이기붕 일가 변사 사건 발생]
양주로 피신했던 이기붕이 경무대로 돌아온 다음 날, 그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아들이었던 이강석 소위가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4·19 혁명으로 인한 권력 핵심부의 파멸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허정은 이기붕의 망명 길을 열어주려 했으나, 이기붕은 이를 거부하고 경무대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새벽,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하여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 하와이 출국]
하야를 발표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하와이로 출국했습니다.
허정 권한대행이 비밀리에 출국을 주선했으며, 이는 국내외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시국 수습을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허정 권한대행은 이수영 외무부 차관을 통해 이승만 내외를 모시도록 하고 자신은 김포공항으로 나가 배웅했습니다. 이승만은 허정에게 '하와이에서 잠시 쉬고 아이크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소'라고 말했으나, 이 말이 고국과의 마지막 대화가 되었습니다. 허정은 '각료들까지도 모르게' 미국 대사관과 상의하여 출국을 추진했으며,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회에서는 이승만 망명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있었습니다. 허정은 시국 수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며 이를 매듭지었습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 국회 통과]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대한민국 정치 체제가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변화할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제5대 민의원·참의원 총선거 실시]
제2공화국 수립을 위한 제5대 민의원 및 참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에서 4·19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 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선거 과정에서 자유당원들에 대한 집단적인 낙선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친미 성향이 강한 장면을 차기 지도자로 지지하며 허정 권한대행에게 이를 은밀히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장면 국무총리 당선 및 제2공화국 출범]
국회에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로 당선되면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습니다.
이로써 4·19 혁명의 결과로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하려 했으나, 민주당 신파의 반발로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2차 지명에서 민주당 신파의 장면이 총리로 당선되며 제2공화국이 정식 출범하게 됩니다. 이로써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전국대학생 모의UN 총회 창립]
4·19 혁명 이후,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여 '제1회 전국대학생 모의UN 총회'를 창립하고 전국적으로 민주주의와 4·19 정신을 확산하는 강연 활동을 펼쳤습니다.
연세대학교의 김병철은 1960년 11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한극과 함께 이 모의UN 총회를 창립했으며, 이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연을 통해 4·19의 정신을 전파했습니다.
1961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 종식]
4·19 혁명의 결과로 출범한 제2공화국이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에 의해 불과 1년여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박정희의 장기집권 시대가 시작되었고, 4·19 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1965
[이승만 전 대통령 하와이에서 서거]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91세의 나이로 서거했습니다.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 바쳐왔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2001
[3·15 의거, 대한민국 최초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이 제정되면서 3·15 의거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 규정되었습니다.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의거의 역사적 위상을 재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7
[북한측 인사, 4·19 국립묘지 첫 방문]
1995년 국립묘지로 승격된 4·19 국립묘지에 처음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인사가 방문했습니다.
이는 4·19 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남북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흥미로운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홍성옥 위원장은 방명록에 '4.19 용사들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의지를 안고 일본의 과거 청산을 위한 활동에서 조선 민족의 대중적 화합으로 투쟁할 때 승리를 달성할 것이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2010
[3·15 의거, 국가기념일로 확정]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3·15 의거가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는 4·19 혁명의 중요한 배경이 된 3·15 의거의 독자적인 위상과 역사적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