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
연표
1904
[세계 박람회의 부대 행사였던 올림픽]
1904년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올림픽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대회는 독립적인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루이지애나 매입 기념 박람회(Louisiana Purchase Exposition)'라는 거대한 세계 박람회의 부대 행사로 전락했다. 수개월에 걸쳐 산발적으로 진행된 경기들은 박람회의 그늘에 가려졌고, 이는 체계적인 조직력의 부재로 이어졌다. 그 결과, 대회는 극도로 미국 중심적으로 치우쳤다. 전체 96개의 금메달 중 86개를 미국, 캐나다, 쿠바가 휩쓸었으며, 이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이 대회를 진정한 의미의 국제 올림픽으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옥의 레이스 시작]
섭씨 32도가 넘는 폭염과 90%에 육박하는 습도 속에서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주최 측은 '의도적 탈수' 실험을 목적으로 40km 코스에 급수대를 단 두 곳만 설치했다. 비포장도로에서는 심판과 기자들을 태운 차량이 선수들 옆을 달리며 엄청난 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대회 조직위원장 제임스 설리번은 선수들의 수분 섭취를 최소화하여 인체의 한계를 시험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약 40km 코스 중 9.7km와 19.3km 지점에만 각각 급수탑과 우물이 제공되었다. 32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 경기는 시작부터 선수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의 환경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조직위원들은 스스로를 운동가이자 과학자로 여겼고 , 선수들을 경쟁자가 아닌 잔혹한 실험의 피실험자로 간주했다. 이는 당시 세인트루이스 세계 박람회가 표방했던 미국의 산업적, 과학적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거만함과 맥을 같이 한다. 즉,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시험한다는 명목 아래 자행된 살아있는 '전시품'이자 치명적인 실험이었던 것이다. 조직위원들의 오만함은 운동 경기라는 명분 아래 안전하게 인체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끔찍한 결과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쿠바 우편배달부 히치하이킹으로 도착]
쿠바 출신 펠릭스 카르바할은 도박으로 경비를 탕진하고 히치하이킹으로 경기장에 도착했다. 그는 평상복 바지를 잘라 만든 반바지를 입고 뛰었으며, 레이스 도중 배고픔에 썩은 사과를 먹고 복통을 일으켜 길가에서 낮잠을 잤다.
뉴올리언스에서 노름으로 돈을 모두 잃은 카르바할은 간신히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했다. 다른 선수가 가위로 그의 긴 바지를 잘라주어 경기에 참가할 수 있었다. 썩은 사과를 먹고 낮잠을 잔 일화는 유명하지만, 일부 역사가는 이 이야기가 후대에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쿠바 출신 펠릭스 카르바할은 이런 기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종 4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기염을 토했다.
[프레드 로즈의 사기극]
뉴욕 출신 벽돌공 프레드 로즈는 9마일(약 14.5km) 지점에서 경련으로 쓰러져 경기를 포기했다. 그는 감독관의 차를 얻어 타고 약 11마일(17.7km)을 편안하게 이동한 뒤, 다시 내려서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관중의 증언으로 부정행위가 발각되어 즉시 실격 처리되었다.
로즈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와 기념사진까지 찍고 금메달을 받으려던 찰나에 사기 행각이 드러났다. 그는 "단지 농담이었다"고 변명했지만, 미국 아마추어 체육 연맹(AAU)으로부터 영구 제명 징계를 받았다. 이 징계는 몇 달 후 철회되었고, 그는 이듬해 보스턴 마라톤에서 정정당당하게 우승했다.
[들개에 쫓겨 코스를 이탈한 선수]
남아프리카 츠와나족 출신의 렌 타우는 최초의 흑인 아프리카 올림픽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좋은 페이스로 달리고 있었으나, 갑자기 나타난 사나운 들개 무리에게 1마일(약 1.6km) 이상 쫓기면서 코스를 이탈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9위로 경기를 마쳤다.
렌 타우와 얀 마시아니는 공식 국가대표가 아닌, 박람회의 '보어 전쟁 전시관' 소속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그들은 맨발로 경기에 나섰을 것으로 추정되며, 인종차별적인 '인류학의 날' 행사에 동원된 후 마라톤에 참가하는 등 열악한 대우를 받았다.
[먼지 때문에 위벽이 찢긴 선수]
캘리포니아 출신 윌리엄 가르시아는 공식 차량들이 일으킨 자욱한 먼지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흡입한 먼지가 식도를 뒤덮고 위벽을 찢어 심각한 내출혈을 일으켰고, 그는 19마일(약 30.5km) 지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행인에게 발견되지 않았다면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조직위원회의 무리한 경기 운영이 낳은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선수 지원을 위해 투입된 차량이 오히려 먼지를 일으켜 선수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이다. 가르시아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며칠간 사경을 헤맨 끝에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펠릭스 카르바할 복통으로 낮잠]
그는 관중들과 잠시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누고, 인색한 자동차 운전자에게서 복숭아 두 개를 장난스럽게 빼앗아 달리면서 먹었다. 얼마 후, 그는 길가의 과수원에 들러 사과를 먹었는데, 하필이면 썩은 사과였다. 극심한 복통에 시달린 그는 길가에 누워 낮잠을 청하는 기행을 벌였다. (일부 역사학자 조지 R. 매튜스는 이 사과 이야기가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
[최악의 완주율과 남겨진 교훈]
총 32명의 참가자 중 단 14명만이 완주하여,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완주율(43.75%)을 기록했다. 이 참사는 마라톤을 올림픽에서 퇴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이후 마라톤 경기의 안전 규정, 급수 시설 확충 등 체계적인 대회 운영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경기는 스포츠 과학과 선수 안전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수많은 급수대, 통제된 코스, 전문 의료진 지원 등의 규정들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의 끔찍한 교훈 위에 세워진 것이다.
[쥐약과 브랜디로 얻은 금메달]
최종 우승자 토머스 힉스는 탈수 증세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의 코치진은 물 대신 각성제 효과를 노리고 스트리크닌(쥐약 성분)과 브랜디를 섞어 여러 차례 먹였다. 약물에 취해 환각 상태에 빠진 그는 코치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결승선을 통과했고,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약물 사용 사례로 기록되었다.
힉스는 3시간 28분 53초라는 올림픽 마라톤 역사상 가장 느린 우승 기록을 세웠다. 결승선 통과 직후 그는 완전히 탈진하여 쓰러졌고, 4명의 의사가 1시간 이상 치료한 후에야 겨우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현대 규정이라면 코치의 부축과 약물 복용 모두 명백한 실격 사유에 해당한다.
[마라톤 정식 종목에서 제외 주장]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마라톤은 올림픽 역사상 최악의 실패 사례로 남았다. 총체적인 무능과 선수들의 생명을 위협한 결과는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마라톤을 올림픽 정식 종목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끔찍한 사건은 역설적으로 스포츠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체계적인 대회 운영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대두되었다.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수분 공급 전략(현대 마라톤의 수많은 급수대 설치로 이어짐), 차량 통행이 차단된 안전한 코스 확보, 전문 의료진 지원, 그리고 경기력 향상 약물 및 외부 조력에 대한 명확한 규정 확립 등,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스포츠 안전 규정들이 바로 이 끔찍한 교훈 위에서 세워졌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마라톤은 인간의 어리석음, 놀라운 인내력, 노골적인 부정행위, 인종적 편견, 그리고 야망과 무지가 위험하게 교차하는 지점을 모두 담고 있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 기이하고 위험하며 암울한 코미디는 스포츠 과학과 선수 안전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이자, 그 교훈을 얻기 위해 인류가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렀는지를 상기시키는 잊을 수 없는 전설로 남아있다.
1905
[프레더릭 로즈, 보스턴 마라톤 우승]
부정행위를 저지른 프레더릭 로즈는 미국 아마추어 체육 연맹(AAU)으로부터 영구 제명 징계를 받았으나, 몇 달 후 징계가 철회되었다. 그는 이듬해인 1905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정정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