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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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교육자,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정치인 + 카테고리

황신덕은 일제강점기 언론인, 교육자,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했으며, 2.8 독립 선언과 3.1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 및 교육자로 추계예술대학교 등을 설립하고 여성 권리 신장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말 친일 행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98

[황신덕 탄생]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 일찍부터 신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언니는 3.1 여성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황애덕입니다.

황신덕은 평안남도 대동군(현 평양직할시)에서 황석청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안(齊安)아고 아호는 추계(秋溪)이다. 1898년생으로 일설에는 1889년생이라고도 한다. 평양 출신으로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나 일찍부터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3·1 운동에 참가했고 3·1여성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황애덕이 황신덕의 언니이다.

1919

[2.8 독립 선언 및 3.1 운동 참여]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귀국하여 3.1 만세 운동에도 적극 가담했습니다.

1919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일본에서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 그해 3월 전국적인 만세 소요가 계획되자 입국하여 3·1 만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0

[여자학흥회 조직]

유각경 등과 함께 여자학흥회(女子學興會)를 조직하여 여성 운동에 나섰습니다.

1920년 1월 유각경 등과 함께 여자학흥회(女子學興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나 1923년 봄 탈퇴하였다.

[3.1 운동 1주년 기념행사 주관 및 체포]

3.1 운동 1주년 기념행사를 일본 히비야 공원에서 거행, 주관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주간 구류 처분을 받았습니다.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일에는 일본 히비야(北谷) 공원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행사를 거행, 주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주일간 구류 처분을 받고 유치장을 다녀왔다.

1921

[니혼여자대학 편입]

일본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니혼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에 편입하여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1921년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을 중퇴하고 니혼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에 편입하였고 1926년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를 졸업했다.

1925

[경성여자청년동맹 창설 참여]

허정숙, 박정덕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창설하여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1925년 1월 허정숙, 박정덕 등과 함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을 창설하여 멤버로 활동하였고, 1926년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동경여자유학생 출신이며 일월회파(一月會派) 사회주의자 안광천(安光泉)의 아내인 이현경(李賢卿)이 귀국하자 경성청년여성동맹과 일월회파 일부가 합류하여 1926년 12월 중앙여자청년회(中央女子靑年會)를 창설할 때 그도 참여하였다.

1926

[기자 생활 시작]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시대일보와 중외일보의 기자가 되었습니다.

1926년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부를 졸업했다. 귀국한 뒤로는 1926년부터 《시대일보 (1924년)|시대일보》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고, 《조선중앙일보|중외일보》의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27

[신간회 및 근우회 활동]

신간회에 가입하고, 좌우 합작의 여성 독립 운동 세력인 근우회(槿友會) 창립 멤버이자 핵심부에서 활동했습니다.

이후 중앙여자청년회의 회원으로 있다가 근우회를 창립할 때 창림 멤버로서 참여하였다.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하고, 그해에 좌우 합작의 여성 독립 운동 세력인 근우회(槿友會)의 핵심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1930년대 말부터 광복 시점까지 각종 강연과 좌담회, 기고를 통하여 친일 활동을 했다.

1929

[임봉순과 결혼]

동아일보 기자 출신 임봉순과 결혼했습니다.

1929년 동아일보의 기자 출신 임봉순과 결혼했다.

1930

[잡지 '별건곤'에 동성애 고백]

소파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 11월호에 자신의 동성애 경험을 고백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30년 그는 자신의 동성애를 고백하여 화제가 되었다. 소파 방정환이 주관하던 잡지 별건곤은 중외일보 기자로 있던 황신덕은 물론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 이덕요 등의 동성연애 경험담을 취재한 기획기사를 싣기도 했다.

1935

[동아일보 및 신가정 기자 재직]

동아일보 기자와 동아일보사의 여성잡지 '신가정' 기자로 1940년까지 활동했습니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아일보》의 기자와, 동아일보사의 여성잡지 의 기자로 재직했다.

1938

[친일 단체 가입 및 활동]

일제의 국방 헌금 모금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1938년 일제의 국방 헌금 모금운동에 참여하였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여성부문 평의원으로 친일 단체에도 가입했다. 조선임전보국단에는 김활란, 모윤숙, 박인덕 등이 여성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황신덕은 이들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매일신보》와 같은 친일 매체에 친일 기고문을 싣거나 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1940

[경성가정의숙 교장 취임 및 일제 협력]

경성가정의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의 교장을 지내면서 일제의 전시 체제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당시 학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운현궁 근처의 부지를 이우에게 기증받기도 했습니다.

1940년 10월 10일부터는 박찬주와 남편 임봉순 등의 후원으로 설립한 경성가정의숙(京城家庭女塾) 교장을 지내면서는 일본 제국|일제의 전시 체제에 적극 협력했다. 당시 부교장은 박순천이었다. 당시 학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까지 갔던 그를 만난 이우는 흔쾌히 운현궁 근처의 부지를 그에게 기증해주었다.

1943

[정신대 동원 의혹]

일부 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이는 해방 후에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43년 제자들을 정신대로 보냈다는 의혹이 있다. 당시 한 경성가정의숙 재학생은 자신이 당시 정신대에 가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황신덕 교장이 하루는 ㄷ여고, ㅇ여고 같은 다른 학교 학생들도 정신대에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용기있는 학생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라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교장 선생님이 저렇게 눈물로 호소하는데, 내 한몸 희생해 학교를 구하자는 결심이 솟구치더군요." 그리고는 교장실을 찾아갔고 바로 기념사진 찍고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했다.

1945

[경성가정의숙,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

경성가정의숙이 사립학교 규정에 따라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받았습니다.

1940년 신입생 37명으로 세운 경성가정의숙은 1945년 1월에 사립학교 규정에 의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받았다.

[독립촉성중앙회 참여]

광복 후 우익 진영으로 선회하여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했습니다.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 결성에 적극 나섰고, 이후 우익 진영으로 선회하였으며, 1945년 10월 독립촉성중앙회에 참여하였다.

1947

[정치 활동 및 교육 활동 확장]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입법의원을 지냈고, 경성가정의숙을 정식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시켜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관선 대변인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부 대변인을 지냈습니다.

1947년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입법의원을 지냈다. 또한 경성가정의숙을 정식 중앙여자중학교로 승격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7년 미군정에서 남조선과도정부를 세우자, 과도정부 관선 대변인을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1950년까지 정부 대변인을 지내기도 했다.

1950

[6.25 전쟁 중 납북 및 탈출]

6.25 전쟁 직후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게 납치되었으나, 그해 10월 UN군의 공습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직후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게 납치되었으나 그해 10월 UN군의 공습으로 인민군 사상자가 발생하고 혼란에 빠지자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1952

[여성문제연구회 창립 및 교육 재건]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와 여성문제연구회를 창립하고, 북아현동에 중앙여중·고와 추계예술전문학교 교사를 신축하여 현대적인 인성 교육과 전통 문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1952년 휴전하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북아현동에 중앙여중·고와 추계예술전문학교의 교사(校舍)를 현대식으로 신축하고, 최초로 생활지도부를 설치하여 인성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양 유일의 여학생 오케스트라를 창설하여 연례연주회를 개최하게 하였으며, 학교 교과목에 가야금과 전통 무용을 정규 교과 시간에 포함시켜 교육하고 서예와 묵화를 가르치는 등 전통 문화 교육에도 앞장섰다.

1956

[가정법률상담소 창설]

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하여 전업주부의 권리, 남성의 정조의 의무 위반 문제, 여성의 이혼 상담 등을 지원하며 여성의 불이익 구제에 힘썼습니다.

1952년에 여성문제연구회를 창립하였고, 1956년에 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하여 전업주부의 권리 문제, 남성의 정조의 의무 위반 문제, 여성의 이혼 상담과 수속 등에 대한 문제를 제반 지원하였다.

1958

[가족법 개정 운동 추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과 함께 가족법 개정 운동을 추진하여 여성의 인권을 고려하지 않은 신민법 개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58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李兌榮)과 함께 가족법개정운동(家族法改正運動)을 추진하였다. 이때 이태영으로부터 1952년 신민법(가족관계법의 전신)을 기초 입안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수하여 가족관계법 개정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1961

[추계학원 재단 설립 및 이사장 취임]

추계학원 재단을 설립하고 제1대 이사장이 되었으며, 추계국민학교와 추계유치원도 설립하며 교육사업을 확장했습니다.

1961년 추계학원 재단을 설립하여 제1대 이사장이 되고, 추계국민학교, 추계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62

[문화훈장 대통령장 수여]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으며 국가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1960년대부터는 추계학원 재단 이사장으로서 많은 여성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3·1 여성동지회 회장도 역임했다.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983

[별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선영에 안장되었습니다.

1983년 11월 22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123의 31번지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새암리(현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2000

[중앙여고, 황신덕 동상 철거]

서울 중앙여고는 일제 말기 제자를 정신대로 내보낸 친일 행적 논란으로 황신덕의 동상을 철거했습니다.

2000년 7월 서울 중앙여고는 일제말기 제자를 정신대로 내보낸 황신덕의 동상을 철거하였다.

2002

[친일파 명단 등재 및 논란]

이는 그녀의 공과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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