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지카타 도시조

num_of_likes 148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무사, 신선조 부장, 막부 신하, 검객 + 카테고리

히지카타 도시조는 막말 시대 신센구미의 부장이자 엄격한 규율로 '귀신 부장'이라 불렸던 인물입니다. 그는 천연이심류에 입문하며 무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신센구미 부장으로서 교토 치안 유지와 조직 강화에 힘썼습니다. 보신전쟁 발발 후 막부의 충신으로서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으며, 에조 공화국의 육군 부사령관으로서 최후까지 저항하다 하코다테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며 막부 말기 무사의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35

[히지카타 도시조 출생]

무사시국 다마 군 이시다촌에서 농부 히지카타 하야토와 에쓰 사이에서 10인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출생 전 부친을 여의고 6세에 모친을 잃어 둘째 형 부부에게 키워졌습니다.

1835년 5월 5일, 무사시국 다마 군 이시다촌(현재 도쿄도 히노시 이시다)에서 농부인 히지카타 하야토와 에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0인 형제의 막내였으며, 출생 전에 부친을 여의었고, 6세에는 어머니를 잃어 둘째 형 기로쿠 부부에게 키워졌습니다.

1849

[점원 생활과 무술 수행]

14세부터 24세 사이 10년간 에도에서 점원으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본가에서 전해 내려오는 약을 행상하며 각 지역 도장에서 무술 수행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인명록 자료를 통해 14세에서 24세 사이 10년간 에도의 옷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성 문제 등의 전설은 신빙성이 의문시됩니다. 그 뒤에는 본가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시다 산약'을 행상하며 각 지역의 도장에서 타류시합을 포함한 수행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1859

[천연이심류 정식 입문]

히노의 사이토 도장에 출장 온 천연이심류 4대 곤도 이사미를 만나 천연이심류에 정식으로 입문하며 그의 의형제가 되었습니다.

히노의 사이토 도장에 출장으로 온 천연이심류 4대 곤도 이사미(후의 신센구미 국장)를 만나 안세이 6년(1859)년 3월 29일, 천연이심류에 정식 입문하였습니다. 그의 누나 노부의 시형제인 히노 여관 주인 사토 히코고로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860

[무술영명록에 이름 게재]

당대 무술인의 명단인 '무술영명록'에 히지카타 도시조의 이름이 게재되어 그가 어느 정도 무술 실력을 갖추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860년에 간행된 '무술영명록'(武術英名録)에 히지카타 도시조의 이름이 게재되었으며, 이를 통해 도시조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1861

[곤도 이사미 종가 계승 기념 야시합 출전]

곤도 이사미가 천연이심류 종가 4대째를 계승한 것을 기념하는 홍백 야시합에서 홍팀의 대장(다이쇼)을 지키는 역으로 출전했습니다.

1861년, 곤도가 천연이심류 종가 4대째를 계승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홍백 야시합을 개최하고 도시조가 홍팀의 다이쇼를 지키는 역으로 출장하였습니다.

1863

[로시구미로 교토 상경]

시에이칸 동료들과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경호원이 되기 위한 로시구미(낭사조)에 응모하여 교토로 향했습니다.

1863년 2월, 시에이칸의 동료들과 함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경호원이 되기 위해 로시구미(낭사조)에 응모하여 교토로 떠났습니다.

[신센구미 부장 취임 및 규율 확립]

8월 18일 정변 이후 미부로시구미가 신센구미로 발족되면서 부장에 취임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무사도 법도를 제정하고, 법도를 어길시 할복하도록 하여 조직의 기강을 확립하고 곤도 이사미를 국장으로 세웠습니다.

1863년 8월 18일 정변 후, 미부로시구미의 활약을 인정받아 신센구미가 발족되었습니다. 부장의 위치에 있던 도시조는 막부에 정식으로 인정받는 낭사대가 되기 위하여 무사도에 맞는 법도를 정하고, 법도를 어길 시 사도불각오에 의해 할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그 정해진 법도에 의해 니이미 니시키 할복하였고, 세리자와 카모 등을 암살하였습니다. 권력을 쥔 곤도 이사미가 국장이 되었으며, 도시조는 국장 곤도 이사미의 오른팔로서 교토의 치안 유지를 위해 일했습니다.

1864

[서양식 군비의 필요성 인식]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하기 전인 1864년경부터 칼로는 더 이상 싸움이 되지 않는 시대임을 깨닫고 서양식 군비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바·후시미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에 케이오우 1864년경부터 이제부터는 칼로 싸움이 되지 않는 시대라는 것을 깨닫고 서양식의 군비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케다야 사건에서의 냉철한 지휘]

이케다야 사건 당시 반대(半隊)를 이끌고 이케다야 주위를 포위한 후, 지원군을 기다려 냉정하게 돌입을 지시했습니다. 이 덕분에 신센구미 한 부대의 공을 지켰고, 신센구미의 이름이 천하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64년 6월 5일 이케다야 사건 때에는 반대(半隊)를 이끌고 조슈번사, 도사번사가 빈번히 출입하는 니토라(시코쿠야) 방면을 탐색하여 돌아다녔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케다야의 지원을 급히 가서, 바로 돌입하지는 않고 이케다야의 주위를 포위하였으며, 그 후로부터 달려온 아이즈번, 구와나번의 병사를 이케다야로 들어가게 하지 않고, 신센구미 한 부대의 공을 지켰습니다. 아직 지위가 약했던 신센구미를 생각한 도시조다운 냉정한 행동이었고, 그로 인해 신센구미의 이름도 천하에 퍼졌습니다.

1865

[야마나미 게이스케 할복 및 내부 숙청]

이케다야 사건 이후, 부장이었던 야마나미 게이스케가 탈주하여 할복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부대 규율 유지를 위해 여러 대원을 할복 또는 참살시키는 등 강력한 내부 숙청을 주도했습니다.

이케다야 사건 이후, 부장이었던 야마나미 게이스케를 총장으로 삼아, 부장은 도시조 한명이 되었습니다. 부대에 설 자리가 없어진 야마나미 게이스케가 탈주해 할복하게 된 사건에는 야마나미와 히지카타의 대립이 있었다고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사이가 좋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후에도 부대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 가와이 기사부로, 다니 산주로, 다케다 간류사이 등을 할복 혹은 참살시켰습니다. 또한 이토 가시타로가 신센구미에서 탈퇴하여 조직한 '어릉위사'에 스파이 사이토 하지메를 보내 이토의 곤도 국장 암살 계획을 방지하고 이토, 도도 헤이스케를 암살하여 어릉위사를 파직시켰습니다(아부라코지 사건).

1867

[막부 신하로 봉해짐]

신센구미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막부에 정식으로 봉해지는 막신(幕臣)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1867년 6월에 막신에 봉해졌습니다.

[대정봉환 발생]

쇼군이 자신의 실세 정부 권위를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이 일어났고, 이후 왕정복고 칙령이 내려져 막부가 사실상 붕괴되는 격변기를 맞았습니다.

1867년 10월 14일 대정봉환(쇼군이 자신의 실세정부 권위를 천황에게 돌려 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2월 9일에 왕정복고 칙령이 내려져 막부는 사실상 붕괴하였습니다.

1868

[아이즈 전쟁 참전 및 부상]

우쓰노미야 성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미부 전투에서 패배하고 발에 부상을 입어 아이즈에서 약 3개월간 요양했습니다. 완치 후 아이즈 방어전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보나리토게 전투 등에서 패배하며 아이즈 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우쓰노미야 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우쓰노미야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미부 전투에서 패배하여, 신정부군과 다시 우쓰노미야에서 싸우던 때에 발이 부상을 입어, 본군이 있었던 아이즈에 호송되었습니다. 아이즈에서 약 3개월 간 요양생활을 보내고, 그 동안 곤도 이사미의 묘를 덴네이지에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완쾌하여 전선에 복귀한 후에는 아이즈의 방어전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8월 보나리토게 전투의 패과 같이, 아이즈전쟁이 격화되었습니다.

[도바 후시미 전투와 보신전쟁 참전]

도바 후시미 전투가 발발하며 보신전쟁이 시작되었고, 부상당한 국장 곤도 이사미를 대신하여 신센구미를 이끌고 신정부군과 맞섰으나 패배했습니다.

1868년 1월 3일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시작된 보신전쟁이 발발하여, 도시조는 스미도메 사건으로 인해 부상당한 국장 곤도 이사미를 대신하여 신센구미를 이끌어 싸우지만, 신정부군의 총격전 앞에 패배합니다.

[고슈 가쓰누마 전투 패배]

곤도 이사미와 함께 이름을 바꾸고 가이국으로 향했으나,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했으며, 급히 원군을 요청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도바·후시미 전쟁에서 진 막부군이 오사카에서 에도로 철수한 후 곤도와 도시조는 오쿠보 야마토와 나이토 하야토로 잠시 이름을 바꾸어 가이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3월 6일,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 패하여 후퇴하였으며, 도시조는 급히 원군요청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곤도 이사미 투항]

나가레야마에서 재기를 모색하던 중 신정부군에게 포위당한 국장 곤도 이사미에게 할복을 만류하고 투항을 권했습니다.

나가레야마에서 재기를 모색하지만, 4월 3일 갑작스럽게 신정부군에게 포위당한 국장 곤도 이사미가 신정부군에 투항했습니다. 이때 도시조가 곤도의 할복을 멈추게 하여 투항을 권했다고 합니다.

[에도 개성 및 구 막부군 합류]

곤도의 구명 탄원이 실패한 후, 에도 개성이 성립되자 에도를 탈주하여 구 막부 탈주군에 합류했습니다. 아키즈키 도노스케가 이끄는 선봉군의 참모를 맡아 우쓰노미야 성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곤도 투항 후, 구명탄원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자 신센구미를 야마구치 지로(사이토 하지메)에게 맡기고, 아이즈로 향했습니다. 시마다 가이 등 수 명의 대원만을 데리고 오토리 게이스케 등을 이끌고 있는 구 막부 탈주군과 합류하였습니다. 4월 11일에 에도개성이 성립하고, 에도를 탈주하여 도시조는 아키즈키 도노스케가 이끌고 있는 선봉군의 참모를 맡았습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우쓰노미야 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우쓰노미야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곤도 이사미 처형]

신정부군에게 투항을 거부당했던 국장 곤도 이사미가 이타바시 근처에서 처형(참수)당했습니다. 도시조는 그의 구명을 위해 탄원했으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도시조는 에도로 향하여 가쓰 가이슈(막부의 신하)들에게 직접 담판을 짓고 곤도의 구명을 탄원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1868년 4월 25일 신정부군한테서 투항을 거부당했던 곤도는 이타바시 근처 (현 JR이타바시역 앞에 묘소가 있다.)에서 처형(참수)당했습니다.

[에노모토 다키아키와 에조치로 향함]

쇼나이번과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붕괴 후, 에노모토 다키아키가 이끄는 구 막부 해군에 합류하여 신센구미 잔존 대원들과 함께 에조치(홋카이도)로 떠났습니다.

도시조는 원군을 얻기 위해 쇼나이번으로 향했지만 이미 복종체제인 쇼나이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센다이로 가 에노모토 다키아키가 이끄는 구 막부해군에 합류하여 에노모토와 함께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군의에 참가하여 동맹군총감에 추천되지만, 곧 동맹이 붕괴하여 동맹번들이 계속 신정부군에 굴복한 후 싸울 땅이 있는 한 계속 싸울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신센구미의 살아 남은 대원에 쿠와나 번사들을 합하여 오오에마루에 승선하고, 에노모토 다키아키와 함께 10월 12일 센다이오리노하마(현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를 떠나 에조치로 갔습니다.(홋카이도)

[에조치 상륙 및 고료카쿠 점령]

에조치 와시노키에 상륙한 후 문도군 총독이 되어 고료카쿠를 점령하고, 하코다테와 마쓰마에성까지 함락시키는 데 기여하며 에조치 평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0월 20일, 에조치 와시노키에 상륙 후 도시조는 문도군 총독이 되어서 고료카쿠(북해도의 오각형 모양의 장소)로 향했습니다. 신센구미는 오토리 게이스케 총독 밑에서 일을 진행했지만, 도시조는 시마다 가이 외에 수 명의 신센구미 대원이 언제나 따랐다고 전해집니다. 하코다테, 고료카쿠를 점령하고 도시조는 몇몇 가쿠헤이타이 등을 이끌고 마쓰마에로 출진하여 마쓰마에성(후쿠야마성)을 함락시키고 잔병을 에사치조까지 추격했습니다. 이때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도시조 군을 바다에서 원호하기 위해 군함 '가이요마루'로 에사치에 향했으나, 폭풍우에 많이 좌초되었습니다.

[에조 공화국 육군 부사령관 취임]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총재로 하는 에조 공화국이 성립되자, 간부이자 육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하코다테의 치안과 육해군 재판장도 겸임하며 최후의 항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에사치를 무사점령한 도시조는 한번 마쓰마에 성에 돌아와 12월 15일 에노모토가 각국 영사를 초대하여 연 에조치평정축하연에 맞추어 고료카쿠로 개선했습니다. 그 후 간부를 정하는 선거가 이뤄져,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총재로 하는 에조공화국(고료카쿠가 본진)이 성립되었습니다. 도시조는 간부이자 육군부사령관이 되어 하코다테시의 치안담당이나 육해군 재판장도 겸했습니다. 하코다테 정부가 수립되고 에노모토 정부 인사들이 축배를 들 때에도 도시조는 홀로 침묵을 지키며, '지금은 가볍게 들뜰 때가 아니다.'라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1869

[미야코 만 해전 참가]

신정부군 내습 정보에 따라 신정부군의 철갑선 탈취를 목표로 했던 미야코 만 해전에 참가했지만, 작전은 실패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생환했습니다.

1월부터 2월을 걸쳐 하코다테와 고료카쿠를 정비하여 3월에 신정부군 내습의 정보가 들어와 도시조는 신정부군의 철갑선 탈취를 목적으로 했던 미야코 만 해전에 참가하였지만, 작전은 실패당하여 사상자가 속출하고도 도시조는 생환합니다.

[후타마타구치 전투에서 활약]

신정부군의 에조치 상륙 후 후타마타구치 전투에서 철저한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부하들을 진정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연전연승했지만, 퇴로가 끊겨 어쩔 수 없이 고료카쿠로 귀환했습니다.

1869년 4월 9일, 신정부군이 에조치 을부에 상륙을 개시하였습니다. 도시조는 후타마타구치 전투에서 신정부군의 진격에 대하여 철저하게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그 전투 중에 신정부군은 방울의 소리를 내며, 포위당했다고 생각되게 하는 행동을 하여, 자군이 포위당했다고 생각한 도시조 군은 동요했습니다. 그것에 대해 '정말로 포위하려 한다면, 소리를 숨겨서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라고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여 부하들을 진정시켰습니다. 또 싸우는 동안 도시조는 부하들에게 직접 술을 돌리며 격려했습니다. 도시조군이 사수하였던 후타마타구치는 연전연승했으나, 또 다른 한편 마쓰마에구치가 돌파당해 퇴로가 끊겨 어쩔 수 없이 후타마구치에서 퇴거하여 고료카쿠로 귀환했습니다.

[하코다테 전투에서 장렬한 전사]

신정부군의 하코다테 총공격 중, 벤텐다이바가 포위되자 적은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여 잇폰 기관문에서 말 위에서 지휘하다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보신전쟁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했습니다.

1869년 5월 11일(음력), 신정부군의 하코다테총공격이 시작되어, 신센구미대원 시마다 카이가 수비를 하고 있던 벤텐다이바가 신정부군에게 포위당해 고립되자 도시조는 농성전을 싫어하여 적은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였습니다. 신정부군함 '아사히'가 군함에 의해 격침당하는 것을 보고 '이 기회를 놓치지마라!'라고 외쳤으나, 하코다테 잇폰 기관문에서 육군사령보좌역 오노 우추에게 패배당하는 동료들을 이끌고 진군시키며 '우리들의 법도에 따라 도망가는 자는 벤다!'라고 외쳤습니다. 도시조는 잇폰 기관문을 수비하여 일곱 겹으로 조여오는 신정부 군에게 응전하였으며, 말 위에서 지휘를 했습니다. 그 난전 중에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여 낙마, 측근이 급히 다가 왔을 때는 이미 절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적의 총탄이 아닌 쏟아지는 탄에 맞았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항복에 완강히 반대하는 도시조를 제거하기 위해 아군의 손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도시조의 유체는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고료카쿠에 이장되었다고도 하고, 다른 장소에 안치했다고도 전해지지만, 그 장소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2022

[히지카타 도시조 추정 검 발견]

2022년에 히지카타 도시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이 발견되었습니다.

2022년 히지카타 도시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검이 발견되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히지카타 도시조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