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도요 카프
연표
1949
[히로시마 카프 창단 및 센트럴 리그 가입]
히로시마 지역 부흥을 위해 프로 야구단 설립이 결정되고, 센트럴 리그에 가입했습니다. 구단 명칭은 히로시마시 오타 강의 잉어와 히로시마 성의 별명('잉어 성')에서 따와 '히로시마 카프'로 정해졌습니다.
리그 확장 방침에 따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의 괴멸적 피해로부터 히로시마 지역을 부흥시키기 위해 프로 구단을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15일 센트럴 리그에 가입했으며 히로시마시를 따라 흐르는 오타 강이 잉어의 산지이고, 원폭 투하로 인해 무너져 내린 히로시마 성의 별명도 ‘잉어 성’이었기 때문에 구단 이름을 히로시마 카프로 지었습니다. 팀 초대 감독으로는 현지 히로시마 출신인 이시모토 슈이치가 취임했으며, 시라이시 가쓰미가 선수 겸 조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50
[센트럴 리그 첫 시즌 및 재정난]
후쿠오카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센트럴 리그 개막전을 치렀으며, 홈 구장을 히로시마 종합 구장으로 정했습니다. 모기업이 없어 재정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선수 모집에 힘썼지만, 양대 리그 팀 중 유일하게 승률 3할에 도달하지 못하며 최하위(8위)를 기록했습니다.
3월 10일, 후쿠오카 헤이와다이 야구장에서 센트럴 리그 개막전을 치렀고 홈 구장을 히로시마 종합 구장으로 정했습니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모기업이 없었기 때문에 구단 조직에 대한 지원이 충분치 않아 감독 이시모토 슈이치가 직접 나서 선수 모집에 분주했습니다. 투수 하세가와 료헤이, 나이토 고조, 야수 시라이시 가쓰미, 이와모토 아키라 등이 중심이 되어 팀을 이끌었지만 허약한 팀 사정상 참패를 거듭하여 양대 리그 팀 중 유일하게 히로시마만이 승률 3할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299). 이 해는 구단 역사상 최다 패전(96패)과 최저 승률(.299)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시라이시 가쓰미가 유격수 부문으로 베스트 나인에 포함되면서 체면 치례에는 성공했습니다.
1951
[시민들의 '술통 모금'으로 구단 존속]
심각한 경영난으로 팀 해산 또는 합병 위기에 처했으나, 히로시마 시민들이 '술통 모금' 운동을 펼쳐 400만 엔을 모금하며 구단 잔류에 기여했습니다. 구단도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해체 위기를 넘겼습니다.
구단 경영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지면서 팀 해산안, 또는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다이요 웨일스)와의 합병안 등의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히로시마 시민들이 술통에 모금을 모집한 이른바 ‘술통 모금’을 통해 구단 잔류를 위해 필요한 400만 엔(당시 기준)을 모았고, 구단도 나서 온갖 방법을 다써 결국 구단이 해체되는 상황은 막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전년도 클린업으로 팀내 최다인 21홈런 74타점을 기록한 히가사 가즈오가 시즌 도중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버렸습니다. 그 해에는 7개 구단에 의해 총 120경기가 치러져야 했지만 가을에 미국 선발팀의 방일이 있었기 때문에 순위가 결정된 이후의 경기는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특히 히로시마는 리그 최하위가 결정된 뒤 무려 21경기가 취소되어 99경기 밖에 소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혼란의 와중에도 다케치 오사무가 타격 7위에 오르며 구단 사상 처음으로 리그 타자 순위 10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52
[처벌 위기 모면 및 투수진 활약]
리그 대표자 회의에서 시즌 승률 3할 미만 팀 처벌 결정이 있었으나, 하세가와 료헤이와 스기우라 류타로 투수의 활약으로 간신히 3할 승률을 넘겨 처벌을 면했습니다. 구단 역사상 투수 순위 10걸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시모토 감독이 퇴임했습니다.
리그 개막 전에 있은 리그 대표자 회의에서 시즌 승률 3할에 도달하지 못한 팀은 처벌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는 홀수 구단(7개 구단)이 되면서 리그 일정을 짜기 복잡해지자 이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하위권 팀 구단을 정리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구단 설립 후 2년 연속 리그 최하위에 그쳤던 히로시마가 유력 후보로 꼽혔지만 하세가와 료헤이와 스기우라 류타로 등 2명의 투수가 팀 승수(37승)의 과반수(20승)를 챙기며 승률 3할 1푼 6리를 기록하면서 간신히 처벌을 면했습니다. 결국 3할 승률 달성에 실패한 쇼치쿠 로빈스가 시즌 종료 후 대표자 회의에서 합병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최종적으로 쇼치쿠는 다이요 웨일스와 합병하였다) 또한 스기우라 류타로가 방어율 9위에 오르면서 구단 사상 처음으로 투수 순위 10걸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해를 마지막으로 이시모토가 퇴임했습니다. 대신 쇼치쿠로부터 아카미네 마사시 일파의 선수들인 고즈루 마코토, 가나야마 지로가 팀에 입단했고, 이어 영입한 일본계 2세 선수들인 제니무라 형제(제니무라 겐조, 제니무라 다테시), 미쓰요시 쓰토무가 입단하여 10만 명의 관중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즐겼습니다. 이 해는 구단 역사상 최소 홈런(29개)을 기록했습니다.
1960
[창단 첫 5할 승률 달성]
시라이시 가쓰미 감독 체제 하에 창단 이래 처음으로 5할 승률(.504) 이상을 기록하며 팀 성적 향상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시라이시 감독은 이 해를 마지막으로 물러났습니다.
1953년부터 시라이시가 이시모토의 뒤를 이어 감독직을 수행했으나 여전히 성적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에는 비록 B클래스였지만 창단 이래 처음으로 5할 승률 이상 시즌(.504)을 만들어냈습니다. 1960년을 마지막으로 시라이시 가쓰미가 감독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61
[새 감독 취임 및 홈구장 이전]
몬젠 마사토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홈 구장을 히로시마 시민 구장으로 이전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1960년을 마지막으로 시라이시 가쓰미가 감독직에서 물러난 데 이어 몬젠 마사토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맡은 두 시즌 모두 5할 승률 달성에 실패하면서 사임했습니다. 한편 홈 구장을 히로시마 시민 구장으로 이전했습니다.
1968
[구단명 변경 및 첫 A클래스 진입]
도요 공업(현 마쓰다)이 필두 주주가 되면서 구단명을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개칭했습니다. 네모토 리쿠오 감독 취임 후, 구단 창단 19년 만에 처음으로 A클래스(3위)에 진입하며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도요 공업(현 마쓰다) 사장 마쓰다 쓰네지가 필두 주주가 되며 구단명을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개칭했습니다. 시민 구단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도요 공업을 메인 스폰서로 하는 마쓰다 가 사유의 경영 구단이 되었습니다. 한편 하세가와의 뒤를 이어 네모토 리쿠오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해서 소토코바 요시로와 아니야 소하치 두 투수의 활약으로 3위에 등극, 구단 창단 19년 만에 첫 A클래스(리그 1위부터 3위) 등극에 성공했습니다. 네모토 시대에는 성적이 썩 훌륭하진 않았으나 후에 투수 소토코바 요시로, 타자 기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고지, 미즈타니 지쓰오 등을 길러내며 후일 ‘빨간 헬멧 군단’의 태동을 촉구했습니다.
1975
[첫 리그 우승과 '빨간 헬멧 군단' 탄생]
구단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 조 루츠가 취임했으며, 팀의 상징색을 '빨간색'으로 강화하며 모자와 헬멧도 빨간색으로 교체했습니다. 루츠 감독은 15경기 만에 사임했으나, 후임 고바 다케시 감독 체제 하에 창단 첫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황금 시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전년부터 1군 타격 코치를 맡고 있던 조 루츠가 구단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불타는 투지를 상징하기 위하여 모자와 헬멧의 색 또한 빨간색으로 교체하였습니다. 그러나 루츠는 심판의 판정에 대한 불만 등으로 불과 15경기 만에 팀을 떠나 고바 다케시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주니치 드래건스와 한신 타이거스와의 치열한 우승 경쟁 끝에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 영광의 순간을 누렸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2무 4패로 물러나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이 해 야마모토 고지와 기누가사 사치오가 타격왕에 올랐고 소토코바 요시로가 최다승, 오시타 쓰요시가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맹활약했습니다. 히로시마의 헤이와오도리에서 열린 센트럴 리그 우승 기념 퍼레이드에서 팬들이 약 30만 명이 모여 전에 없는 대인기를 누렸고 그 해를 시작으로 팀의 황금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1977
['카프=빨강' 이미지 정착]
가슴판 번호와 문자, 등번호, 양말 스타킹을 모두 빨간색으로 맞추며 '카프=빨강'이라는 팀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정착되었습니다.
가슴판 번호와 문자, 등번호, 양말 스타킹을 모두 빨간색으로 맞추며 이때부터 '카프=빨강'이라는 이미지가 정착되었습니다.
1978
[팀 시즌 200홈런 달성]
야마모토 고지, 기누가사 사치오 등의 활약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팀 시즌 200홈런을 달성하며 '붉은 헬멧 타선'의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팀 시즌 200홈런을 달성했습니다. 야마모토 고지, 기누가사 사치오와 함께 짐 라이틀, 헨리 개럿의 쌍포 용병 등이 뭉쳐 붉은 헬멧 타선을 형성했습니다. 이 해는 구단 역사상 최다 홈런(205개)과 최고 타율(.284)을 기록했습니다.
1979
[첫 일본 시리즈 우승]
두 번째 센트럴 리그 우승에 성공하고,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승리하며 구단 역사상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역사상 두 번째로 리그 우승에 성공했습니다. 1979년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긴테쓰 버펄로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4승 3패로 일본시리즈 우승의 비원을 달성했습니다. (에나쓰의 21구)
1980
[리그 및 일본 시리즈 2연패]
시즌 시작부터 파죽지세로 승리를 쌓아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일본 시리즈에서 긴테쓰를 다시 꺾고 일본 시리즈 2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시즌 시작부터 파죽지세로 승리를 쌓으며 2년 연속 리그 우승(팀 역사상 세 번째)을 달성했으며 일본 시리즈에서 다시 만난 긴테쓰를 상대로 다시 승리를 거두며 일본 시리즈 2연패라는 과업을 완수했습니다.
1982
쓰다 쓰네미가 팀 역사상 최초의 신인왕을 차지했습니다.
1984
[세 번째 일본 시리즈 우승]
야마모토, 기누가사 등 타자들과 야마네, 기타벳푸, 오노 등 투수진의 맹활약에 힘입어 세 번째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 해는 구단 역사상 최고 승률(.625)을 기록한 해이기도 합니다.
야마모토, 기누가사에 더해 야마네 가즈오, 기타벳푸 마나부, 오노 유타카 등 투수진의 맹활약에 힘입어 세 번째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팀의 황금기를 이끈 고바 다케시 감독은 1985년을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해는 구단 역사상 최고 승률(.625)을 기록했습니다.
1986
[아난 준로 감독 취임 첫 해 리그 우승]
아난 준로 감독이 취임 첫 해에 '순국산 타선'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이 해를 마지막으로 팀의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야마모토 고지가 은퇴했습니다.
아난 준로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아난은 스스로의 역할을「야마모토 고지 감독이 실현될 때까지의 이음새」라고 말했지만 취임 첫 해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타선 스타팅 멤버에 외국인 용병이 한 명도 없는「순국산 타선」으로 이뤄낸 성과였습니다. 또 이 해를 마지막으로 오랜 기간 팀의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야마모토 고지가 은퇴했는데 이후 1990년대까지 팀은 4번 타자 부족에 시달리게 됩니다.
1987
[기누가사 히로오, 연속 출장 세계 기록 경신]
기누가사 히로오 선수가 뉴욕 양키스의 루 게릭의 2130경기 연속 출장 세계 기록을 경신하며 전 세계 야구 역사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6월 13일, 기누가사 히로오가 뉴욕 양키스의 1루수 루 게릭의 2130경기 연속 출장 세계 기록을 경신해 시즌 종료까지 총 2215경기까지 기록을 늘린 후 은퇴했습니다.
1991
[투수력 중심의 리그 우승]
쓰다 쓰네미 선수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오노 유타카의 마무리 전환과 야마사키 류조의 활약, 투수력을 중심으로 한 수비 야구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4월 쓰다 쓰네미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오노 유타카가 마무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야마사키 류조가 팀의 5번 타자로 자리잡았으며 투수력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의 야구로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일본 시리즈에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대결, 가와구치 가즈히사를 4번이나 출격시키며 분투했지만 결국 3승 4패로 지고 말았습니다.
1993
[쓰다 쓰네미 선수 요절 및 팀 최하위 추락]
쓰다 쓰네미 선수가 32세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요절하며 팀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 여파로 팀은 리그 최하위로 추락했습니다. 야마모토 고지 감독이 책임을 지고 팀을 떠났습니다.
7월 30일 쓰다 쓰네미가 뇌종양으로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개막 직후 6연승을 기록하는 등 초반 호조를 보였지만 쓰다 사후 팀 전체적으로 충격을 받아 급격히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유망주 사사오카와 기타벳푸 등 투수진마저 무너지며 리그 최하위로 내려 앉았으며 이 책임을 지고 야마모토 감독이 팀을 떠났습니다.
2011
[50이닝 연속 무득점 센트럴 리그 신기록]
5월 26일부터 6월 3일까지 세이부전과 오릭스전에서 50이닝 연속 무득점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일본 기록인 59이닝에 이은 두 번째 기록입니다.
2011년 5월 26일 세이부전의 5회부터 6월 3일 오릭스 버펄로스전 6회까지의 기록으로, 1996년에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기록한 49이닝을 웃돈 센트럴 리그 신기록이며, 일본 기록은 1953년에 다이에이 유니온스가 기록한 59이닝입니다.
2013
[16년 만의 A클래스 진입 및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 출전]
16년 만에 A클래스(3위)에 진입하며 긴 부진의 터널을 벗어났습니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출전했지만,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패배했습니다.
16년 만에 A클래스 진입을 했고, 리그 3위에 그쳤습니다. 첫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출장해서 한신 타이거스와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승으로 이겼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3패로 졌습니다.
2016
[최다승 기록 및 리그 우승]
오가타 고이치 감독의 지휘 아래 구단 역사상 최다인 89승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우승하며 팀의 새로운 황금기를 열었습니다.
오가타 고이치 감독의 지휘 아래 89승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또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우승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해는 구단 역사상 최다 승리(89승)를 기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