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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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유럽 전쟁, 종교 전쟁, 근대 전쟁, 국제 분쟁 + 카테고리

30년 전쟁은 유럽 역사상 가장 잔혹한 종교 전쟁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에서 시작해 유럽 강대국들이 개입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합스부르크와 프랑스의 패권 다툼으로 변모하며 독일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무려 800만 명의 사망자를 기록했습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되며 유럽의 정치 지형을 완전히 재편하고 새로운 강대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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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617

[페르디난트 보헤미아 왕 즉위]

열렬한 로마 가톨릭 지지자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며, 개신교도들의 종교 권리 박탈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다.

이는 30년 전쟁의 직접적인 불씨가 되었다.

1618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발발]

페르디난트의 강압적인 종교 정책에 분노한 보헤미아 개신교 귀족들이 프라하 성에서 2명의 가톨릭 의원을 창밖으로 던지는 사건이 발생하며 30년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 사건은 보헤미아 반란의 시작점이 되었고, 곧 보헤미아 왕국, 실레시아, 루사티아로 번져나갔다. 이 분쟁은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덴마크-노르웨이, 스페인, 포르투갈, 잉글랜드 등 유럽 강대국들의 개입 또는 예의주시를 불러왔다.

1619

[오스트리아 개신교 반란 확산]

보헤미아 반란은 오버외스터라이히,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개신교 귀족들의 동참으로 더욱 확산되었고, 반란군은 비엔나를 공격하며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압박했다.

1620

[오스만-보헤미아 동맹 교섭]

헝가리 개신교도의 왕인 베틀렌 가보르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스만 2세의 지원을 받아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진격했다.

오스만 제국은 보헤미아 반란에 6만 명의 기병 지원 및 폴란드 침공 계획으로 합스부르크를 견제했다.

[폴란드-오스만 전쟁 발발]

오스만 제국이 합스부르크를 지원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체초라 전투에서 격파하며 30년 전쟁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백산 전투, 보헤미아군 대패]

황제군이 보헤미아 반란군을 백산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며 보헤미아 반란을 진압했다.

이 패배는 오스만 제국의 개입 부재와 보헤미아 동맹군의 지지 추락이 원인이 되었다.

1621

[폴란드, 오스만 제국 격퇴]

폴란드군이 재정비하여 초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패배시키며 양국 간의 전쟁은 원상 복귀되었다.

1624

[프랑스, 反합스부르크 동맹 결성]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 강화를 경계한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덴마크를 포함하는 대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며 전쟁의 국제화를 이끌었다.

1625

[덴마크 왕, 개신교 측 참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가 신성 로마 제국 내 영지 문제와 북독일 세력 확대를 명분으로 프랑스, 영국, 스웨덴의 지원을 받아 개신교 측에 참전하며 전쟁의 양상이 확대되었다.

1626

[개신교 용병대장 전사]

덴마크 측 용병대장 브라운슈바이크가 전사하고, 만스펠트도 데사우 전투에서 황제군 발렌슈타인에게 패배하면서 덴마크 연합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

발렌슈타인은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지원을 받아 용병군을 조직하여 덴마크군과 용병부대 사이의 분열을 틈타 각개격파 전술을 펼쳤다.

[루터 전투, 덴마크군 완패]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가 루터 전투에서 로마 가톨릭 동맹군 사령관 틸리 백작에게 완패하며 덴마크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1629

[뤼베크 조약, 덴마크 철수]

루터 전투의 패배와 황제군 및 틸리 백작 군대의 덴마크 침입으로 인해 덴마크는 뤼베크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에서 완전히 물러나며 30년 전쟁의 '덴마크 시대'를 마감했다.

[황제, 복구령 발령]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덴마크의 패배 이후 '복구령'을 발령하여 광대한 사교령과 수도원 영지를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시켰다.

1630

[스웨덴 왕, 독일 침공 시작]

황제군의 발트해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대륙 진출 기회를 노리던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13,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북부 독일 우제돔에 상륙하며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발렌슈타인 해고 결정]

황제는 레겐스부르크 선제후 회의에서 발렌슈타인의 전횡이 극에 달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하고 틸리 백작의 로마 가톨릭 동맹군 편입을 추진했다.

1631

[작센, 스웨덴과 동맹 결성]

관망하던 북부 독일의 주요 개신교 제후인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가 자신의 군대를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지휘 하에 두며 스웨덴의 전쟁 수행에 큰 힘을 실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스웨덴 압승]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새로운 군제와 전술을 활용해 황제군 명장 틸리 백작의 군대를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 전투는 구체제의 테르시오 전술을 무력화시키고 스웨덴의 신 전술 우수성을 세계 최초로 실증한 전투로, 전쟁의 판도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구스타브는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모델 전술을 계승, 발전시켜 횡대, 기병, 포병의 3병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632

[레흐 강 전투, 틸리 백작 사망]

구스타브 왕이 남부 독일 침공 중 레흐 강 전투에서 틸리 백작의 야영진지를 기습하여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고, 틸리는 얼마 안 가 사망했다.

황제군은 유능한 지휘관을 잃어 큰 혼란에 빠졌다.

[발렌슈타인 황제군 재지휘]

틸리 백작의 전사로 당황한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막대한 조건을 수용하고 발렌슈타인을 황제군의 지휘관으로 재소환, 빠른 시간에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바이에른군과 합류하게 했다.

[뤼첸 전투, 스웨덴 왕 전사]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에서 황제군과 스웨덴군 간에 격렬한 결전이 벌어졌다.

스웨덴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스웨덴의 위대한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투 중 전사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국왕 전사 후 스웨덴에서는 크리스티나 여왕이 즉위했고,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는 독일 개신교 제후들과 하이브론 동맹을 체결하여 '방어 전쟁'을 지속했다. 프랑스 리슐리외도 이 동맹에 참가하며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634

[발렌슈타인 암살 사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발렌슈타인을 암살하며 황제군의 지휘 공백을 초래했다.

[뇌르틀링겐 전투, 개신교 대패]

스웨덴-개신교 제후 연합군(하이브론 동맹)이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황제군과 스페인 연합군에게 전사자 17,000명, 부상자 4,0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대패했다.

스페인군의 일제사격 후 재장전 빈틈을 노린 돌격이 주요했다.

이 패배로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었다.

1635

[프랑스, 전쟁 직접 개입]

스웨덴의 세력이 약화되고 개신교 연맹이 와해되자,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포고하며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직접 대결에 돌입했다.

이로써 30년 전쟁은 제4기를 맞이하며 국제전 양상을 더욱 띠게 되었다.

[프라하 조약 체결]

뇌르틀링겐 전투의 대승 이후 황제 측이 유리한 상황에서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스웨덴 세력 약화와 하이브론 동맹 붕괴 위기 속에서 프랑스가 직접 전쟁에 개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1638

[프랑스군, 라인팔츠 함락]

프랑스군의 용병대장이 된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가 공세에 나서 라인팔츠, 브라이베르크, 브라이자크를 함락시키며 전황을 호전시켰다.

1640

[스페인 패권 몰락, 포르투갈 독립]

스페인군이 프랑스, 네덜란드 앞에서 연이어 패퇴하고 포르투갈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유럽 내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징후를 보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스페인을 격파하고 요충지 브레다 요새를 함락시키며 독립을 확실히 했다.

1642

[브라이텐펠트 재전, 황제군 패배]

황제군이 과거 대패를 겪었던 브라이텐펠트에서 다시 스웨덴군과 맞붙어 패배하면서, 황제는 화평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리슐리외 재상 사망]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가 사망하며 프랑스 국내 정치에 불안정성이 가중되었다.

1643

[프랑스 루이 13세 국왕 사망]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사망하고 어린 루이 14세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재상 마자랭은 국왕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만들려던 야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로크루아 전투, 스페인 군사력 붕괴]

프랑스 왕족 콩데 공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며 스페인의 군사력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이 승리로 프랑스는 30년 전쟁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1644

[프라이부르크 전투, 바이에른군 격파]

프랑스군이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로마 가톨릭 동맹군의 핵심이었던 바이에른 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종식을 앞당겼다.

1645

[얀카우 전투, 황제군 대패]

스웨덴군이 프라하 근교 얀카우 전투에서 황제군을 또다시 대패시켰고,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빈으로 도망치는 굴욕을 겪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같은 해 바이에른군도 스웨덴군에게 패배하여 프랑스와 화해를 맺었고, 고립된 작센 공작도 스웨덴군과 휴전 조약을 체결하면서 화평 회의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1648

[30년 전쟁 최후 전투]

보헤미아-팔츠 전쟁이 발발했던 곳에서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이 황제-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하며 대세를 굳혔다.

스웨덴군은 프라하를 포위하고 제국의 수도 빈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전쟁 종결]

스웨덴군의 빈 공격 태세에 압박받은 황제가 마침내 베스트팔렌 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하며 30년간의 잔혹했던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로테스탄트 종교 인정, 네덜란드와 스위스 독립 인정, 스웨덴, 프랑스, 잉글랜드의 성장, 봉건제 쇠퇴,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방 분권화 등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지형이 완전히 재편되었다. 독일 인구의 3분의 1에서 3분의 2가 사망한 인류 전쟁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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